중국사에 나오는 한국사 자료들 - 후한서 동이전 읍루, 고구려, 구려 편
東夷傳 婁 읍루는 옛적 숙신이다. 부여 동북쪽 천여 리 되는 곳에 있다. 동쪽으로 큰 바다를 꼈고 남쪽과 북쪽은 옥저와 인접되었으나 북쪽 끝은 어딘지 알 수가 없다. 땅은 험한 산이 많고 사람의 모양은 부여와 비슷하다. 그러나 말은 모두 다르다. 오곡이 있고 마포가 있으며 붉은 옥과 좋은 잘이 난다. 이곳에는 군장은 없고 부락마다 모두 대인이란 것이 있다. 사람들은 모두 산림 사이에 산다. 일기가 몹시 추워서 항상 굴 속에서 사는데, 제일 깊은 데 사는 것을 가장 좋게 여긴다. 그래서 큰 집은 사다리 아홉 개를 놓아야 들어가는 집도 있다. 돼지를 잘 길러 그 고기를 먹고, 그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는다. 그리고 겨울에는 돼지 기름을 발라 두께가 여러 푼이나 되게 해가지고 바람과 추위를 막는다. 그러나 여름에는 발가벗고 다만 조그만 베로 앞뒤를 가릴 뿐이다. 그 사람들은 몸에서 냄새가 몹시 나고 더러우며 방 안에서 똥을 누면서 산다. 한나라가 일어난 뒤로 그 백성들은 부여에 붙여 사는데 종족은 비록 적어도 용력이 많고 산골짜기 험한 데 산다. 또 활을 잘 쏘아서 한 번 쏘면 사람의 눈을 뚫는다. 활의 길이는 四척이나 되고 그 활의 힘은 마치 쇠활과도 같다. 화살은 싸리나무를 쓰는데 그 길이가 一척八촌이나 되고, 청석으로 촉을 만들며, 그 끝에는 독약을 칠해서 사람이 맞기만 하면 이내 죽는다. 배 타기를 잘하고 도둑질을 즐기기 때문에 이웃 나라에서 모두 두려워하고 조심하지만 종시 항복시키지 못했다. 동이와 부여는 음식을 모두 그릇에 담아 먹는데 오직 이 읍루만은 유독 그렇지 않아 법이나 풍속이 가장 기강이 없다.(後漢書) 東夷傳 高句麗 고구려는 요동 동쪽 천 리 되는 곳에 있다. 남쪽은 조선, 예맥과 연결되었고, 동쪽은 부여와 접했다. 면적이 二천 리인데 큰 산과 깊은 골짜기가 많아서 사람들은 이런 곳을 따라서 살고 있다. 밭이 적어서 아무리 애써 농사를 지어도 먹을 양식이 부족하다. 그런 때문에 그 지방 풍속은 먹는 것에는 절약하고 집만을 호화롭게 지었다. 동이들이 서로 전해서 이들을 부여의 별종이라고 한다. 그래서 말이나 법은 비슷한 것이 많다. 절을 할 때는 다리 하나를 꿇고 걸음걸이는 모두 달음질을 친다. 이들은 모두 다섯 가지 족속이 있다. 연노부, 절노부, 순노부, 관노부, 계루부가 있다. 본래 연노부가 왕이 되었는데, 뒤에 차츰 힘이 약해지자 계루부가 대신 왕이 되었다. 벼슬 이름을 보면, 상가, 대노, 패자, 고추대가, 주부, 우태, 사자, 백의, 선인 등이 있었다. 그러나 무제가 조선을 멸하자 고구려로 현을 삼아 현도에 소속시키고 북과 부는 악기와 배우들을 주었다. 그래서 그 풍속이 음란하고 모두 깨끗한 옷을 입기 좋아하며, 밤이면 남녀가 여럿이 모여서 배우놀이와 음악을 즐겼다. 또 귀신과 사직과 영성에 제사 올리기를 좋아한다. 十월이면 하늘에 제사하기 위하여 사람들이 크게 모이는데 이것을 이름하여 동명이라고 한다. 그 나라 동쪽에 큰 굴이 있는데 이름은 수신이라고 한다. 여기에서도 역시 十월이 되면 귀신을 맞아다가 제사를 드린다. 그들이 공사로 모일 적에는 모두 비단과 금은으로 장식하고 특히 대가나 주부는 모두 두건을 쓰는데, 이 두건은 관과 같이 생겼고 뒤가 없다. 또 소가는 절풍을 쓴다. 이 절풍은 모양이 고깔과 같다. 이곳에는 감옥이 없고 죄가 있는 사람은 모두 평의에 붙여 죽이고 그 처자들은 몰수해서 종을 삼는다. 혼인하는 것을 보면 모두 아내의 집에 가서 살다가 자식을 낳아 장성하면 데리고 돌아온다. 늙으면 차츰 장사 지낼 준비를 하는데, 금은과 재물을 많이 써서 후하게 장사를 치르고 돌을 쌓아 봉분도 만들고 또한 소나무와 잣나무도 심는다. 그사람들의 성품은 흉악하고 급하고 기운이 세며, 싸움에 익고 도둑질을 좋아하는데 옥저와 동예가 모두 그들에게 소속되었다.(後漢書) 東夷傳 句驪 또 한 가지 이름은 맥이다. 또 딴 종족 하나는 소수에 의지해 살았기 때문에 이것을 소수맥이라 한다. 여기에서 좋은 활이 나는데 이것을 맥궁이라고 한다. 왕망 초년에 구려의 군사를 내서 흉노를 치려고 하는데 그 군사들이 가지 않으려 했다. 이에 억지로 그들을 보냈더니 모두 국경지방에서 도망하여 도둑이 되었다. 요서대윤 전담이 이를 추격하다가 전사했다. 왕망은 부하 장수 엄우를 보내서 이를 치게 했더니 구려의 후추를 꾀어서 국경에 들어가 목을 베어 수급을 장안으로 보내 왔다. 이것을 보고 왕망은 몹시 기뻐하여 고구려왕의 칭호를 고쳐 구려후라고 낮추었다. 이로부터 맥땅 사람들은 변방을 침략하기를 더욱 심하게 했다. 건무 八년에 고구려에서 사신을 보내서 조공을 바쳐 왔다. 이에 광무제는 그 왕호를 전대로 회복해 주었다. 광무제 二十三년 겨울에 구려의 잠지락, 대가, 대승 등 만여 호가 낙랑에 와서 붙였다. 二十五년 봄에 구려가 우북평 어양, 상곡, 태원 등지를 침략해 왔다. 이에 요동태수 제융이 은혜와 신의로 이들을 대우하여 다시 변방을 막을 수가 있었다. 후구려의 왕 궁은 나면서 이내 눈을 뜨고 물건을 보니 온 나라 사람들이 이를 꺼렸다. 그러더니 그가 자라자 용맹이 있고 씩씩하여 자주 변방을 침범해 왔다. 화제 원흥 원년 봄에 그들이 다시 요동에 들어와서 여섯 현을 침략하자 태수 경기가 이를 쳐서 깨치고 그 장수를 목 베었다. 안제 영초 五년에 구려는 다시 예맥과 함께 현도를 침략하여 화려성을 공격했다. 건광 원년 봄에 유주자사 풍환과 현도태수 요광, 요동태수 채풍 등이 군사를 내어 국경지방에서 그들을 쳐서 그 우두머리를 사로잡아 베고 병마와 많은 재물을 노획했다. 이에 궁은 그 아들 수성을 시켜 군사 二천여 명을 거느리고 역광등에게 사신을 보내서 거짓 항복했다. 그러나 광 등은 이것을 믿고 받아들이자 수성은 지세가 험한 곳에 웅거하여 큰 군사를 막고 비밀히 三천 명 군사를 보내서 현도와 요동을 쳐서 성곽을 불사르고 군사 二천 명을 살상시켰다. 이에 광양, 어양, 우북평, 탁군 등 속국의 군사 三천여 명을 모아 함께 이를 구원하기 위해 보냈으나, 이 때 맥 사람들은 이미 가버린 뒤였다. 이 해 여름에 다시 요동과 선비 군사 八천 명을 내어 요수를 쳐서 관리와 사람들을 죽이고 재물을 약탈하자 채풍 등이 이를 추격했으나 신창 땅에서 전사했다. 이때 태수의 밑에 있는 공조 경모와 병조연 용단, 병마연 공손포가 자기들의 몸으로 채풍을 막았으나 모두 칼에 맞아 죽었다. 이 싸움에 죽은 자가 백여 명이었다. 가을에 궁이 마한, 예맥의 군사 수천 명을 데리고 현도를 포위했다. 이에 부여왕이 아들 울구태를 보내어 군사 二만여 명을 거느리고 그 고을 군사와 힘을 합하여 쳐서 깨쳐 五백여 명을 보내어 군사 二만여 명을 거느리고 그 고을 군사와 힘을 합하여 쳐서 깨쳐 五백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이 해에 궁이 죽자 그 아들 수성이 자리를 계승하여 즉위했다. 이 말을 듣고 요광이 왕에게 말하여, 저쪽이 초상을 당한 때를 이용하여 군사를 내어 치자고 했다. 모든 의논이 이 말이 옳다고 해서 허락하려 했다. 그러나 상서 진충이 말하기를, [궁은 원래 사납고 교활했으나 이제 광이 능히 치지 못할 것이며, 또 사람이 죽은 때 공격하는 것은 의롭지 못한 것이니, 마땅히 사람을 보내서 조문하고 전에 잘못한 죄를 책망만 하고 용서해 주어서 앞으로 잘 지내도록 하는 것이 좋습니다]하니 안제는 이 말을 좇았다. 이듬해 즉 안제의 연광 원년에 수성이 한나라의 살아 있는 포로들을 돌려 보내고 현도에 나가 항복했다. 이에 조서를 내리기를, 수성 등이 반역한 행동이 말이 아닌즉 마땅히 머리를 베어 젖을 담아서 백성들에게 보여야 할 것이나 다행히 용서를 받아 항복하기를 빌어 왔다. 선비와 예맥은 해마다 침략해 와서 백성들을 노략하는데 그 수가 천 명씩이나 되니 이는 교화를 받으려는 마음씨가 아니다. 이로부터는 현관과 싸우지 말고 스스로 와서 따르고 백성들을 보내는 자는 모두 죄를 용서해 줄 것이다. 그러니 큰 집은 비단 四十필씩을 바칠 것이요, 식구가 적은 집은 그 반을 바칠 것이다]했다. 그 뒤에 수성이 죽고 그 아들 백고가 왕위에 올랐다. 이로부터 뒤로는 예와 맥이 모두 와서 항복하니 동쪽에는 일이 적었다. 순제 양가 원년에 현도군에 둔전 六부를 두었다. 이 때 질환 사이에서 다시 요동 서안평을 침범해서 대방현의 현령을 죽이고 낙랑태수의 처자들을 잡아 갔다. 건영 二년에 현도태수 경림이 토벌해 와서 백여 명의 머리를 베자 백고는 이에 항복해서 현도에 소속되기를 빌었다고 한다.(後漢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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