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프랑스 사회의 발전 1
1. 프랑스는 프랑크 왕국의 카롤링거 왕조를 유지하기 힘들었다. 서유럽의 역사 대부분이 중세 이전에는 로마의 역사에 포함되기 때문에 실제 중세 각국의 역사를 다룰 때에는 중세 이후부터 서술하겠습니다. 특히 프랑스, 영국, 독일 등의 주요 국가들은 그 기원이 모두 프랑크 왕국에서 출발하는 만큼 프랑크 왕국이 분열된 이후의 역사부터를 중세 각국사로 설정해서 다뤄야 할 듯 싶습니다. 프랑스의 역사는 카롤루스 대제 이후 분열된 프랑크 왕국에서부터 출발합니다. 프랑크 왕국이 베르됭 조약, 메르센 조약으로 분열된 이후 프랑크 왕국의 서부에서는 프랑크 왕국의 전통을 이은 카롤링거 왕조가 10세기까지 지속되었습니다. 서부 프랑크 왕국은 과거 로마 제국의 일부인 갈리아 지방이자, 프랑크 왕국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으로서 <역사적 중요성과 동질성, 상징성>을 가진 지역이었습니다. 이 지역은 행정구역도 로마의 행정구역과 일치하도록 구성되어 있었고, 각 주는 로마시대와 마찬가지로 교회의 교구체제와 일치하는 제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즉, 로마와 프랑크 왕국의 계승자임을 은연중에 나타내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실제 힘은 거의 미약해서 왕보다는 유력한 봉건제후들의 힘이 더욱 강했다고 보면 됩니다. 이 지역은 카롤루스 대제가 남긴 직할령은 거의 없었고, 프랑크 왕국 시기부터지지세력 확보를 위해 직할령을 분배하였던 지역인 만큼 실권은 실제 봉건제도에서 토지를 분배받은 봉건제후들에게 있었습니다. 특히 노르만족이 침입하면서 서프랑크의 왕권은 거의 유명무실하게 되었습니다. 2. 카페왕조가 시작되다. 이러한 상화에서 10c 이후 봉건귀족들과 고위 성직자들은 자신들의 왕을 직접 뽑았습니다. 그 결과 유그 카페가 왕으로 추대되어, 카페 왕조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카페 왕조는 허수아비 왕조였습니다. 봉건제후들이 카페왕조를 선출한 것은 어짜피 국왕 세력이 미흡하여 대제후들에게는 위협거리도 안되었으므로, 형식적인 국왕을 상정하여 봉건제도를 유지하려는 목적이었던 것이었습니다. 실제 서프랑크 지역의 왕은 형식상의 주군이었을 뿐, 가신들인 봉건제후들은 자신들끼리만의 연합정치를 했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렇게 허수아비 정권인 카페왕조가 14c까지 존속하였습니다. 카페왕조가 존속한 이유는 대제후들이 서로의 기득권과 이해관계에 따라 뽑은 형식적인 왕을 그대로 인정하였기 때문입니다. 또, 교회의 주교들은 대제후간의 피터지는 항쟁이 있을 경우 교회재산을 지키기 어려울 것이라 판단하여 형시적인 카페 왕조의 존속을 적극지지했습니다. 그리고, 카페 왕조에서는 14c까지 우연하게도 대를 이어 <왕자>가 계속 탄생함으로서 왕조의 단절이나 왕위계승 분쟁이 없었다는 점도 카페 왕조의 장기 집권을 가능하게 했던 것입니다. 실제 카페 왕조라는 있으나 마나한 왕조가 역사에서 사라지는 것은 14c 왕자가 탄생하지 않은 시기였습니다. 왕자가 탄생하지 않자 이 허수아비 왕조는 바로 몰락하고 새로운 역사시대로 전환합니다. 그러나, 카페왕조는 허수아비 왕조라고 해도 왕권강화를 위한 상당한 노력을 했었습니다. 그리고 카페왕조가 망하면서 다음 왕조의 왕위 계승을 둘러싼 영국과 프랑스의 대립은 백년 전쟁을 치르게 하였고, 이 전쟁을 기점으로 프랑스의 왕권이 상당히 강화됩니다. 그래서, 그 후 프랑스의 절대왕정 시기가 탄생하여 근대적인 프랑스 국가의 모습이 비로소 나타나게 됩니다. 3. 12c 왕권 강화의 시작 - 필립 2세 존엄왕의 노력 아주 미약한 왕조로 출발한 프랑스는 12c 루이 7세기에 상파뉴 백작, 블로아 공작 등과 처남관계를 맺어 왕실의 울타리를 마련하고, 이를 통해 왕권강화의 기반을 마련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프랑스 국왕은 왕령 자체가 아주 적은 소국의 제후 수준이었습니다. 카페왕조가 존재하는 것은 봉건제후들이 서로간의 전쟁을 피하는 완충지대로 여겼기 때문이었죠. 그러나 12c 말 필립 2세 존엄왕기를 맞이하면서 프랑스 왕권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합니다. 필립 2세는 영국세력을 프랑스에서 몰아내는 것이 왕권강화를 할 수 있는 계기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영국에서는 십자군에 참전했던 강력한 사자왕 리처드가 죽은 뒤, <존왕>이 집권하는 시기였습니다. 필립 2세는 봉건제도의 위계상 영국의 왕이 프랑스 왕에게 봉토를 받은 가신이었음을 주장하면서 영국왕이 주군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영국 영지를 몰수한다는 선언을 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노르망디, 앙쥬, 투레인, 메인> 지방을 프랑스 왕령으로 빼앗아 버립니다. 즉, 프랑스 내륙지대에 영국 땅으로 존재하던 광대한 영토를 카페 왕조가 획득함으로서 카페 왕조는 이제 어느 정도 왕령을 갖춘 대국의 면모를 보이게 됩니다. 그란, 아퀘텐, 가스코뉴, 기엔드 등의 해안지대 영토는 계속 영국왕령으로 남아 이 문제가 나중에 백년전쟁시 다시 붉어지게 되죠. 영국에서는 존왕이 미약한 카페왕조에게 영토를 잃은 것을 질책하면서 그 유명한 <대헌장>을 발표하게 됩니다. 영국은 이 때 왕권이 약해지면서 귀족회의에 왕권이 제약당하기 시작합니다. 이제 필립 2세의 노력으로 프랑스는 거대한 왕령을 획득하였습니다. 그리고 왕령의 증가는 곧 세금 확보가 원할해짐을 말하는 것으로 프랑스가 점차 부유해짐을 뜻합니다. 필립 2세는 거대한 왕령을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행정관을 각지에 파견하게 되며, 관료제도를 정비하기 시작합니다. 이 관료제에 입각하여 이 당시 탄생한 행정관을 <바이이>와 <세네샬>이라고 부릅니다. 바이이와 세네샬의 탄생은 곧 상당한 규모의 국가 관료제도가 탄생하였음을 상징합니다. 바이이는 증가한 왕령에서 왕권을 대행하면서 사법과 국왕의 수입을 관장하는 행정관료입니다. 이들은 귀족이 아닌 시민계급에서 선출하여 왕의 명령에만 복종하는 새로운 신분계층이었습니다. 국왕은 이들에게 봉급을 주는 한편, 이들에게 왕령 관리에 대한 최대한의 자율권을 확보해주었습니다. 세네샬은 바이이와 동일한 업무를 수행하지만, 이들이 파견된 지역은 국경지역이거나 전투가 잦은 위험한 곳이었습니다. 이들은 전투가 일어나는 곳에 파견해야 했으므로, 바이이처럼 시민계급이 아니라 어느 정도 전투가 가능한 기사나 영주계급 출신이었습니다. 자 그럼 이제 필립 2세의 왕령 확장 정책에 대한 내용과 그 이후 필립 4세 이후 프랑스의 발전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자세하게 다루겠습니다. 오늘은 이만 졸려서 자야겠네요. 글이 잘 안써집니다. 쿨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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