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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란에 관한 기본 안내 - 발췌
꾸란은 하나님께서 선지자 무함마드(하나님의 평화와 은총이 깃들기를)에게 계시하셨다. 꾸란은 하나님의 성서이다. 꾸란의 모든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어떤 인간의 단어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꾸란은 1400년 전에 계시되었으며, 무함마드(하나님의 평화와 은총이 깃들기를)의 시대에 글로 쓰여졌다. 꾸란은 보존되었으며, 그 원문이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존재한다. 세계의 어떤 종교도 자기 성서의 원본을 갖고 있지 않다. 꾸란은 아랍어로 계시되었다.오늘날 세계의 모든 꾸란이 똑같은 아랍어 본문을 갖고 있다. 각기 다른 언어로 쓰인 번역본의 구입은 가능하다. 주목해야 할 점은 번역이라는 것은 번역자의 외국어에 대한 이해와 지식 정도에 따라서 선택된 의미이다. 따라서 성 꾸란의 번역은 번역자에 따라 조금씩 차이를 보일 수 있지만 아랍어로 쓰인 원본은 언제나 변함없이 똑같다. 다음에 나오는 예시들은 의심의 여지없이 꾸란이 하나님의 언어라는 것을 증명한다. 한 명 혹은 여러 사람이 꾸란을 만들어냈다는 가설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확실히 입증할 증거를 제시한다.
1) 과학적 기적들이 꾸란에서 언급되는데 이것은 1400년전 어떤 사람도 들어 보지 못한 것들이다. 그 과학적 기적들은 현대 과학자들에 의해 확증되고 있다. 여러 기적들 중 한 가지를 여기 짧게 소개해 논다:
발생학:현대 현미경이 발명되고 발생학이 생겨나기 이전, 1400년 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인간 태아의 발달 과정의 정확한 단계를 꾸란에 알려주셨다:
실로 하나님은 인간[아담]을 흙으로 빚은 다음 그를 한 방울의 액 누트파[정자와 난자의 결합]로써 안정된 곳[여성의 자궁]에 두었으며그런 다음 그 정액을 알라꽈[거머리]로 만들고 다시 그것을 무드가[으깬 덩어리 모양]으로 만들었으며 그것에서 뼈를 만들고 그 뼈위에 살로써 그 뼈를 감싸게 한 후 다른 것들을 만들었나니 가장 훌륭하신 하나님께 축복이 있으소서
(성 꾸란 23:12-14)
Keith L. Moore(캐나다 토론토대학 Ph. D., F. I. A. C. 해부학) 박사는 이렇게 말한다. “접합체는 정자와 난자의 섞어진 결합(한 방울의 액)으로 만들어진다. 알라꽈(alaqah)라는 단어는 거머리를 뜻한다. 거머리가 피부에 착 달라붙는다는 의미에서 인간의 태아가 자궁내막에 착상한 후 7일에서 24일까지의 모습을 적절히 묘사하고 있다. 마치 거머리가 숙주에서 피를 빨아먹는 것처럼, 태아는 임신상태의 자궁내막에서 피를 흡수한다. 23일에서 24일 상태의 태아를 거머리와 닮은 모습으로 묘사했다는 것은 참으로 놀랍다. 현미경이나 렌즈 따위가 없었던 7세기에 의사들이 인간의 태아가 거머리와 닮은 모습이었다는 것을 알 리 없었다. 4주가 약간 지나면 태아는 밀알의 씨보다 더 작은 크기가 되기 때문에 육안으로 겨우 보이는 정도가 된다. 아랍어 무드가는 ”으깬 물진 혹은 으깬 덩어리“를 뜻한다. 4주 말기가 되면, 인간의 태아는 다소 으깬 살덩어리처럼 보인다. 으깨진 것처럼 보이는 것은 이빨모양과 같은 발생 체절(體節) 때문이다. 이 발생 체절(體節)은 척추골이 형성되는 것을 보여준다. 이 으깬 덩어리 단계를 지나면, 뼈와 근육이 형성된다. 이것은 발생학적 단계와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다. 먼저 뼈가 연골의 형태로써 형성되면, 발생체절 중배엽으로부터 근육이 발달하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꾸란에서 청각과 시각과 지각이 발달하는 정확한 순서를 계시하셨다.그리고 청각과 시각과 뇌를 주셨노라
(성 꾸란 32:9)
Keith L. Moore박사는 위의 구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눈이 만들어지기 전에 체내 귀의 원초단계가 시작된다. 그리고 뇌는 가장 나중에 구별된다.”
무함마드께서 하나님의 진정한 사도가 아니라면, 어떻게 현미경을 가지고 알아낼 수 있는 이들 발생학적 단계에 대해 먼저 알 수가 있었을까?
2) 꾸란에 계시된 역사적 사실은 오늘날 고고학의 발견으로 인해 정확히 증명된다.
이람이라는 도시:꾸란에서는 이람이라는 이름을 가진 도시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1975년까지 비무슬림들은 이 도시를 단순히 하나의 신화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었다. 이는 이 도시에 관해 어떤 문서도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1975년 이블라라는 이름의 다른 도시가 시리아에서 발굴되었다. 이블라시에서 발견된 서판의 일부에서 이람이라는 도시가 처음으로 언급되었는데, 당시 이람시는 이블라시와 주로 무역거래를 하던 곳이였다. 그 후 우주 왕복선으로부터 찍는 공간 사진술을 이용해, 아덴에서 가까운 곳에서 이람시가 발견되었다. 주목하자! 그 도시의 외관은 꾸란에서 높이 솟은 기둥들이 세워진 도시라고 묘사한 그것과 정확히 똑같다.
주님께서 아드 백성에 행한 이야기와 높은 빌딩을 소유한 이람의 백성에 관한 얘기를 아느뇨 그와 같은 힘센 백성이 대지 위에서 창조된 적이 없었노라
(성 꾸란 89:6-8)
3) 미래의 예언이 실현되다.
로마 제국의 멸망
꾸란은 많은 것들을 그 사건들이 일어나기 수년 전에 예언한다. 예를 들어, 로마가 한창 군사적 승리를 거두고 있을 때 로마의 멸망이 예언되었다. 그리고 그 예언은 실현된다.
4) 꾸란과 비슷한 것을 만들기 위해 여러 사람들이 도전했으나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아부라합에 대하여
선지자(하나님의 평화와 은총이 깃들기를)에게는 아부라합이라는 삼촌이 있었다. 이 사람은 이슬람을 증오하였으며, 선지자의 평판을 떨어뜨리기 위해 그를 쫓아다녔다. 그러나 아부라합이 세상을 뜨기 전 10년쯤, 꾸란의 한 장에서 아부라합은 결코 무슬림이 되지 않았으며, 영원히 저주받을 것이라고 계시되었다. 따라서 1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아부라합은 단 한 번이라고 다음과 같이 말하면 그 계시를 뒤엎고 무함마드가 틀렸다고 증명할 수 있었다. 무함마드에게 내가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며 절대로 무슬림이 되지 않고 불지옥에 들어갈 것이라는 계시가 내려졌다고 들었다. 자, 이제 나는 무슬림이 된다고 선언한다. 그렇다면 나에 대해 내린 계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제 너의 신의 계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그러나 10년이라는 시간이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아부라합은 그러지 못했다. 사실, 무함마드(하나님의 평화와 은총이 깃들기를)께서도 말씀하시기를, “당신은 나를 미워하고, 나를 죽이고 싶습니까? 그러면 그렇게 말하십시오. 그러면, 나는 죽게 됩니다. 자 어서 그렇게 말하십시오!” 그러나 아부라합은 끝내 그러지 못했다. 10년! 그 기나긴 시간 동안 결코 이슬람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이슬람의 말씀에 귀를 기울려 본적도 없었다.
5) 문학 작품단어의 사용과 언급
꾸란에 계시되기를
말씀이 완벽하고 세분화된 성서로.. (성 꾸란 11:1)
Garry Miller 박사는 이렇게 말한다. <꾸란에는 어떤 단어도 낭비됨이 없다. 각 절은 완벽하게 설명되어 있다. 최고의 형태이다. 같은 의미를 말하기 위해 더 적은 단어를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만일 누군가가 여기에 더 많은 단어를 사용한다면, 그것은 반복되며 넘쳐나는 정보로 보인다.>
논리학에서의 혁명이 최근 100년동안 일어났다. 주로 단어의 사용과 언급사이에 차이점에 관한 거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배제된 중용의 원칙에서는 각각의 문장은 거짓이거나 진실이라고 했다. 100년 전에 누군가가 배제된 중용의 원칙은 하나의 진술에 불과하며, 결국 하나의 법칙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지적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진실일수도 있고 한편으로는 거짓일 수도 있었다. 이것은 논리학자들이 한 단어의 사용과 언급에 대한 차이점을 이해할 때까지는 얽힌 매듭과 같은 문제였다. 우리가 한 단어를 사용할 때는 그 단어의 의미를 고려한다. 우리가 한 단어를 언급할 때, 우리는 단어 그 자체에 대해 토론하는 것이다. 만일 내가 토론토가 하나의 대도시라고 말했다면, 나는 토론토라는 장소가 하나의 대도시라는 것을 의미한 것이다. 내가 만일 토론토가 7개의 철자로 이루어졌다고 말한다면, 이 때는 `토론토(Toronto)'라는 단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첫 번째 경우에서 나는 단어를 사용했고 두 번째 경우에서는 그 단어를 언급한 것이다.예수와 아담위의 개념과 완벽하고도 상세히 설명되어 있는 절들로 이루어진 꾸란을 연관시키면서, 다음의 절들을 살펴보자: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그랬듯이 예수에게도 다를바가 없노라
(성 꾸란 3:59)
이 문장에서 우리가 확실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동등함이다. 이 절은 계속해서 어떻게 이것이 진실이 될 수 있는지를 설명한다. 왜냐하면 아담, 예수 모두 보통의 인간의 탄생 방법인 어머니와 아버지를 갖지 않는 특별한 조건아래서 탄생했기 때문이다.그러나 이 말씀에 대한 언급은 어떠한가? 단어들을 단어자체로 고려하고 있다면, 이 문장을 또한 예수는 아담과 마찬가지이다라고 읽을 수 있다는 것을 꾸란의 필자는 알고 있었던가? 자, 이 문장에서 예수와 아담은 같은 철자가 아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 단어들이 위 복음에서는 똑같아지는가? 대답은 꾸란의 색인을 살펴봄으로써 알 수 있다. 성 꾸란에서는 예수라는 단어가 총 25번 언급된다. 아담이라는 단어를 찾아보면 놀랍게도 똑같이 25번 언급됨을 알 수 있다. 꾸란에서는 심지어 단어의 횟수로도 아담과 예수가 정말로 똑같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동등하다. 자, 이 아이디어를 가지고 계속해서, 어떤 것이라도 다른 무엇인가와 동등하다고 표현된 것이라면, 모두 체크해보자. 모든 경우에 이 공식은 적용된다.꾸란에는 어떤 한 가지가 다른 어떤 것과 같지 않다고 계시된 부분이 있다. 어떤 것이 다른 어느 것과 같지 않다고 언급된 몇 부분을 훑어보면, 꾸란에서 그 단어들의 언급된 횟수가 서로 같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보자. 꾸란은 장사가 이자와 같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한 단어가 6번 발견되면, 다른 단어는 7번 발견될 것이다. 모든 다른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한 가지가 다른 어떤 것과 같지 않다고 일러질 때에는, 한 번의 차이점이 있다. 하나가 4번 발견된다면, 다른 하나는 5번, 하나가 7번이면, 다른 하나는 8번이다. 이 꾸란의 작가는 이것이 의도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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