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 이야기 34 - 한 무제의 황제지배체제 완성
이번 장에서는 한무제에 대한 이야기만 다루겠습니다. 한무제의 업적을 내치, 외치, 유교정치, 동중서라는 관점에서 나눠 다루겠습니다. 상홍양 등에 관련된 경제정책은 다음장에서 따로 다루겠습니다. 1. 한무제의 황제지배체제의 배경 한무제의 정치체제는 중국 역사상 <황제지배체제>를 현실적, 이념적으로 완성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그는 중국 역대 왕조에서 계속적으로 이용할 황제지배체제를 논리적, 현실적으로 완성하였고, 실제 그 이념에 따라 가장 고대 중국에서 가장 강력한 황제권을 구축할 수 있었습니다. 그럼 이렇게 황제지배체제를 완성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이었을까요? 첫 번째, 앞에서 설명한 문제, 경제가 이루어놓은 업적 때문입니다. 역대 유명한 정복군주 중에서 홀로 잘나서 유명해진 왕은 거의 없습니다. 광개토-장수왕에게는 소수림왕이 이룬 불교-율령 체제가 뒷받침 되었고, 진흥왕에게는 지증-법흥왕의 체제 개혁이 뒷받침되었죠. 중국 역대 황제들도 마친가지입니다. 한무제의 앞에는 문경지치라는 중국 역대 역사로 볼 때 가장 안정된 평화기가 있었습니다. 그 때 만들어진 토지제도와 사회안정으로 인해 축적된 정치, 경제적 역량이 한무제를 통하여 빛을 발한 것입니다. 두 번째로, 군현제를 실시하여 중앙집권적 전제군주체제를 정비하였고, 유교를 관학화 함으로서 그 전제체제를 사상적으로 정비하였다는 점입니다. 그 사상적 체계 정비에는 동중서라는 걸출한 학자의 역할이 매우 지대하였습니다. 동중서는 법가적인 황제지배체제 사상에 대한 <이념적 윤리>로서 황로사상, 음양사상, 유교사상 등을 총원하여 체계적인 황제지배체제의 이론을 완성하였고, 이것이 유가적 덕치주의를 포함한 <천인상응설>로 귀결됩니다. 세 번째로 그의 황제지배체제는 <중화사상>의 완성으로 주변 <이민족>에게 조공을 받고, 책봉을 해주겠다는 유교적 조공-책봉 관계 속에서 더욱 강력해졌습니다. 이를 원할히 하기 위하여 한무제는 동,서,남,북으로 엄청난 원정을 감행하고, 정복전쟁을 시도합니다. 2. 연호와 역법에 관심을 두다 한무제는 황제권 강화를 위하여 상당히 많은 제도를 만들었고, 구래의 제도는 수정하였습니다. 일단 수용한 제도를 보면, 진시황제의 군현제를 부활한 것, 통제경제체제를 도입한 것입니다. 이러한 진나라의 제도에다가 유교적 이념을 더함으로서 법가와 유가를 혼합한 황제지배체제가 완성되었습니다. 그는 일단 <연호>를 사용하였습니다. <연호>란 황제가 정한 일종의 <달력>을 말합니다. 예로 한무제가 즉위한 지 첫 해에 <건원>이라는 연호를 쓰면 그 해부터가 건원 1년이 되어 날짜계산이 시작되는 것이지요. 황제는 역사적 상황이 변동할 때마다 여러 연호를 바꾸어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연호를 사용한다는 것은 단지 시간개념을 넘어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일단 강대국이 연호를 사용하면 그와 연관된 약소국들은 강대국의 연호를 수용해야 했고, 따라서 <연호>라는 것은 하늘이 부여한 황제의 칭호로서 천자국이 사용하는 것이었습니다. 훗날 고구려 역시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대에 연호를 사용하는데, 이렇게 연호가 등장함은 그 나라가 천하의 중심이며, 천자국이라는 <자국중심의 천하관>을 과시하는 것입니다. 훗날 신라에서는 체제가 정비되는 법흥왕기부터 연호가 등장합니다. 한무제 때는 또 역법을 중히 여겼습니다. 연호와 달리 역법을 사용한 달력은 따로 있었는데, <역법>이라는 것은 연호와 같이 천자를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역법은 하늘의 변화를 관측하여 천자가 하늘의 뜻을 파악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따라서 역법에 따라 국가의 대사를 정하는 것은 천자의 임무였습니다. 동중서는 이것을 하늘의 뜻과 천자의 뜻이 서로 상응하는 것을 관찰한다고 하면서 <천인상응설>의 이론적 근거로도 활용하였습니다. 3. 내조정치를 시작하다. 한무제기에는 진의 제도를 본따 중앙행정기구를 정비하는 데, 이것이 중국 전통 행정제도의 바탕이 됩니다. 한무제는 진시황의 3공제를 받아들이지만, 이중에서 행정권을 가진 승상의 권한을 약화시킵니다. 대신 황제의 개인 비서인 상서, 중서를 중용하여, 상서 중서가 적극적으로 황제를 보필하면서 정치에 참여합니다. 이것을 보통 <내치주의>에 입각한 정치라고 합니다. 중국사 전체에서 보았을 때는 <내조정치>라고도 하죠. 이로서 한나라에서는 국왕권을 보호하는 비서기관인 시중, 중상시의 권한이 상당히 강해지고, 이것이 한무제 사후 한나라 멸망으로 이어지는 원인으로 작용합니다. 한의 중앙제도에 관해서는 제도사 파트에서 상세히 다루겠습니다. 여기서는 그만... 4. 지방 제후들을 철저히 통제하다. 한무제는 강력한 군현제를 실시하여 지방의 제후들을 감시합니다. 일단 군현에 파견하는 관리의 수가 엄청나게 증가하였습니다. 또, 군현을 총체적으로 감시하여 황제에게 보고하고, 황제가 군현에 내리는 명령을 전달하는 관리로서 <자사>라는 것을 만듭니다. 이 자사는 위진남북조 시대로 가면 군현과 함께 하나의 행정구역화됩니다. 한무제는 지방 제후를 약화시키기 위해 철저한 입법에 의한 <법>으로서 통제하여 감히 황제에게 덤비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특히 제후왕을 감독하기 위한 법으로 추은령, 주금률, 좌관률, 부익률, 아당률 등을 제정하였습니다. 그 내용을 볼까요? 추은령 : <추은>은 은혜를 나누어 가지라는 뜻입니다. 제후왕이 죽으면, 제후왕의 땅은 1명이 아닌 여러명의 자식들에게 분할 상속하게 합니다. 따라서 제후왕의 영토는 시간이 지날수록 소규모로 쪼개지게 되고, 결국 황제에게 다시 귀속되게 되는 것이지요. 주금률 : <주금>은 금을 만들어 바치라는 뜻입니다. 천자가 하늘에 제사지낼 때 종묘제사를 하는 8월이 되면 제후들은 제사에 필요한 황금을 진상해야 합니다. 만약 황금의 양과 질이 떨어지면 처벌을 받게 됩니다. 좌관률 : <좌관>은 품위에 위배되는 행동을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제후왕들은 황제의 허락없이 백성들과 절대 군신관계를 맺을 수 없다는 법입니다. 부익률 : <부익>은 더 이상의 노역을 더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제후왕은 황제의 허락없이 황제가 정한 조칙에 위배되는 부역이나, 잡세, 토지세를 일체 걷을 수 없다는 법입니다. 아당률 : <아당>은 자신의 당을 만들지 말라는 뜻입니다. 만약 파견된 관리(자사 등)가 제후왕의 죄를 알면서도 한패가 되어 죄를 황제에게 보고하지 않은 경우 파견된 관리의 죄를 엄중하게 처벌하겠다는 법입니다. 이러한 강력한 제후 통제는 곧 제후들이 봉토조세자로 전락하게 되어 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무제 이후 지방의 제후들은 왕권에 반항할 힘을 잃었습니다. 따라서 한무제 사후의 정치투쟁은 중앙에서 한무제가 키운 내조와 환관끼리의 다툼이었습니다. 반면, 지방에서는 토지를 바탕으로 경제적 힘을 키워나가게 되는데, 이러한 경제적으로 성장하여 정치세력화되는 세력이 훗날의 <호족>세력입니다. 5. 유교를 관학화하다 한무제기에 유교가 관학화 되면서 국가 사상으로 발전한 것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중 첫 번째 이유를 들라면, 한초에 유행한 황로사상 때문입니다. 황로사상은 도가적 색채가 강하여 무위자연적인 성격을 내포한 사상입니다. 보통은 신선술을 내포한 사상이라고도 여겨지죠. 한나라 건국 자체가 유가에 무식한 유협집단과 지방세력에 의한 것인 만큼, 한 초에에는 미신적인 도가사상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도가는 현세를 부정하고 은둔과 자유를 추구하는 협객집단의 이념과 많이 맞았습니다. 그러나 인위적 정치를 배격하고 <자연으로 돌아가 편히 누려라>라는 사상은 중앙집권적인 한의 통치이념과는 조금 거리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한에서는 더 체계적인 통치이념이 필요했습니다. 이 때 가장 체계적이고 윤리적인 사상이 바로 중용을 바탕으로 하는 유가였습니다. 유가의 이론은 현실적이고 왕권옹호의 성격이 강했습니다. 또 수신제가와 치국평천하라는 국가윤리는 발췌하여 사용하기 딱 좋았습니다. 거기에 유가는 다양한 사상을 포용할 수 있는 <경전>이 있었습니다. 다양한 경전은 필요한 부분을 구미에 맞게 편집해서 쓸 수 있는 학실한 이점이 있었습니다. 유가 중 공자, 맹자, 순자 등등 원하는 사상가를 원하는 만큼 원하는 때 이용하기 좋았으니까요. 실제로 유가의 사상에서 자신이 필요한 부분만 발췌하여 독특한 유가논리를 펼친 사상가가 바로 <동중서>입니다. 동중서는 한무제의 학사가 되어 현량과(효렴과)를 통해 어진 관리를 추천으로 뽑아 그들과 함께 유교사상의 기반을 다졌습니다. 대표적인 그의 사상은 <천인상응설>로 대표됩니다. 이것은 하늘과 인간은 그 5행의 흐름에 일통하여 서로 감응한다는 설인데, 여기서의 감응 주체는 곧 천자인 황제와 자연의 주제자인 우주입니다. 따라서 이 사상은 천자의 권위를 신격화하는 논리로서 이용됩니다. 이 논리는 천자의 권위를 5행과 연결시킵으로서 극대화됩니다. 하 - 은 - 주의 3대는 각각 오행중 화, 목, 토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그 이후 한 왕조는 천명을 물려받은 5행의 연속이자, 천지신명의 뜻이므로 누구도 도전할 수 없다는 논리로 귀결됩니다. 따라서 천자는 하늘의 뜻을 항상 살펴야 하는데, 이 하늘의 뜻을 살피기 위해 마련된 것이 <역법>입니다. 그리고 5행은 또 다시 끊임없이 화,목,토,수,금으로 돌고 돌므로 이 천인상응의 논리는 <참위설, 예언설>과 같은 미신적 방법론과도 연결됩니다. 실제 이 사상은 비과학적이고 너무 신비주의적이다라고 하여 크게 비판받았고, 중국 과학사상의 발전을 가로막는 미신적인 사상으로 취급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실제 왕망이 전한을 찬탈하고 신을 건국할 때 이 사상을 근거로 5행의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였고, 그는 동중서의 천인상응설과 유교주의를 인정하기도 하였습니다. 6. 유교주의를 위한 제도 한의 유교에서 몇가지 제도를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유교 연구를 위해 5경박사를 두었는데, 5경박사란 오경을 연구하는 사람들입니다. 중국은 한, 당 대에는 오경, 이후 송 이후에는 사서가 유교저서에서 강조됩니다. 또 한 대에는 지방의 군에서 청렴한 청년들을 인품에 따라 등용하는 제도가 있었는데, 이를 <효렴과>라고 합니다. 효렴과는 지방에서 추천된 청년을 중앙에서 천거하여 관리로 임용하였습니다. 또 유교 교육을 받은 자들을 관료로 삼기 위한 학교 제도로 <태학>이 있었습니다. 고구려에도 후대 태학이 존재하는 것으로 보아 한의 영향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고도 합니다. 이 유교적 제도가 완성됨으로서 거칠었던 법가적 황제지배체제가 유가적 이념에 의해 부드럽게 다듬어 집니다. 이 모든 제도들은 유가 이념을 반영하는 것으로 후대 당나라에서 더욱 정교하게 제도화됩니다. 7. 한무제의 외정 한무제의 외정은 동, 서, 남, 북의 <오랑캐>을 모두 <중화>라는 민족 아래 둠으로서 중국 민족의 우월성을 과시하고 중국 외부의 국가들에게 <봉건적 제후>로서의 권한을 준다는 의식에서 비롯됩니다. 그러나 실제면에서 보면 흉노 등의 이민족에 시달렸던 중국이 그 고질적인 폐단에서 벗어나기 위한 면이 더 강합니다. 동으로는 고조선을 정복하고 한4군을 설치합닏, 서로는 하서4군을 설치하고, 비단길을 개척하여 서역 무역의 활로를 열었습니다. 남으로는 베트남 북부에 진출하여 남해9군을 설치합니다. 북으로는 흉노와 끊임없이 격전을 벌입니다. 이러한 광대한 동,서,남,북의 정벌을 동시에 추진할 수 있었던 것은 문제, 경제 시대의 광대한 경제력과 상업통제로 인한 이윤 때문이었습니다. 특히, 서역에 장건을 파견한 이유는 흉노를 막기 위해 흉노와 적대적인 관계의 국가들(월씨국, 오손국)과 동맹을 맺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실제 목적은 달성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서역 이동으로 비단길이 개통되었고, 동서문화의 교통이 열렸으며 중국인들은 서역이라는 세계에 관심을 가지고 세계관을 확대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특히 서역과의 비단 무역을 중국이 직접 주도함으로서, 비단 중계무역을 하던 흉노가 경제적 타격을 입게되었고, 결국 비단길의 개척은 무력이 아닌 경제력으로서 흉노를 압도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흉노는 이후 고조선과의 연계를 통하여 세력을 동으로 확장하려고 했고, 고조선 역시 대동강 중계 무역을 통해 남방과 흉노, 중국을 연결한 무역 네트워크를 만들려했습니다. 결국 한무제는 고조선 정벌을 집중적으로 시도하였고, 이에 고조선이 멸망하면서 흉노의 세력은 더욱 갈 곳을 잃게 됩니다. 이후 흉노는 계속적으로 중국 국경을 넘나들며, 중국을 괴롭혔고 한이 망한 뒤 5호 시대에 중국 영토 안에 안주하여 중국 국가로서 한 때를 보내게 됩니다. 그럼 다음 장에서는 한무제 시기 경제와 관련된 내용을 포스팅 해보겠습니다. 오늘은 자야겠네요... 이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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