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 열전 인물 정리표
1. 강수 석체의 아내가 꿈에 머리에 뿔이 달린 사람을 보고 낳은 아이가 강수인데 어렸을 적부터 매우 총명했다. 태종대왕이 당나라 사신이 전한 조서 중 해석이 되지 않는 부분이 있어 강수를 불러 물었더니 해석에 막힘이 없었다. 왕은 강수를 기특히 여겨 임생이라 부르고 해마다 조 100섬을 주었다. 강수가 죽은 후 그의 아내는 왕이 주는 장사비용과 물품을 사찰에 기증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2. 거도 탈해 이사금때에 거도가 변경의 지방관이 되어 군사들에게 매년 마기 놀이를 즐기게 하여 적군이 이를 이상히 여기지 않도록 하고, 불시에 우시산국과 거칠산국 두 나라를 침략하여 정벌하였다. 3. 거칠부 거칠부가 승려가 되어 고구려를 여행할 적에 법사 혜량의 설법을 듣고자 그를 찾아갔다. 혜량은 그가 잡힐 것을 염려하여 돌려보냈다. 후에 고구려, 백제가 신라에게 함락됐을 때 혜량이 자신을 고구려로 데려가길 청하였다. 거칠부와 함께 온 혜량은 승통이 되었다. 4. 검군 서리로 인한 기근이 들어 백성이 굶고 있을 적에 궁중의 사인들이 모여 창예창의 곡식을 나누어 가지기로 모의하였으나 검군은 이를 거절하였다. 이에 사인들은 자신들의 이야기가 새어나갈까 염려하여 검군을 모살하기로 하였다. 검군은 자신을 죽이려는 것을 알고도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고 독이 든 음식을 먹고 꿋꿋하게 죽었다. 5. 견훤 ․ 892년(진성왕6년): 견훤은 여러 무리를 모아 무진주를 습격하여 스스로 왕이 되었으나 민심을 얻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궁예가 그의 부하가 되었고 완산주에 이르니 백성이 그를 환영하였다. ․ 900년(효공왕4년): 드디어 후백제왕을 자칭하고 관직을 마련하였다. ․ 901년(효공왕5년): 대야성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 910년(효공왕14년): 금성을 10여일이 지나도록 포위하였다. ․ 912년(신덕왕원년): 궁예와 덕진포에서 싸웠다. ․ 918년(경명왕2년): 태조가 왕위에 오르자 견훤은 이를 축하하였다. ․ 920년(경명왕4년): 견훤이 신라를 공격하자 신라왕이 고려에게 지원을 요청하고 이 소식에 군대를 이끌고 물러갔다. ․ 924년(경애왕원년): 아들 수미강을 보내 조물성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자 태조에게 말을 바쳤다. ․ 925년(경애왕2년): 태조와의 전쟁에서 승부를 낼 수 없어 서로 인질을 보내어 화친하고, 후당에 사신을 보내 제후국을 청하였다. ․ 926년(경애왕3년): 인질로 보낸 진호가 죽자 말을 돌려줄 것을 청하였다. ․ 927년(경순왕원년): 신라를 침략하고, 태조와 싸웠다. 신라가 태조에게 지원을 요청하자 견훤은 태조에게 경고의 편지를 보냈다. ․ 928년(경순왕2년): 태조가 거절의 답신을 하였고 견훤과 태조의 싸움이 계속되었다. ․ 929년(경순왕3년): 견훤이 순주성을 습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 932년(경순왕6년): 태조에게 항복한 신하를 벌하고 다시 고려를 침략하였다. ․ 934년(경순왕8년): 견훤의 부하들이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 견훤의 가족과 멸망: 견훤이 금강에게 왕위를 물려주려하자 형들이 모의하여 견훤을 가두고 금강을 살해하여 신검이 왕이 되었다. 견훤이 도주하여 고려로 가자 태조는 그를 환대하였다. 견훤은 태조에게 신검을 죽여줄 것을 부탁하고 태조가 백제를 침략하였다. 견훤은 근심으로 사망하였다. 6. 계백 신라와 당이 백제를 침략하자 계백은 자신의 가족을 스스로 죽이고 혼신을 다하여 싸웠지만 결국 진퇴를 반복하다 힘이 다하여 죽었다. 7. 관창 백제와의 전쟁에서 적진에 돌격하였다가 계백에게 잡혔으나 계백이 그를 차마 죽이지 못하고 돌려보냈다. 계백을 죽이지 못한 것이 분통하여 다시 돌격하자 계백이 그를 죽였다. 이에 용기를 얻은 신라군이 진격하니 백제가 패하였다. 8. 구근 원정을 따라 술성을 쌓을 적에 원정이 구근이 일을 게을리 한다는 소문을 듣고 구근을 벌하자 뜬소문에 자신을 벌함을 지적하자 원정이 부끄러워하였다. 9. 궁예 892년(진성왕6년): 선종에게 도적 양길이 병사를 나누어 주어 동쪽지방을 점령하였다. 894년(진성왕8년): 장군이 된 선종에게 태조가 의탁하여 철원군 태수의 관직을 주었다. 896~897년(진성왕10~11년): 송악군을 도읍으로 삼고 번창한다는 소식을 들은 양길이 침략하였으나 이를 미리 알고 물리쳤다. 898년(효공왕2년): 태조를 정기대감으로 삼고 팔관회를 베풀었다. 899년(효공왕3년): 태조가 전쟁에서 승승장구하자 아찬의 직위를 주었다. 901년(효공왕5년):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 고구려의 원수인 신라를 멸하겠다고 하였다. 904년(효공왕8년): 나라를 세우고 관제를 정비하였다. 905년(효공왕9년): 신라를 병탄하고자 하여 신라에서 오는 자는 모두 죽였다. 911년(효공왕15년): 태조를 대아찬 장군으로 삼고 스스로 미륵불을 자칭하였으나 그의 설법은 바르지 못했다. 913년(신덕왕2년): 태조를 파진찬으로 승급시켜 시중으로 삼았다. 914년(신덕왕3년): 연호를 정개로 바꾸고 태조를 백선장군으로 삼았다. 915년(신덕왕4년): 부인이 왕의 행실에 대해 간하자 부인을 죽이고 죄 없는 백성을 괴롭히는 등 매우 난폭하였다. 918년(경명왕2년): 상인 왕창근이 산 거울에 왕이 망한다는 시가 적혀 있었다. 이에 장수들이 태조를 대왕으로 추대하였고 궁예는 산속으로 도망하였으나 살해당하였다. 10. 귀산 귀산이 원광법사에게 가르침을 청하니 '세속오계'의 도를 일러주었다. 백제가 공격해 왔을 적에 원광법사의 가르침에 따라 물러서지 않고 싸우다 전사하였다. 11. 김대문 김대문은 한산주 도독이 되어 고승전, 화랑세기, 악본, 한산기 등을 지었다 12. 김생 김생은 글씨에 능하여 신의 경지에 이르렀다. 홍관이 양구와 이혁에게 김생의 글씨를 보이자 왕우의 글씨로 착각 할 정도였다. 13. 김양 흥덕왕이 죽자 김양은 우징, 예징과 함께 균정을 왕으로 추대하였으나 균정이 죽고 말았다. 후에 우징과 결탁하여 신라를 치고 우징이 왕이 되었는데 그가 신문왕이요, 그의 아들이 문성왕이다. 김양은 50세에 사망하였다. 그의 종부형은 흔이다. 흔은 김양을 도와 싸우다 패하자 소백산에 들어가 47세에 죽었다. 14. 김영윤 할아버지 흠춘은 화랑이었다. 계백과 싸울 적에 흠춘의 아들(영윤의 아버지) 반굴이 전사하였다. 훗날 영윤이 고구려의 실복과 싸울 적에 적군의 기력이 다하기를 기다리는 것은 옳지 못하다 하여 적진에 들어가 전사하였다. 15. 김유신 나이 15세에 화랑이 629년(진평왕 51) 8월 고구려의 낭비성을 공격할 때 중당의 당주로서 출전하여 큰 공을 세운 이후 여러 전투에 출전하여 큰 공을 세웠다. 654년 3월 진덕여왕이 후사 없이 죽자 이찬 김춘추를 왕으로 추대하였으니 이가 태종대왕이었다. 660년(태종대왕 7) 1월 상대등에 올랐고, 7월 신라 정예군 5만과 소정방이 이끈 당나라군 13만이 연합하여 사비성을 함락하여 백제를 멸망시켰다. 661년(문무왕 1) 7월 나당 연합군과 함께 고구려를 정벌하러 가는 도중인 9월 옹산성에 있는 백제의 잔적을 토벌하고, 12월 당나라군의 군량미를 실어다 주었으나 당나라군의 철수로 고구려 정벌은 실패로 돌아갔다. 665년 당나라 고종으로부터 봉상정경평양군개국공에 봉해졌다. 667년(문무왕7) 왕을 따라 당나라군과 함께 고구려 정벌에 나섰으나 실패하고 11월 환군하였다. 이듬해 9월 나당 연합군으로 평양을 칠 때 연합군 대총관이 되었으나 왕명으로 금성에 남아 국방을 도맡았다. 고구려 정벌 직후 태대각간의 최고직위에 올랐다. 문무왕 13년 7월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16. 김인문 23세에 왕명을 받아 당나라에 들어가 숙위하였다. 당 고종이 충성이 가상하다고 여겨 죄령군위장국을 제수 하였다. 신라에서 여러 번 백제의 침공을 받자 당군의 원조를 얻어 그 수치를 씻으려 하여 숙위하러가는 인문에게 유시하여 군사를 청하려 하였다. 신구도행군부대총관을 제수 받고 소정방과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켰고, 파진찬․각간으로 승진되어 당나라에서 숙위하였다. 당고종 총장원년 당나라와 연합하여 군사 20만 명을 출동하여 평양성을 공격하여 한달 여 만에 보장왕을 잡았다. 상원 원년 문무왕이 고구려의 반중을 받아들이고 백제의 옛 땅을 차지하니 당의 황제가 크게 노하여 인문을 세워 왕을 삼고 그의 형을 대신하게 했는데 간곡히 사퇴하였고 결국 왕이 사절을 보내 황제가 용서하여 복위시켰다. 연재 원년 4월29일에 병으로 누워 당경에서 흥서 하니 향년 66이었다. 인문이 일곱 번 당에 들어가 그 조정에 숙위한 월일을 계산하면 무릇 22년이나 된다. 17. 김후직 대왕이 사냥을 좋아해 나라를 돌보지 않자 왕께 충고를 하였으나 귀담아 듣지 않고 계속 사냥을 하였다. 후직이 죽으며 자신의 무덤을 왕이 다니는 사냥 길에 만들어 주면 죽어서도 반드시 임금을 깨우쳐 주겠다 하였다. 후에 왕이 출행을 하는 중 ‘가지 마시오’하는 소리가 들려 물으니 김후직의 무덤이 있다 전하며 그의 이야기를 하였다. 이에 왕이 다시는 사냥을 나가지 않았다. 18. 김흠운 영휘 6년 태종대왕이 백제와 고구려가 함께 신라 변경을 침해함을 분하게 여겨 군사를 출동할 때 흠운을 낭당대감을 삼으니 그는 군사들과 달고 쓴 것을 같이 하였다. 양산 아래 진을 치고 조천성을 진공하려 할 때 백제인 들이 새벽에 성루에 올라오니 군사가 진정하지 못했다. 적이 이를 틈타 공격하니 화살이 비 쏟아지듯 모여들었다. 흠운이 적을 기다리고 있는데 대사 전지가 흠운은 신라의 귀골이니 이대로 죽는 것은 신라에게 부끄러운 일이라 하니 흠운이 듣지 않고 칼을 빼 휘두르며 적과 싸워 수명을 죽이고 자신도 죽었다. 19. 남생, 남건, 남산 연개소문의 아들 남생은 여러 관직을 하였다. 지방의 부를 살피러 가자 그의 동생 남건, 남산이 나라 일을 대신했다. 어떤 사람이 그들에게 남생이 장차 그대들을 제거 할 것이라고 전하고 남생에겐 남건과 남산이 그대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말했다. 이에 남생이 첩자를 보내자 그를 체포하고 남생의 아들 헌충을 살해하니 남생이 당으로 갔다. 아들 헌성을 보내 고종에게 전하자 황제가 그들을 환대하였으며 46세에 죽었다.
20. 녹진 충공이 병이 들어 관의를 불러 진맥하니 심정에 병이 있어 용치탕을 복용해야 한다 하였다. 그는 21일의 휴가를 얻어 손님을 만나지 않았는데 녹진이 찾아와 뵙기를 청하니 문지기가 막고 들이지 않았다. 녹진이 상공께 꼭 한 말씀을 드려서 답답한 근심을 풀어드려야 하니 물러갈 수 없다고 하여 불러들여 뵙게 하니 녹진이 나아가 지극한 말과 높은 담론으로 병을 깨칠 수가 있으니 들어줄 것을 청하였다. 상공이 허락하였다. 각간이 녹진의 말을 듣고 의관을 보내고 왕궁으로 입조하였다. 왕은 이 이야기를 듣고 직언 하는 사람이 있으니 기쁜 일이라 하였다. 후에 웅천도독 헌창의 반란 때 녹진이 공이 있으니 왕이 대아찬의 위계를 주었으나 사퇴하고 받지 않았다. 21. 눌최 진평왕 건복 41년 갑신 10월에 백제가 군사를 일으켜 내침 하였는데 백제는 침공하기를 더욱 강하게 하니 속함․기잠․용책의 세 성이 혹은 항복하였다. 눌최가 다른 세 성을 굳게 지켰는데 5군이 구원하지도 않고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 강개하여 눈물을 흘리며 군사들에게 지사와 의기남아가 절개를 다하여 이름을 날릴 때라며 어찌할 것인지 물었다. 군사들도 눈물을 뿌리며 목숨을 아끼지 않고 명령을 따르겠다고 하였다. 성이 함락되려 할 때 군사들은 거의 다 죽고 몇 사람 밖에 남자 않았으나 모두 결사적으로 싸워 구차스럽게 목숨을 면하려는 마음이 없었다. 모두 죽은 후 왕은 비통하여 눌최에게 급찬벼슬을 추증하였다. 22. 도미 도미는 백제사람으로 그의 아내는 아름답고 지조가 있었다. 개루왕이 도미를 시험해 보기 위해 신하를 시켜 겁탈하려 하자 계집종을 치장시켜 들여보내었다. 노한 개루왕이 도미의 눈을 빼 배에 태워 강에 띄우고 부인을 강제로 음행을 하려 하자 월경중이라 거짓 고하고 도망쳤다. 천성도에 다다르니 남편이 아직 죽지 않아 둘이 함께 나그네로 일생을 살았다. 23. 명림답부 명림답부는 고구려 신대왕 때의 국사이다. 한이 침공하려 하자 모두 군사를 출동시켜 방어하길 청했으나 성을 쌓아 식량이 다하길 기다리자 하여 왕이 그 말을 따랐다. 한이 성을 침략하지 못하고 굶주려 돌아갈 때, 명림답부가 이를 따라가 승리하였다. 신대왕 15년 113세의 나이로 죽었다. 24. 물계자 신라 이사금대의 사람으로 여덟나라가 아라국을 치려하자 사신을 보내어 구원을 요청하자 왕손 날음이 그들을 구해주었다. 이 전투에서 물계자의 공이 컸으나 왕손의 미움을 사 공이 기록되지 않았다. 물계자는 공을 자랑하는 것은 선비의 도리가 아니라 하며 원망하지 않았다. 3년 후 갈화성 전투에서도 공을 세웠으나 역시 얻는 바가 없었다. 이에 물계자는 목숨을 바쳐 싸우지 못함을 부끄럽게 여겨 사체산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25. 밀우, 유유 고구려 동천왕 20년에 위나라가 침입해와 왕이 달아났다. 군사가 거의 다 분산되었으나 오직 밀우만이 왕의 곁에 남아 홀로 적군을 상대하고 왕을 도망가게 하였다. 왕이 흩어진 군사를 다시 모아 밀우를 구해오라 하여 유옥구가 구해왔다. 위나라의 추격이 계속되자 유유가 적군에게 거짓 항복하고 음식을 주어 그것을 먹을 동안 위나라 장수를 찔러 죽이고 자신도 죽었다. 이에 위나라 군대가 동요할 때 습격하여 승리하였다. 26. 박인범, 원걸, 거인, 김운경, 김수훈 박인범․원걸․거인․김운경․김수훈 등은 글이 전하는 것이 있으나 역사에서 행적을 잃었으므로 전을 세우지 못한다. 27. 박제상 혁거세의 후예로 벼슬길에 나가 삽량주 간이 되었다. 이보다 앞서 실성왕 원년 임인에 왜국과 강화하였는데 왜왕이 내물왕의 아들 미사흔을 볼모로 삼기를 청하였다. 왕은 일찍이 내물왕이 자신을 고구려에 볼모로 보냈던 것을 한하여 거절하지 많고 볼모로 보내고 11년 임자에는 고구려가 미사흔의 형 복호를 볼모로 삼고자 하여 그를 보냈다. 눌지왕이 즉위하자 변사를 구해서 두 아우를 데리고 오려하였다. 이에 제상에게 遠行을 청하니 제상이 빙례로써 고구려에 들어가 복호를 데리고 왔다. 왕은 왜국에 볼모로 간 동생도 되찾아 오고자 하였다. 제상은 이에 죽음을 맹세하고 처자도 보지 않고 왜로 행하였다. 제상은 꾀를 써서 미사흔을 돌려보내고 자신은 목도에 유배되었다가 그 곳에서 살해당하였다. 대왕이 이 소식을 듣고 애통해 하며 대아찬을 추증하고 그 가족에게 후하게 물품을 내리었다. 그리고 미사흔은 제상의 둘째 딸을 취해 아내를 삼아 은혜에 보답하였다. 28. 백결선생 신라의 낭산 아래 살았는데 집이 몹시 가난하여 옷을 백번이나 기어입어 너덜너덜하자 사람들이 백결선생이라 불렀다. 백결선생은 거문고를 매우 잘 탔는데 하루는 아내가 이웃에서 방아 찧는 소리를 듣고 가난함을 한탄하자 백결선생이 거문고로 방아 찧는 소리를 내어 위로하였다. 후에 이 소리를 방아타령이라 하였다. 29. 비령자 유신이 백제와 싸울 때에 고전하고 군인의 사기가 떨어져 비령자에게 적진 깊이 들어가길 청하였다. 이에 아들 거진과 함께 적진에 나아가며 종 합절에게 부인을 부탁하였다. 비령자가 전사하자 거진이 도망치려 할 때 합절이 이를 막으며 비령자의 말을 다시 한 번 되새겨 주었다. 거진이 이 말을 듣고 다시 적진으로 들어가 전사하였다. 30. 사다함 사다함은 고귀한 가문 출신에 뜻과 기개가 곧아 사람들이 화랑이 되길 청하매 화랑이 되었다. 약15세 때, 이사부가 가라국을 칠적에 왕에게 간청하여 전쟁에 참가했다. 승리하여 돌아오자 왕이 가라국 사람을 주었으나 모두 풀어주고 전지를 하사하였으나 알천의 쓸모없는 땅만을 받았다. 전에 무관랑과 사우(死友)가 되기로 약조하였는데 무관랑이 병으로 죽자 사다함도 7일만에 죽었다. 31. 석우로 나해 이사금의 아들로 조분왕 2년 대장군이 되었고 4년에 왜를 물리쳤으며 15년엔 서불한이 되었다. 침해왕이 재위 하였을 때 사량벌국이 문득 백제로 돌아가자 석우로가 이를 멸하였다. 왜의 사신이 왔을 때 석우로가 희롱으로 왜의 왕과 왕비를 욕보이니 이에 왜가 쳐들어왔다. 석우로는 자신이 자초한 일이니 자신이 책임을 지겠다 하여 왜군에게 전의 일은 단지 희롱이었을 뿐이라 말했으나 석우로를 불태워 죽였다. 미추왕 때에 왜의 대신이 문안하였는데 석우로의 아내가 사신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취한 틈을 타 불태워 죽였다. 32. 설계두 설계두는 신라의 귀족이었으나 골품제로 높은 관직에 나아가지 못하자 당으로 가 뜻을 펼치기로 하였다. 당이 고구려와 전쟁할 적에 설계두가 용감히 싸우다 죽어 왕이 물으니 신라인이라 하였다. 외국인의 몸으로 용맹히 싸우다 전하함을 높이 사 대장군의 관직을 주었다. 33. 설씨녀 설씨녀는 가난하지만 용모가 단정한 여자였다. 진평왕때 아버지가 늙은 나이에 군대를 가야하자 근심이 많았다. 이에 설씨녀를 흠모하는 가실이 설씨녀의 아버지를 대신하여 군대에 가기로 하였다. 설씨녀의 아버지가 둘의 혼인을 청하였으나 설씨녀가 가실이 돌아온 후 날을 잡자 하였다. 가실을 말과 거울을 한 쪽식 쪼개어 나누어 가지고는 떠났으나 6년이 지나도 소식이 없자 아버지는 다른 이에게 시집을 가라 하였으나 설씨녀는 가실을 저버릴 수 없어 가실이 주고 간 말을 보며 탄식했다. 마침 가실이 돌아왔으나 너무 야위어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자 깨진 거울을 보여주었다. 설씨녀와 가실은 결혼을 하고 해로하였다. 34. 설총 할아버지는 나마 담날이며 아버지는 원효이다. 하루는 신문대왕이 설총에게 이야기를 청하자 화왕계 이야기를 전하였다. 왕이 교훈을 얻어 그것을 기록하도록 하고 높은 벼슬을 주었다. 35. 성각 성각은 명예와 벼슬을 좋아하지 않아 집에서 어머니를 봉양하였는데 어머니가 늙고 병들자 다리 살을 떼어 먹이고 불공을 드려 천도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왕이 조 300섬을 주었다.
36. 소나 소나의 아버지 심나는 매우 용맹한 장군으로 ‘신라의 나는 장수’라 불렸다. 소나는 아버지를 닮아 용맹하였다. 아달성에서 북방을 견제하다 전사하자 아내가 통곡하였다. 대왕이 그 소식을 듣고 잡찬을 추증하였다. 37. 솔거 솔거는 신라사람으로 그림을 매우 잘 그려 새들도 착각할 정도였다. 후에 단청이 낡아 다른 이가 보수하자 다시는 새들이 찾아오지 않았다. 38. 실해 진제가 실혜를 시기하여 왕께 아첨하여 실혜를 좌천시켰다. 이에 실혜는 곧은 자가 배척당하는 것은 늘 있는 일이라 말하며 변명하지 않고 떠났다. 39. 연개소문 아버지가 동부대인 대대로로 죽으니 연개소문이 계승함이 마땅하나 사람들이 그의 성격을 문제 삼았으나 연개소문이 간절히 청하여 승낙하였다. 그러나 매우 흉악하여 그를 죽이기로 모의하였으나 연개소문이 이를 알고 그들과 왕을 죽여 장을 왕으로 세우고 스스로 막리지가 되었다. 당 태종이 신라와 고구려에게 백제의 공격을 멈추라 명했으나 연개소문은 이를 듣지 않았다. 태종이 다시 타일렀으나 역시 듣지 않자 굴에 가두고 정벌하였다. 소문은 건봉 원년에 죽었다. 40. 열기 고구려를 토벌할 적에 당나라 군대의 요청으로 김유신이 식량을 전하려 하였으나 추위로 사람과 말이 얼어 죽었다. 열기가 유신에게 청하여 당에게 소식을 전하고 돌아오니 유신이 급찬의 관등을 주고 왕께 다시 사찬의 지위를 내릴 것을 청하였다. 후에 유신의 아들 삼광에게 청하여 삼년산군 태수가 되었다. 41. 온달 고구려 평강왕때 사람으로 사람들이 ‘바보온달’이라 불렀다. 평강왕의 딸이 어려서 울기를 잘하여 온달에게 시집을 보내겠다고 하였는데 공주가 16세 되던 해 온달에게 시집가기를 청하였다. 공주는 금팔찌를 팔아 살림을 장만하고 야윈 말을 사 살찌웠다. 사냥 대회에서 온달의 실력이 출중하고, 온달이 전쟁에서 매우 용맹스러우니 왕이 정식으로 온달을 맞이하였다. 후에 신라를 침략하였으나 전사하여 장사를 치르려 할 때 관이 움직이지 않았다. 공주가 와서 위로하고 장사를 치렀다. 42. 요극일 요극일의 글씨는 힘이 있고 구양의 솔경법을 터득했다. 김생에는 미치지 못했으나 매우 뛰어난 솜씨였다. 43. 을지문덕 수나라가 고구려를 침략하자 을지문덕이 허실을 보기 위해 거짓으로 항복하였다. 수가 을지문덕을 돌아가게 하고 후회하여 다시 불렀으나 을지문덕은 압록강을 건너 자신을 추격하는 수나라를 피로하게 하기 위하여 일부러 패하였다. 문덕이 수나라에게 군사를 데려가면 직접 찾아가겠다는 거짓 항복을 하고 이를 믿고 돌아가던 수나라 군대를 살수에서 크게 승리하였다 44. 을파소 왕의 외척 좌가려 등이 외척으로 권세를 휘둘러 나라를 어지럽히니 왕이 어질고 착한 사람을 천거하라 하였다. 이에 안류가 을파소를 천거하여 국상이 되었다. 을파소가 어질어 나라와 백성이 편안하니 왕이 안류가 을파소를 천거한 공이 크다 여겨 안류를 대사자로 임명하였다. 45. 이사부 이사부는 가야국을 취하고 우산국을 병합하려 할 때에 나무사자를 만들어 거짓으로 항복하지 않으면 맹수를 풀어놓겠다고 하여 승리하였다. 백제와 고구려서 서로 전쟁으로 피로한 틈을 타 공격하여 승리하였다. 46. 장보고, 정년 장보고와 정년은 어릴 적 친구로 서로 무예가 뛰어났다. 장보고는 당나라에서 무령군 소장을 지내고 귀국하여 청해에 진영을 설치할 것을 왕께 청하였다. 후에 해상에서 우리나라 사람을 파는 이가 없었다. 한편 년은 굶주림에 떨다 장보고에게 찾아갔다. 마침 왕이 시해되어 나라가 어지럽자 장보고가 정년에게 함께 할 것을 청하였다. 후에 왕이 장보고를 재상으로 삼고 정년에게 청해진을 맡기었다. 47. 죽죽 죽죽이 대야성 도독 김품석의 밑에서 보좌역을 할 때에 백제 윤충이 침략하였다. 서천이 윤충에게 휴전을 제의하고 백제가 이를 승낙하여 품석이 성을 내려가려하자 죽죽이 이를 말렸다. 그러나 말을 듣지 않고 군사를 먼저 보내자 백제가 신하를 모두 죽였다. 이 말을 들은 품석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죽죽은 자신의 이름처럼 굽히지 않고 싸우다 죽었다. 48. 창조리 창조리는 고구려 사람으로 모용외가 자주 침범하자 왕께 고노자를 천거하여 왕이 고노자를 신성 태수로 삼자 다시는 쳐들어오지 않았다. 왕이 궁궐을 신축하느라 백성의 고통이 늘자 창조리가 왕께 충고를 하였으나 왕이 반성하지 않았다. 이에 왕을 폐위하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음을 알고 자결하였다. 49. 최승우 당나라에 유학하여 급제하였으며 그가 지은 사륙문이란 책이 있는데 스스로 서문을 지어 호본집이라 하였다. 후에 견훤을 위해 격문을 지어 태조에게 보냈다. 50. 최언위 18세에 당나라에서 유학하다 42세에 귀국하여 한림원 태학사 평장사를 지냈으며 죽은 후에는 문영이란 시호를 내렸다. 51. 최치원 치원이 12세 때 당에 유학하여 종사관 서기로 지내다 28세에 귀국하여 여러 지방의 태수로 지내다가 사신으로 다시 당에 갔다. 치원은 나라가 혼란하고 걸핏하면 죄를 뒤집어쓰는 등 때를 만나지 못한 것을 한탄하여 다시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조용히 살다 늙어 죽었다. 52. 취도 취도에게는 부과라는 형과 핍실이라는 동생이 둘 있었다. 취도의 이름은 도옥이었는데 나라를 위해 승의를 벗고 군인이 되어 이름을 취도라 고쳤다. 그리곤 전쟁에 나가 전사하였다. 후에 동생 핍실도 전쟁에 나아가 전사하자 왕이 이 삼형제에게 사찬의 관등을 주었다. 53. 필부 당나라 군대와 함께 백제를 멸하자 고구려가 칠중성을 포위하였다. 이에 필부가 대항하자 고구려가 철수하고자 하였다. 이때 비삽이 적군과 내통하여 군대가 위태로우니 지금이 기회라 하였다. 이 말에 고구려가 다시 공격하자 필부가 비삽을 죽이고 혼신을 다해 싸우다 죽었다. 54. 해론 그의 아버지 찬덕이 백제와 싸우다 분통하여 느티나무에 부딪혀 죽었다. 후에 해론이 다시 백제와 싸울 때,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에 싸우다 죽었다. 이에 왕이 슬퍼하며 장가를 지어 조문했다. 55. 향덕 흉년에 백성이 굶주리고 전염병이 돌자 향덕은 자신의 넓적다리살을 아버지에게 주고 어머니의 종기를 입으로 빨아 치료하였다. 이에 왕은 향덕에게 조 300섬 등을 내리고 비석을 세우게 하니 사람들은 그 곳을 효가리라 부른다. 56. 헌성 활쏘기 대회에서 헌성이 무후에게 중국인이 뽑히지 않아 염려하자 무후가 그 뜻을 받아들였다. 내준신이 헌성에게 반역을 도모한다는 누명을 씌워 죽였다. 후에 무후가 그 억울함을 알고 다시 장사를 치러주었다. 57. 효녀지은 홀로 어머니를 모시던 지은은 남의 집 종일을 하여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이를 안 어머니가 통곡하자 이 소리를 들은 효종랑이 이를 도와 곡식을 주고 양인으로 만들어 주었다. 이 소식을 들은 대왕이 곡식과 집을 주었다. 이에 효종이 그에게 헌강왕의 딸을 아내로 주었다. 58. 흑치상지 나당연합군에 반격하여 싸우다가 당나라에 들어가 공을 세웠으나 주흥의 모함에 억울하게 옥사하였다. |
이 글에 대한 참고사항
1. 이 글에 대한 관련 사료는 이 사이트 검색창에서 자유롭게 검색가능합니다.(관련 검색어로 검색하세요)
<http://historia.tistory.com 역사전문블로그 히스토리아>
'퀴즈풀이 > 역사 사료와 데이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슬람의 예배문 (0) | 2007.03.11 |
---|---|
김종직(金宗直)과 조의제문(弔義帝文) 사료 (1) | 2007.03.10 |
온달 장군전 (2) | 2007.03.09 |
고려사절요의 태조 왕건 평가 (1) | 2007.03.08 |
고려사절요를 올리는 전 (2) | 2007.03.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