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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풀이/역사 사료와 데이터

광개토태왕릉 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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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시 고구려의 유물들을 보고 있노라면 강인한 기상이 보이는군요.....수천년이 흐른 지금에도

  • 이훈 2009.12.14 19:09

    ■ 고려 인종때 김 부식이 지은 삼국사기(三國史記)는 우리나라 고대(古代) 역사서 중에서 최고의 정사(正史) 이기는 하나,다수 문제가 있는 역사책 입니다. <삼국사기>에는 한반도에서는 절대로 일어날수 없는 기록들이 많습니다. 바로 삼국의 천재지변(天災地變)에 관한 기록 입니다. 그래서 지진(地震)과 메뚜기(蝗),그리고 이해할수 없는 기록들을 찾아서 여기에 올립니다.

    ▣ 첫째,고구려에서 일어난 메뚜기(蝗)에 관한 기록 입니다.
    ㅇ태조왕 3년(56년)---8월,남쪽지방에 메뚜기떼가 나타나 곡식을 해쳤다(蝗害穀).
    ㅇ태조왕 10년(63년)---8월,남쪽 지방에 날아 다니는 메뚜기떼가 나타나 곡식을 해쳤다.
    ㅇ고국양왕 5년(388년)--- 8월,메뚜기떼가 나타났다.
    ㅇ광개토왕 15년(407년)---7월,메뚜기떼가 생기고 가뭄이 들었다.
    ㅇ문자명왕 11년(502년)---8월,메뚜기떼가 나타났다.
    ㅇ안원왕 6년(537년)---8월,메뚜기떼가 나타났다.
    ㅇ평원왕 13년(572년)---8월,궁실을 중수하는 도중에 메뚜기떼가 생기고 날씨가 가물어 공사를 중단 하였다.

    ▣ 둘째,다음은 지진에 관한 기록 입니다.
    ㅇ대무신왕 2년(19년)---정월,서울에 지진이 있었다.
    ㅇ태조왕 66년(119년)---2월,지진이 있었다.
    ㅇ태조왕 72년(125년)---11월,서울에 지진이 있었다.
    ㅇ태조왕 90년(143년)---9월,환도에 지진이 있었다.
    ㅇ차대왕 (???)---------11월,우뢰와 지진이 있었다.
    ㅇ중천왕 7년(255년)---7월,지진이 있었다.
    ㅇ중천왕 15년(263년)---11월,우레와 지진이 있었다.
    ㅇ서천왕 2년(272년)---12월,지진이 있었다.
    ㅇ서천왕 19년(289년)---9월,지진이 있었다.
    ㅇ봉상왕 원년(292년)---9월,지진이 있었다.
    ㅇ봉상왕 8년(300년)---12월,우레와 지진이 있었다.
    ㅇ고국양왕 2년(385년)---12월,지진이 있었다.
    ㅇ문자명왕 2년(493년)---10월,지진이 있었다.
    ㅇ안원왕 5년(536년)---10월,지진이 있었다.

    ■ 다음은 백제에 관한 메뚜기떼의 피해와 지진에 관한 기록 입니다.
    ㅇ초고왕 43년(209년)---가을,메뚜기떼가 생겼다.
    ㅇ초고왕 46년(212년)---8월,남쪽 지역에 메뚜기떼가 나타나 곡식을 해쳤다.
    ㅇ비유왕 28년(455년)---8월,메뚜기떼가 발생해 곡식에 해를 입혀 흉년이 들었다.
    ㅇ무령왕 21년(522년)---8월,메뚜기떼가 곡식을 해치자 백성들이 굶주려 신라로 도망간 자들이 9백여호 였다.

    ㅇ온조왕 31년(기원전 12년)---5월과 6월,지진이 났다.
    ㅇ온조왕 45년(26년)---지진이 발생해 백성들의 가옥이 기울거나 쓰러졌다.
    ㅇ다루왕 10년(38년)---11월,지진이 났는데 우뢰와 같은 소리가 났다.
    ㅇ기루왕 13년(150년)---6월,지진이 나서 땅이 갈라지고 주민들의 가옥이 무너져 사망자가 많았다.
    ㅇ기루왕 35년(172년)---3월과 10월,지진이 났다.
    ㅇ초고왕 34년(200년)---7월,지진이 났다.
    ㅇ근초고왕 27년(372년)---7월,지진이 났다.
    ㅇ비유왕 3년(430년)---11월,지진이 발생하고 큰 바람이 불어 기와가 날았다.
    ㅇ무령왕 22년(523년)---10월,지진이 났다.
    ㅇ무왕 17년(617년)---11월,서울에 지진이 났다.
    ㅇ무왕 38년(638년)---3월,다시 지진이 났다.

    ★위에 열거한 기록들은 삼국사기의 내용을 조사해 대표적인 것만 뽑아서 올린 겁니다.
    뭐,한반도에서도 간혹 가다가 지진이 나긴 납니다만,가옥이 기울고 쓰러질 정도는 아니며,심지어는 땅은 더욱더 갈라지지 않습니다. 지진이라해봐야 벽에 금이 가는것 정도죠. 저 위의 기록들은 한반도에서는 도저히 일어날수 없는 현상 입니다. 특히,무리지어 다니는 메뚜기는 한반도에서는 절대 발생할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한반도는 건조한 기후가 아니라,온대성 기후 이니까요.
    한반도에도 메뚜기가 있습니다. 저는 어렸을적에 시골에가서 메뚜기들을 잡아다가 그것들을 후라이펜에 기름을 뿌리고 구워먹은적이 있습니다. 그런데,중국의 무리지어 다니는 메뚜기들은 작은 메뚜기들이 아니라,슈퍼 파워급의 메뚜기들 입니다. 이것들이 몰려오면 그 지역은 완전히 초토화가 되고 맙니다. 하늘을 보면 저 멀리서 뭔가 새카맣게 몰려 오는데 그것들이 무리지어 날아다니는 메뚜기떼 들이죠. 이런 메뚜기들은 중국과 남미(南美)의 페루에서 자주 발생한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의 역사는 정말 고대사부터 완전히 뜯어 고쳐야 합니다.
    또한,김 부식은 삼국사기에 도저히 이해할수 없는 기록을 올렸습니다.
    [동성왕 10년(489년),위(魏-北魏)나라가 우리를 침공 했으나 우리 군사가 그들을 물리쳤다.]
    중국의 지도를 보면,그 당시의 북위는 탁발 규(도무제 道武帝)가 중원으로 진출해 세운 왕조 입니다.
    만약에,북위가 한반도의 백제를 공격 하려면,바다를 건너서 공격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북위가 바다를 건너와 침공했다는 사실은 없습니다. 또한,북위는 유목민 이었기 때문에 수군(水軍)과는 거리가 먼 민족 입니다. 위의 기록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또,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이 기원전 6년(온조왕 즉위 13년)에 신하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북쪽에는 말갈이 있다...]
    백제가 한반도에 있었다면 북쪽에 낙랑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말갈족은 고구려의 북쪽에 위치했던 유목민들 입니다.
    이 말갈족이 온조왕 이후에도 끊임없이 백제를 공격했다라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기록돼 있습니다.
    이러한 메뚜기와 지진으로 인한 피해는 고구려,백제 그리고 신라도 마찬가지 입니다.

    ★김 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했을(1135년) 당시에는 우리나라 고대사에 관한 책들이 상당히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학자들이 말하더군요.
    요즘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선덕여왕>의 <미실>에 관한 이야기가 있는데 <미실>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에는 없고,<화랑세기>라는 책에 자세히 언급돼 있습니다. 미실 정도의 권력을 가진 여인 이라면 당연히 정사(正史)인 삼국사기에 기록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유학(遺學)의 영향을 많이받은 김 부식은 여자가 왕을 마음대로 폐하고 정사(政事)에 관여 했다라고 해서 미실에 관한 기록들을 정사에서 제외시킵니다.
    역사를 기록 하는데 있어서,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공평하게 기록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점으로 볼때,저는 중국인들이 상당히 부럽습니다.
    그리고 삼국사기를 보면,어느 어느 나라와 조공했다...라는 기록이 무수하게 나옵니다. 물론,조공이 무조건 나쁘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곧,다른 나라와의 외교관계이며 우리한테 이익이 될 수 있는 것이니까요. 그런데,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이 조공 이란것이 하국(下國)이 상국(上國)에 머리를 숙이는 것입니다.
    백제의 경우는,북위와 10년간에 걸쳐 전쟁을 치뤘습니다. 그런데,북위에 조공했다느니....완전히 사대주의자들 이더군요.
    아무리 유학을 배웠다는 지식인들 이라해도 그들은 자존심도 없단 말입니까?
    만약,삼국사기를 유학자들이 아닌,다른 사람들이 기록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 우리가 몰랐던 엄청난 사실들이 실렸을 겁니다.

    ★그리고 김 부식은 삼국사기 맨 앞에 알수없는 지명(地名)을 열거해 놓으니 그 숫자가 300 가지나 되었습니다.
    자기가 역사를 편찬하다보니,그 지명을 도저히 알 수가 없어서 따로 지명들을 기록해 놓은거죠. 그런데,그것을 어떤 학자가 수년간에 걸쳐 연구했더니,김 부식이 알 수 없다던 그 지명들이 한반도에는 소수이고,대부분이 중국대륙의 옛 지명 이었답니다.

    만약에,고구려나 백제,그리고 신라 어느 한 나라가 대륙에 있었다는 것이 증명만 된다면,삼국대륙설은 설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기정사실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삼국의 뒤를 이은 고려도 대륙에 있었다는 것이 증명이 되는 것이죠.
    사가(史家)들이 알아서 하겠죠?

    또한,고려사 지리지(高麗史 地里志)권(券) 10 에는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생각컨대,우리 해동은 삼면이 바다에 가리워지고 한 구석이 육지에 연접하여 폭원(幅員-땅이나 지역의 넓이)의 넓이가 만리(萬里)나 된다....]
    [서북(西北)은 당(唐) 이래의 압록강을 한계로 삼고,동북은 선춘령(先春嶺)으로 경계를 삼으니 대저,서북의 경계는 고구려에 미치지 못했으나 동북(東北)은 이에서 지났다]
    즉,고려 땅의 넓이가 만리(萬里-약 4,000Km)나 된다는 기록 입니다.

    ▣ http://kr.blog.yahoo.com/kjchuel/folder/20.html
    (이곳으로 들어 오시면,고려사는 물론,중국의 역사 책 등..환단고기, 태백일사 등 모든것을 보실수가 있습니다)

    ★또,당나라는 제나라(齊,765~819)를 세운 이 정기(李 正己)의 손자인 이 사도(李 師道-몇년전 사극 해신 海神 에서도 나왔었음)를 토벌하기 위해 당나라의 헌종(憲宗)은 양주절도사 조 공(楊州節度使 趙 恭)을 보내어 신라군을 징발 하였다(삼국사기 憲德王 11년-819년 7월)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이 기록을 두고 가만히 생각해보니,당나라의 양주절도사 조 공이 바다를 건너 신라까지 가서 군사 3만명을 징발 했을까 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바다를 건너는 것이 마치 제 집 안방 드나들듯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이닙니다. 또,당나라와 신라로 왔다갔다하는 시간도 만만치가 않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바다를 건너서>라는 기록이 없다는 겁니다. 그리고,신라군 3만명을 징발했다면 군사들을 실어나르는 배들도 그 숫자가 엄청났을 겁니다. 식량,군수품 뭐,이런것들까지 실어 나르려면....즉,결론을 말하자면 신라는 한반도는 물론,대륙에도 존재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당나라 군사들은 다 어디로 갔단 말입니까? 그 당시 (당나라 헌종시대)의 당나라는 전력을 기울여 당나라에 커다란 위협이 되는 이 정기, 이 납, 이 사고, 이 사도의 제나라를 공격해 멸하려던 때였습니다. 다른 곳(서역지방 등..)에 대군을 파견할만한 그런일이 별로 없었습니다. 정말로 이상하죠?

    ★한국의 재야 사학자들은 삼국을 비롯한 고려가 대륙에 존재했다는 三國,高麗 대륙존재설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주장이 틀렸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느 정도의 근거가 있으니까 그들도 이러한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삼국,고려 대륙존재설의 밑바탕이 되는 기록이 중국의 정사(正史)인 25사(25史)에 고스란히 나와 있습니다. 예를 들어 고구려가 중국을 공격했을때 상곡, 어양, 서안평, 태원등의 지명이 나옵니다. 이런것들은 옛날에도 그렇지만 지금도 한반도에는 없는 지명 입니다. 태원(太原)은 지금의 산서성에 있는 아주 유명한 도시 입니다. 그런데 고구려가 이곳을 점령헸다는 겁니다. 만약,고구려가 요하(遼河)동쪽에 있었다고 칩시다. 지도만 보아도 엄청난 거리 입니다.
    우리 한국의 역사는 우리 조상들이 처음부터 만주 남부와 한반도내에서 역사를 시작했다고 가르칩니다. 그런데,저는 이것을 믿지 않습니다. 우리의 조상들이 역사를 시작한 곳은 저 광활한 대륙에서 시작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런데,중국의 세력에 밀려 좁디좁은 한반도로 들어온 거라고 생각 합니다. 생각을 해봅시다. 고대인(古代人)들이 한반도가 어디에 붙어 있었는지 알았겠습니까? 그 당시에 인공위성이 있었던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그 당시의 사람들은 강 서쪽을 너희들의 땅,그 동쪽을 우리들 땅,이렇게 국경을 정했습니다. 요즘처럼 인공위성을 이용해 사진을 찍고 선을 그어 국경선을 정한것이 아니었던 거죠.
    삼국,고려 대륙존재설을 부정하고 싶어도 그 원인이 우리나라 역사책이 아닌,다른 나라의 역사책(중국 25 正史)에 있었다는것이 문제가 되는 겁니다. 중국인들은 절대로 자기들에게 불리한 역사는 기록하지 않거나 축소해 버립니다. 그런데도 중국대륙의 옛 지명들이 우리나라의 역사와 연결이 돼 있으니 당연히 삼국,고려의 대륙존재설이 재기되는 겁니다. 끝.

  • 이훈 2009.12.17 13:08

    ●한국(韓國)의 역사를 읽다보면 웬지 모를 갑갑하고 답답한 시대가 있습니다. 특히,조선시대(그렇다고 매우 부정적인 것은 아님)의 역사중에서 선조(宣祖)와 인조(仁祖)시대의 역사를 보면 부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선조시대에 동서분당(東西分黨)이 되었고 300년간에 이르는 당쟁이 시작됐으며 이러한 권력다툼으로 인해 이 이 선생이 주장한 10만 양병설은 그저 설로만 그치고 맙니다. 또한,국가존망의 중차대한 위기를 놓고 서로 옥신각신 염병(욕을 해서 미안합니다)들을 떨다가 당파의 이익에 따라 국론(國論--서인 세력인 황 윤길은 전쟁이 날것이라 했고,동인 세력인 김 성일은 전쟁이 나지 않을 것이라고 함)이 둘로 갈라지고 말죠. 이렇게 해서 7년간에 걸친 임진왜란이 일어났죠. 임진왜란 기간동안 멍청이 선조는 무장들의 세력이 커질것을 우려했고 그 중에서 전공(戰功)이 가장 많은 이 순신 장군을 의심하였고,결국에는 왕의 명령을 받들지 않는다는 이유를 내세워 그를 서울로 압송해 모진 고문을 가합니다. 누구는 목숨걸고 전장에서 피튀기며 싸우는데,누구는 그런 사람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이려 든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성질나죠. 그렇지만 우리의 이 순신 장군께서는 뼈가 부러지고 살이 타는 고문을 견뎌내셨고,백의종군해 단 13척의 전함으로 300척이 넘는 쪽바리들의 선단을 울돌목으로 유인,공격해 승리 합니다(명량해전).

    ●이 순신 장군이 충성심이 넘쳐나서(?) 그렇지,다른 사람 같았으면 아마 군사를 일으켜 조선왕조 이씨들을 뒤집어 엎었을 겁니다. 어떤 사람이 그런말을 하더군요. 조선왕조는 임진왜란 중이거나,끝나고 바로 망했어야 한다고요(2백년 해 먹었으면 많이 해 먹었죠 뭐...). 전주이씨(全州李氏)들이 이 글을 보면 성질낼 일이지만 저도 그 의견에 공감하는 바입니다. 당쟁은 물론,모든 부패를 일소하고 새로운 왕조가 수립되었다면 한국의 역사는 어찌 되었을까요?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光海君)은 중립정책을 취해 그 당시 일취월장해진 후금(後金)의 침공을 피하기 위해 강 홍립에게 군사를 이끌고 출병하되,사정이 여의치 않으면 후금에 투항하게 합니다. 이것이 빌미가돼 광해군은 친명사대주의자(親明事大主義者)들의 반정(反正-쿠데타)으로 왕위에서 쫓겨 납니다(그외 인목대비 仁穆大妃의 폐모 廢母도 있었지만).

    ●친명사대주의자들은 따지고 보면 광해군 보다 더 어리석고 우둔한 인조(仁祖-사실,어질 인仁이 어울리지 않는 사람 입니다)를 세웠습니다. 인조는 자신의 며느리와 딸을 죽였으며,중국 청(淸)나라에서 선진문물을 접한 소현세자(昭顯世子)를 두고 오랑캐와 어울리는 족속이라고 했으며 사가(史家)들로부터 아들인 소현제자를 독살했다는 혐의를 받습니다. 만약,소현세자가 봉림대군(17대 효종 孝宗) 대신,왕위에 올랐다면 조선왕조의 역사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여하튼간에 인조는 왕위에 오르자 친명배금(親明排金)정책으로 후금을 천대시 합니다. 이에,열 받은 홍타시는 명나라를 치는데 배후의 위협이 될 법한 조선을 정벌하기 위해 정묘호란(丁卯胡亂-1627)과 병자호란(丙子胡亂)을 일으켰으며 조선군은 남한산성에서 후금군에게 포위되고 맙니다. 후금의 태종 홍타시는 삼전도에서 인조로부터 삼배구고두지예(三拜九叩頭之禮--한번 절 할때마다 세번 머리를 조아리는 항복의식)를 받았으며 조선은 그들이 천대시하고 멸시했던 오랑캐 후금의 속국으로 전락하고 맙니다(조선시대 사람들은 여진족을 개,돼지로까지 취급했었다). 울화통이 터지려고하네......

    ●삼전도의 치욕은 1910년 8월의 한일합방(韓日合邦)과 함께 한국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역사의 한 장면 입니다. 조선의 인조와 그 똘마니 사대주의자들은 당시 급변하는 동북아시아의 국제정세를 제대로 알지도 못했으며 오로지 자신들이 천대하고 멸시했던 오랑캐 후금 즉,청나라에게 씻을수 없는 치욕을 맛봅니다. 우리는 후금에 대해 항전을 주장한 김 상헌(金 尙憲)을 충절(忠節)의 상징으로 묘사하지만 따지고 보면 이놈이 나라를 망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기타 다른 요소도 있었지만...). 그들은 단지 명나라가 임진왜란때 조선을 도왔다는 이유로 명나라를 부모의 나라라고 여기며 명나라를 배신하는것은 부모를 배신하는 것과 같다고 여기던 자들 이었습니다(조선이 좋아서 도왔겠어? 순전히 쪽바리들이 만주로 진공 進攻 하는것을 막기 위해서 였지.....자국의 이익을 위해서...이러니 나라에 힘이 있어야 돼...) 사실, 그 당시의 명나라는 종이 호랑이에 불과 했습니다. 명나라가 멸망한 것은 의종 숭정제(毅宗 崇禎帝,1644年)이나, 그 이전인 신종 만력제(神宗 萬歷帝) 시대에 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나라였고,더군다나 조선출병으로 인해 그 국세가 완전히 바닥에 떨어진 나라였죠. 즉,조선정부는 국제정세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해 스스로 화를 불러들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집니다. 한반도 주위에는 중국,일본,그리고 미국,러시아가 자국의 이익을 위해 머리를 굴리고 있습니다. 뭐,옛날같이 나라를 빼앗기는 그런 사태는 일어나지 않겠지만 그래도 나라의 힘을 길러야 합니다. 이리되자면 하루빨리 평화적인 남북통일이 이루어져 부강한 나라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데,평화통일이 아닌,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난다면 한반도의 운명은 밝은 내일을 장담키 어려워 집니다. 그야말로 골치 아파지죠. 소중유검(笑中有劍--웃음속에 칼이 숨어있다)이란 말이 생각나는군요. 각국의 정상(頂相)들은 서로 웃고 있지만,속으로는 자국의 이익을 먼저 따지죠. 정말 무서운 세상 입니다.

    ●한국이 선조시대와 인조시대같이 되지 않으려면 안으로는 나라의 힘을 길러야 함은 물론,급변하는 국제정세에 지혜롭게 대처해야 합니다. 우리나라는 지정학적으로 남의 침략을 많이 받는 위치에 있습니다. 한국은 역사가 시작된 이후로,900여번이나 다른 나라의 침략을 받아 왔습니다. 이제는 선조와 인조 같은 어리석은 사람이 나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입니다. 한 나라의 국가 지도자가 생각 한번 잘못하면 그 나라는 절딴 나는 겁니다. 그래서 지도자란 자리가 결코 만만치가 않은 자리입니다. 김 영삼 전 대통령을 보십시오. 처음에는 나라를 잘 이끌다가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린 바람에 IMF라는 비극을 초래하지 않았습니까(처음 청와대에서 칼국수 먹을 때 조짐이 이상하더니만...이것은 농담 입니다). 글 올리다가 성질내 보기는 생전 처음이네.....
    더 성질 내다가 컴퓨터 때려 부술라....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