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말 민중봉기와 사회모순
(1) 서쪽 변방의 주.군에 큰 흉년이 들어 도적이 벌떼같이 일어나므로 군사를 내어 쳐서 평정시켰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l0 헌덕왕 7년 (2) 3월, 초적이 곳곳에서 일어나므로 여러 주군의 도독, 태수에게 명령하여 잡게 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l0 헌덕왕 ll년 (3) 8월, 흉년으로 굶주려 도적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10월, 왕은 사자를 보내 안무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10홍덕왕 7년 (4) 제61대 진성여왕이 임금이 된 지 몇 해 만에 유모 부호 부인과 그의 남편인 위흥 잡우 등 3~4명의 총신이 권세를 잡고 정치를 멋대로 하니 도적이 벌떼와 같이 일어났다. [삼국유사] 권2기이 진성여대왕 거타지 (5) 국내의 여러 주군이 공세(貢稅)를 바치지 않아 국고가 비고 나라의 살림살이가 어려워 왕이 사자를 보내어 독촉하자 이로 말미암아 도적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이때에 원종, 애노 등이 사벌주(경북 상주군)에 응거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왕이 내마(신라의 17관등 중 11번째 관직) 영기에게 명령하여 도적을 잡게 하였더니 영기가 도적들의 보루를 바라보고 겁이 나서 나가지 못하매 촌주 우련이 힘껏 싸우다가 여기서 죽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11 진성왕 3년 (6) 도적이 서남쪽에서 일어나 붉은 바지를 입고 특이하게 굴어 사람들이 붉은바지 도적이라 불렀다. 그들이 주현을 무찌르고 서울 서부 모량리까지 와서 민가를 약탈하여 갔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11진성왕 10년 (7) 6월, 왕은 좌우를 돌아보며 '근년 이래로 백성이 곤궁하고 도적은 봉기하니 이는 다 나의 부덕한 소치로다. 어진 이에게 왕위를 물려 주기로 내 뜻을 결정 하였다' 하고 왕위를 태자 요에게 물려 주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11 진성왕 1l년 (8) 진성왕 6년, 궁예가 북원(강원도)의 도적 양길에게 의탁하니 양길은 기뻐하 며 궁예를 잘 대우하여 일을 맡겼다. 마침내 군사를 나누어 주며 동으로 보내 땅을 뻣앗게 하였다. 궁예는 양길에게서 나와 치악산 석남사에 주둔하면서 주천, 내성(강원도 영월), 울오, 어진 등의 여러 현을 두루 공격하여 모두 항복을 받았 다. [삼국사기] 열전 제10 궁예 (9) 진성왕 9년에 평양성주 장군 검용이 궁예에게 항복하였다. 증성의 적의적, 황의적, 명귀 등이 항복하였다. [삼국사기] 열전 제l0 궁예 (10) 전국 각처에 초적이 일어나지 않은 곳이 없었다. 흥녕사 증효대사 탑비 (11) 농민들의 봉기가 일어나지 않는 곳이 없었다. 해인사 묘길상 탑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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