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중앙 제도 2 - 중앙정치가 발전하다.
1. 신라 초기의 중앙 제도 변화 신라 초기의 관제의 특징은 어떤 뚜렷한 기준에 의해 관제가 정비된 것이 아니라 씨족적 유습들이 그대로 남아서 중앙 관제로 정착되었다는 점입니다. 즉, 초기에는 대보가 있어서 씨족장 출신인 이벌찬, 아찬 등이 정치와 군사를 담당하는 정도의 초보적 기구가 있습니다. 하지만 법흥왕 기에는 상대등과 병부가 설치됩니다. 상대등의 설치는 국왕권이 강화되면서 그동안 공동으로 정치를 주도하던 귀족들을 왕권과 분리시키려는 시도였고, 병부의 설치는 국가 병권을 국왕이 장악하려는 시도였습니다. 이후, 진흥왕대에 품주를 설치하면서 조세를 국가가 관장하였고, 관리의 규칠을 맡은 사정부가 만들어졌습니다. 진평왕 때는 위화부, 조부, 예부, 선부 등을 설치하여 인사권, 외교권, 문무의례를 국왕이 장악하게 됩니다. 이로서 10여개의 관부가 새로 설치되면서 각 관청간의 역할분담이 확실하게 되었고, 소속부에 따른 일의 전문화, 효율화가 이루어 집니다. 즉, 관부가 늘면서 중앙제도의 질적 성장도 이루어지게 된 것이지요. 이 법흥-진흥-진평왕기가 바로 국왕권이 강화되면서 <귀족합의에 의한 공동하교>가 <국왕 독자적인 단독하교>로 바뀌는 시기입니다. 이후 진덕여왕기에는 진흥왕기의 품주가 집사부와 창부로 분화되어 <중시>가 등장하고, 형법을 관장하는 이방부가 등장하게 되면서 왕권이 귀족대표인 상대등을 누를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습니다. 이 진덕여왕기 행정제도 개편에는 김춘추가 적극 참여함으로서 이후 무열왕(김춘추)이후 전제왕권이 확립될 계기가 마련되었던 것이죠. 김춘추는 이러한 개혁을 당나라의 제도를 모방하여 시작하였으며, 이 시도는 삼국통일의 기반이 되었으면서, 통일 후 정치개혁의 기반이 됩니다. 특히 이방부의 등장은 귀족의 자의적인 법률행위를 왕권에 의해 규제한다는 측면이 있었고, 중시(시중)의 등장은 상대등 세력을 왕권이 누른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와 같은 개혁 작업은 김춘추가 왕위에 즉위한 뒤에도 계속 추진되어 삼국통일 직후인 668년(신문왕6)에에 토목을 담당하는 예작부를 설치를 끝으로 일단 완성되었습니다. 이러한 중앙정치제도는 신라가 멸망할 때 까지 기본 체제로서 작용하게 됩니다. 2. 신라 초기 제도는 국가 체계상 너무 허술하였다. 신라 초기의 중앙 제도는 너무나 허술합니다. 신라 초기 시대 자체가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니라 사로 6촌을 중심으로 부족장들이 <부체제>를 이룬 것이기 때문에 그 때 그 때 상황에 따라 필요한 기구들을 설치하는 수준이었습니다. 중앙집권화 되는 법흥왕기~무열왕기 전후를 보면 병부, 예부, 창부 등을 차례로 신설하여 그 때 그 때 필용한 업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임의적으로 만든 것이 눈에 보입니다. 또, 병부 - 조부 - 위화부 등의 순서로 창설된 것을 보면 정복사업을 위한 군사, 조세 부분이 먼저 정비되고 이후 상황에 맞게 중국식 6전체제를 도입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국왕 역시 법흥왕기를 중심으로 강력해지고 있다는 것도 유의할 점입니다. 특히, 법흥왕 대 상대등의 설치는 국왕이 <6부>체제와는 질적으로 다른 <독립적 세력>임을 과시할 정도로 왕권이 강대해졌음을 보여줍니다. 상대등을 설치함으로서 국왕은 귀족계급의 <부체제>와는 다른 <독자성>을 보이게 되며, 귀족권은 상대등을 중심으로 왕권과는 다른 세력으로 규정되어집니다. 이 <상대등>의 설치로 왕권이 격상되면서 이후 진흥왕기에는 국왕권이 독자적으로 명령을 내리는 <단독하교>가 보이게 됩니다. 3. 통일 후 중앙 체제의 완성 통일 후 신라의 체제는 당나라의 6부(이부,호부,예부,병부,형부,공부) 체제를 모방하여 신라 6전체제를 완성하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신라에는 때에 따라 만든 14부가 존속하였기 때문에 당나라에 6전체제와는 정확히 맞지는 않습니다. 신라는 신문왕 때 예작부(당의 공부)가 완성되면서 14부가 완성되었지만, 기존 신라의 <부체제적 성격>이 계속 유지되면서 개편된 제도이기 때문에 골품 귀족들이 행정체계 속에서 일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제도였습니다. 실제 신라 사회의 관직, 관등제도 자체가 골품제라는 신분제의 운영 속에서 이루어졌으니까요.
신라는 당의 6전체제를 모방했지만, 그 운영방식에서는 당나라와는 사뭇 달랐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한국사특강>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 내용을 살펴볼까요? 1. 당의 6전체제를 모방하였지만, 집사부의 단일성 체계였습니다. 실제 14부는 국왕과 직첩되는 관직이었고, 시중은 14부의 최고 장관 성격이었지만, 국사를 통괄하는 기능이 약했습니다. 2. 부조직은 전통적인 <부체제>가 행정적 <부>보다 우위에 있었습니다. 3. 위화부는 골품제의 영향으로 인사권을 독점하지 못하고, 순수한 행정기능만 담당하였습니다. 4. 중국식 6부제도를 수용했지만, 6부의 서열이 다르고, 6부가 다양하게 분화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중앙 제도를 운영함에 있어 신라는 독특한 특성을 많이 보여줍니다. 상대등이라는 부족적 전통을 가진 직위가 있었으면서도, 후에는 시중이 창설되어 상대등, 시중이라는 2개의 권력 세력이 공존하였고, 또 병부가 창설된 이후 병부 역시 권력세력으로 등장함니다. 이러한 독특한 제도는 신라가 <부체제>에서 출발한 연합국가라는 이론에 부합합니다. 사로 6부 등 다양한 세력이 장기간 공존하면서 초기 왕권이 미약하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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