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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풀이/히스토리아 역사 스토리

(근현대사 11장) 동학농민운동 1부. 동학의 배경과 초기의 종교운동

동학농민운동 1 - 동학의 배경과 초기의 종교운동

동학농민운동은 너무나 다양한 의견들과 이견이 많고, 사람들간에 관심이 많은 부분들이라 딱 한마디로 정의해서 글을 쓰기가 어렵네요. 3편으로 이야기를 나누어 적으면서 각 편마다 약간의 다른 관점들을 제시해서 글을 적어보려고 합니다. 1편은 동학의 초기 활동, 2편은 1894년 동학농민운동, 3편은 3.1운동기까의 동학활동과 동학운동을 보는 다양한 관점들 이라는 주제로 한번 정리해 볼까 합니다. 제 글재주로 어디까지 명료하게 적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다수설과 정설에 의거해서 되도록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하면서 적어볼께요.

1. 동학이 밝음을 주장한 것은 어두운 현실 때문이었다.

동학이라는 종교가 등장한 것은 1859년경입니다. 동학의 교조(교조 : 종교창시자)는 수운 최제우 선생입니다. 최제우는 백성들이 세도 정치에 힘들어하는 것을 보고, 민중을 구원할 방법을 찾던 중 어느 선인을 만나 깨달음을 얻고 새로운 종교를 창시했다고 합니다. 그럼 동학이 창시된 배경을 하나 하나 볼까요?

동학이 창시될 무렵의 1850년대의 상황은 말 그대로 백성들에게는 희망이 없는 세상이었습니다. 안동 김씨 가문의 세도 정치는 극에 달하여 백성들의 삶은 너무나 황폐해져 있었습니다. 특히 백성들은 잘못된 정치로 인하여 가혹한 세금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흔히 이것을 <삼정의 문란>이라고 합니다.

삼정이란 백성들에게 걷었던 조선 후기 세금의 통칭으로 토지에서 걷는 전세, 군포를 내는 군정, 곡식종자를 빌리고 이자를 내는 환곡 등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세금제도는 일정한 기준이 없이 백성들을 괴롭히기만 하였습니다. 전세는 일정한 기준없이 많은 세금을 걷는 남수가 일반적이었습니다.

군정은 원래 군대를 가야할 사람이 군포 1필을 내면 일정기간 동안 군을 면제해주고, 대신 납부(대납)한 군포로 직업군인을 모집하는 모병제가 조선 후기에 일반적이었습니다. 이 법을 확립한 것이 영조 때의 균역법이었죠. 따라서 원칙상으로는 군포는 1필만 내면 되었습니다. 하지만, 세도 정치기 문란한 사회에서의 탐관오리들은 특이한 방법으로 군포를 더 많이 걷어갑니다. 죽은 사람을 죽지 않았다고 하여 군포를 걷기(백골징포), 16세도 되지 않은 미성년자에게 군포걷기(황구첨정), 이웃에게 대신 군포를 받기(인징), 친척이 대신 내기(족징), 여자아이를 남자아이라 호적을 속여 군포를 걷기 등등 이였죠.

환곡은 더욱 심하였습니다. 원래 환곡은 춘궁기 때 쌀이나 곡식 종자를 빌려주고, 수확기 때 돌려받는 제도로서 조선 초기에는 이자를 받지 않은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운반중 손실분이나, 곡식 종자보관의 어려움 때문에 국가의 손실비용만을 이자로 받는 <일분모회>이라는 제도가 도입되어 백성들의 삶을 해치지 않는 조건에서 일부 이자를 받았죠. 하지만 조선말기 사회가 어려워지고, 국가와 지방의 재정이 고갈되어 가자 지방 관리들은 이 환곡을 고리대처럼 이용하여 아자놀이를 시작합니다. 요즘 사채 광고의 이자 66%는 이 때로 보면 애교일 정도입니다. 고려 시대 이래 <이자가 원금을 넘어서면 더 이상은 받지 말라>는 원칙은 온데 간데 없었습니다. 관리들은 원금보다 비싼 이자를 받았고, 빌리지 않겠다는 사람을 협박하여 거액의 이자로 대출을 해주기도 합니다. 거짓 장부를 만들어 빌리지도 않은 돈을 빌렸다고 하고, 대출금의 담보를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크게 잡아 백성들의 재산을 강탈하기도 합니다.

군전(군역세)은 아무 때나 마구 부과하고 환곡은 원본을 회수하고도 이자를 독촉하며, 세미는 명목도 없이 징수하고 있습니다. 민가에 부과하는 각종 잡역은 나날이 늘어가고, 인척에게 재물을 빼앗는 것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전영관(세금담당관리)은 실제보다 더 거두어 들이면서도 독촉이 심하고, 균전관(균전사 : 토지세 관리자)은 토지 면적을 속여서 세금을 징수합니다. 더구나 각 관청의 구실아치(보조 사무관)들은 백성들로부터 강제로 빼앗고 가혹하게 굴어 참고 견디어낼 수가 없습니다.

- 오하기문 -

이러한 세도정치의 상황에서 백성들은 유량을 하거나, 화전민이 되거나, 간도 쪽으로 도망가기도 합니다. 일부는 관리들의 부정부패에 저항하여 의적단을 만들거나 도적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동학>이란 종교는 이러한 사회 분위기에서 탄생할 수밖에 없는 종교였습니다.

2. 동학이 받아들인 사상들

1860년대 조선의 상황은 탈선 직전의 사춘기 학생과 같았습니다. 서양의 열강들은 이양산을 보내 조선과 통상을 하자고 성화였고, 세상의 중심인줄 알았던 청이 서양열강에 의해 베이징이 점령당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일본의 개화 사상가들은 메이지 유신 이후 조선을 <같이 하기엔 너무 멀리간 나쁜 친구>라는 표현으로 멀리하였는데, 이 때 조선은 스스로 어떤 성장의 길을 가야 할지를 선택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하필 이 중요한 시기에 세도정치라는 극단적인 망국 정치가 계속되고 있었으니까요.

동학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 것을 찾고, 외세를 배척하고자 일어났습니다. 최제우는 동학의 근간을 <유교에서의 경천사상>에서 찾았습니다. 유교의 경천사상이란, 성리학이나 고증학 같은 신유교가 아니라 중국 고대 한나라의 훈고학이나, 더 멀리 중국 주나라 때의 이상사상을 바탕으로 한 원시유교 사상의 핵심을 말합니다. 즉, 중국 고대 사상 중 천자가 하늘과 감응한다는 동중서의 <천인상응론>과 같은 <하늘, 사랑, 애민> 등의 이론을 그 사상의 근간으로 한 것이죠.

그리고, 우리 전통 사상의 핵심인 유교, 불교, 민간신앙에서 그러한 <하늘, 사랑>의 이념을 도입합니다. <부처>가 주장한 인간 평등사상, 민간에서 말하는 <샤머니즘적인 주술을 통한 하늘과의 만남> 등이 모두 동학사상에 내포되어 있습니다. 즉, 종래의 모든 전통사상들을 체계적으로 종합하여 경전으로 작성하고, 가장 현실적으로 개편한 사상이 곧 동학인 것이지요. 동학은 외세를 배척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였기에, 천주교 사상이 많이 들어가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천주교 역시 인간평등과 사랑이라는 기본정신을 담고 있기에 최제우 역시 이 부분만큼은 수용하였다고 보는 편이 타당할 것입니다.

동학에 들어가 있는 사상은 놀랍도록 방대하고 체계적이라고 합니다. 일단, 조선 후기 집권층의 사상인 주기철학에서의 개방성도 수용합니다. <이가 불변한다는> 주리론보다는 <기가 가변적이라는>주기철학이 보다개방적이죠.

주역에서의 시세와 오행에 따른 변화도 받아들입니다. 이것은 이미 중국 고대 동중서가 추연의 음양오행설을 정리하고 한대 유학을 정리하면서 완성하였던 개념입니다. 천자와 하늘이 감응하고, 우주는 음양의 조화에 의해 움직이며, 오행은 순행한다는 중국 전통 사상 중의 하나이죠. 동학에서는 이중 우리 현실에 적합한 사상인 <시류에 따른 오행의 순행 변화>를 받아들입니다. 세상이 변한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그 변화는 순리에 적합해야 한다는 것이 동학의 입장이었죠.

동학에서는 종래 샤먼적인 귀신신앙과 예언을 중심으로 한 도참사상도 받아들입니다. 세상이 어려울 때에는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는 사상을 통해 백성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으니까요. 이 예언적인 도참사상은 불교의 미륵신앙과, 샤머니즘적인 무당신앙, 귀신신앙은 불교의 업설과 연결되어 동학의 사상을 현실개혁적이고, 사회개혁적인 사상으로 이끌어 갑니다.

특히, 예언사상은 조선의 운명은 종말을 고하였다는 운수사상과 연결되는데, 이 운수사상은 오행의 순환에 의해 화-목-수-금-토의 순환논리 상 새로운 시대가 열려야 한다는 오행순환설과 연결됩니다. 모든 전통신앙을 체계적이고 논리적으로 연결시킨 것이지요.

그러나, 동학에서 말하는 새로운 세상은 중국에서 말하는 단순한 왕조의 교체는 아니였습니다. 최제우가 꿈꾼 새로운 세상이란 백성들이 중심이 되어 이끌어가는 세상이었죠. 이것은 개혁을 넘어서 혁명을 꿈꾸는 사상이었습니다. 동학의 새로운 세상은 백성이 곧 하늘이고(인내천), 모두가 평등하며(만민평등), 침략적인 외세를 몰아내고 국가를 보호하며(보국안민), 새로운 국가가 백성을 감싸안는(제폭구민) 새로운 세상입니다.

즉, 지금의 세상은 완전히 사라지고(후천개벽), 백성들에게 희망의 불씨를 알리는(광제창생)의 세상이었던 것이지요.

따라서 동학에서는 새로운 세상을 위해 현세의 문제점을 비판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동학이 초기부터 종교운동을 넘어 사회운동적 성격을 띈 것은 교리 자체부터가 새로움에 대한 기대로 시작하였기 때문이죠. 동학은 세도정치의 문제점을 근본적으로 비판하고(반봉건적 운동), 우리의 자주적 개혁을 방해하는 침략적인 외세를 규탄하는(반외세적 운동) 운동이었습니다.

정부는 이러한 동학의 교리를 처음부터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동학이 창시된 것이 1857-59년 사이이고, 교조인 최제우가 <백성을 혼란에 빠뜨려 세상을 어지럽히려 한다(혹세무민)>의 명목으로 죽은 것이 1864년이므로, 동학이 등장에 정부에 얼마나 민감한 반응을 보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아래의 글은 최시형이 동학운동을 마치고 눈을 감을 무렵의 유언과 같은 말입니다. 이 말 한마디에서 동학의 사회운동적 성격이 극명히 드러납니다.

누가 해월(2대 교주 최시형)에게 물었다. "개벽이 언제 이루어지리이까?"

해월은 말했다. "산이 검어지고 길에 비단이 깔리고 만국의 병마가 이 땅에 왔다가 물러갈 때니라."

아래의 글은 1863년 동학교조 수운 최제우가 2대 교주를 최시형으로 임명하면서 지은 시입니다. 최제우는 최시형을 교주로 임명하고, 1년 뒤 정부에 의해 처형을 당합니다. 아마 이 때 이미 최제우는 자신의 미래를 예감하고 최시형에게 뒷일을 부탁한 것은 아닐까요?

燈明水上無嫌隙

柱似枯形力有餘

吾順受天命

汝高飛遠走

등불이 물위에 틈없이 밝았다.

기둥은 죽어 말랐으나 오히려 힘이 있나니

나는 하늘님의 부르심을 받겠노라.  

너는 높이 나르고 멀리 뛰어라!

3. 동학의 체계를 확고히 한 최시형

최제우가 동학을 창시하고, 미처 기틀도 잡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면, 2대 교주 최시형은 30년 이상 동학을 이끌면서 동학의 기반을 탄탄하게 잡은 인물입니다.

최시형은 최제우가 펴낸 동학의 경전인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정리하였습니다. 그런데 경전이 2권인 것은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처럼 시대가 달라서가 아니였습니다. 이것은 교리를 2원화하여 동학의지지기반을 넓히려는 의도였습니다.

즉, 동경대전은 성리학을 공부한 어느 정도 지식있는 이들이 읽을 수 있도록 한자와 일화를 수록하여 작성하였죠. 그러나, 용담유사는 글을 모르는 백성이라도 쉽게 따라 말할 수 있는 시조, 창가조의 형식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쉬운 말로 이야기책과 대중가요식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거죠.

그리고, 동학의 조직도 2원화하여 체계적인 틀을 잡습니다. 흔히 말하는 포접제(抱接制)가 그것이죠. 동학에서는 촌락마다 포라는 조직을 통하여 향촌사회의 일을 처리하였습니다. 일단 동학의 최고 수장은 교주인데, 그 교주 아래에 향촌마다 포가 있어 그 포의 소교주를 대접주라고 합니다. 또 대접주 아래 향촌 말단 사회인 <면, 리>에는 접주가 있었습니다. 서양으로 따지면 교황 - 교구(대사제) - 사제로 이어지는 교구제와 비슷하네요. 교구제와 포접제의 공통점은 종교적 위계단위가 국가행정구역의 단위를 따라 이루어졌기 때문에 별도의 행정단위를 만들 필요가 없었다는 점입니다.

즉, 동학교단은 국가 행정망을 이용할 수 있었고, 농민들이 마을 단위로 봉기할 때에는 동학의 지휘를 받을 수 있는 체계가 마련된 것이지요. 또 대규모의 봉기가 있을 경우에는 포접제를 통하여 농민군이 동원될 수 있었기 때문에 동학농민봉기는 전국적인 규모로 일어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훗날 동학농민군이 전라도를 점령하였을 대 이 포접제를 이용하여 스스로 자치를 하는 <집강소>를 운영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포접제를 통해서입니다. 실제 동학농민군이 1894년 전주를 점령하였을 때 포접제를 통하여 전라도에 53개의 민정 집강소를 설치하였고, 이 집강소가 지방 행정과 치안의 기능을 동시에 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입니다.

4. 동학운동이 점차 정치운동화 되어가다.

최제우가 백성들을 현혹한다고 하여 처형된 후, 1860년대의 동학운동은 교조신원운동 차원의 종교운동이었습니다. 동학이 현실개혁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지만, 60년대 종교운동적인 특징을 보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로는 최제우가 죽은 이후 교단의 체계를 확실히 잡아야 할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둘째는 1862년 대규모 농민반란인 임술농민봉기 이후 전국적인 농민운동을 지휘할 지도자의 역할이 필요하였고, 최제우의 명예를 회복해 달라는 교조신원운동은 그것에 적합하였습니다. 세 번째는 1863년부터 10년간 세도정치를 몰아내고 개혁정치를 실시한 흥선대원군의 집권기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농민들을 괴롭힌 원흉인 세도가문을 몰아낸 새로운 정권에게 동학이 굳이 적대감을 가질 필요가 없었고, 흥선대원군은 동학농민들의 1순위 요구인 환곡의 폐단 등 삼정의 문란을 효과적으로 해결해주었기 때문입니다.

1870년대가 되어 흥선대원군이 물러나고, 민씨정권에 의한 개화정책이 시작되자 동학교단에서는 정치운동을 본격화하기 시작합니다. 정치운동적 성격을 확연히 보여준 것은 흥선대원군기 이필제의 난 부터입니다.

이필제는 몰락한 양반출신으로서 자신과 같은 몰락양반들과 함께 군현단위로 농민들을 모아 반란을 일으켰는데, 그 성격이 다른 민란과는 완전 달랐습니다. 그동안의 민란이 각 고을의 부정부패를 고발하고, 교조신원운동을 확산시키는 운동이었다면, 이필제의 난은 지방관아를 점령하고 서울진공작전을 벌이려는 반국가적 반란이었습니다. 이필제는 자신이 백성을 구원하여 세상을 이롭게 한다는 논리를 펴며 자신이 <정감록> 등에 나오는 세상을 구원할 인물이라 주장하였습니다.

이필제의 난은 이필제 외에 곳곳에서 동지들이 같이 난을 일으키기로 되어 있었지만, 대부분 사전 밀고로 실패하고 난을 일으킨 것은 경상도 경주 지방의 이필제 뿐이었습니다. 당시 최시형은 종교 재건작업이 한창인 때에 정치적 변란에 참여하지 않으려고 하였으나, 이필제의 주장에 설득되어 난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난을 성공하여 경상도 일부를 점령하고 관청을 접수하였습니다. 그러나, 정치적인 변란에 의아해하는 농민들은 이 난에 호응하지 않았고 결국 이 난은 실패하고 맙니다. 이필제는 죽었고, 최시형은 이렇게 지식인 중심, 몰락양반중심의 정치 운동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이후 동학의 정치 운동은 철저히 농민중심으로 전개됩니다. 1880년대 최시형은 개화정책이 진행되던 시기에도 묵묵히 교리와 조직을 정비하는데 힘써갔으며, 포접제, 용담유사의 간행 등으로 농민속으로 들어가는 운동을 계속 진행합니다.

1890년대에는 본격적인 동학교도들의 정치 운동이 시작되었는데, 이 때에서 교주 최시형은 정치적 변란 보다는 조직의 강건함을 바탕으로 정부에 맞서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독자적인 세력이었던 전봉준 집단 등 지역 농민 집단은 이미 반정부적인 활동을 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다음 장에서는 실제 1894년의 동학농민운동의 과정을 적어보려고 합니다. 아주 긴 포스트가 될 것 같네요. 실제 동학농민운동은 수십개의 다양한 사료를 정리해서 사료 위주의 포스트를 구성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