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운동 2 - 1894년의 동학농민운동의 전개
1. 동학농민운동의 전개 오늘 적을 내용은 동학에 대한 2번째 이야기로 1894년, 동학농민운동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1894년 어떤 일이 있었는지 그럼 한번 출발해 볼까요?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듯이 동학은 1850년대 후반부터 그 세력을 키워왔습니다. 최제우가 혹세무민이라는 성리학적 명분에 의해 죽고난 이후 교조신원운동을 전개하면서 동학은 그 힘을 키워가고 있었습니다. 이필제의 난 등을 겪으면서 동학은 점차 사회, 정치 운동까지 가담하게 되었습니다. 1870년대의 동학은 흥선대원군 대신 친일적인 성향의 민씨 정권이 들어서면서 반봉건 운동을 일으킬 명분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동학은 1862년 임술농민봉기 등 정부에 의해 크게 진압당해본 경험을 알고 있었습니다. 차분히 교세를 확장하고, 때를 알고 기다릴 줄 아는 이가 2대 교주 최시형이었습니다. 최시형은 이필제의 난이 실패한 이후 동학의 구조를 양반중심에서 농민중심으로 개편하고, 농민 스스로를 개혁의 주체로 만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임오군란이 외세의 압력으로 실패하고, 갑신정변이 농민층을 배제하면서 실패하는 것을 보면서도 동학은 더 이상의 정치적 논리에 쉽게 휩쓸려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1894년은 뭔가 한번쯤 사건이 터질 만한 국내외적 분위기였습니다. 1862년 임술민란이 일어난지 30년이 지나면서 농민층의 불만이 쌓일만큼 쌓인대다가 청과 일본의 경제적 침투로 인하여 농민들의 생활은 더욱 궁핍해졌습니다. 농민들은 이미 부패한 나라를 씻어낸다는 반봉건의 이념에, 농촌 경제를 파탄시키는 청과 일본 등 외세에 대한 불만까지도 가득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최시형은 참고 또 참고 있었습니다. 동학농민운동은 종교운동을 표방하는 교주 최시형과는 다르게 독자적인 성향으로 활동하는 세력에 의해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녹두장군 전봉준의 사상은 최시형의 온건노선과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동학에서 당시 큰 세력은 전봉준, 황하일 등의 남접과 보은 집회를 연 최시형, 손병희 등을 북접이었습니다. 2. 점차 정치적인 성격의 집회로 발전해가다. 동학농민운동은 1892년까지만 해도 비교적 종교적인 성격을 가진 집회가 열리곤 했습니다. 예로 1892년 전라북도 삼례집회에서의 요구사항도 <최제우의 억울한 누명을 풀어달라는 교조신원운동>이 주된 내용이었습니다. 1893년 서울 집회에서도 최시형 등 동학대표 40여명이 광화문 앞에서 <농민들은 동학이 결코 국가에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하는 운동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운동은 종교운동적 차원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1893년 3월 보은에 모인 동학교도들의 요구는 달라졌습니다. 농민들이 많이 모이면서 요구사항도 <농민들을 괴롭히는 일본의 축출과 탐관오리들의 숙청>으로 바뀐 것이지요. 물론 교조신원운동도 하였구요. 농민들의 요구는 이제 <척양척왜 : 서양도, 일본도 적이다>라는 것으로 바뀌게 됩니다. 정부는 1893년의 집회가 보은, 금구 등에서 계속되자 긴장하기 시작합니다. 단순한 종교운동이라면 달랠 수 있겠지만, 이제 주체세력이 현실적인 피해를 입고 있는 농민층으로 바뀌고 있었기 때문이죠. 동학의 운동은 점차 운동을 넘어 <개혁>, 개혁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혁명>에 이를 수 있는 위험한 것이 되었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특히 전봉준 등의 남접 우두머리들은 최시형, 손병희 등의 북접의 우두머리들이 연 보은 집회와는 별도로 금구집회를 열어 집회 후 1만명의 농민군과 함께 서울진공작전을 벌이려고도 하였습니다. 고부 군수 조병갑의 횡포가 아니였어도 동학농민운동은 언젠가는 일어날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이미 1880년대 이후 개화정책이 추진되면서 농민봉기는 점점 늘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3. 고부에서 농민봉기가 시작되다. 동학농민운동이 처음 시작된 것은 전라도 고부 지역이었습니다. 전라도 고부에는 만석보라는 저수지가 있었습니다. 당시 고부 군수였던 조병갑은 이미 저수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농민들을 동원하여 강 하류에 새로운 저수지를 만들고 가혹한 세금을 걷었습니다. 전봉준 등 고부 군민들은 2차례나 고부관아에 세금을 감면해달라고 요청하였으나 강제로 쫒겨나기도 하였습니다. 농민들은 참을 수 없어 고부 군수인 조병갑을 죽이고 봉기를 시작한 것입니다. 사실 조병갑이 농민들에게 일으킨 횡포가 전에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탐관오리의 횡포가 만연한 시기였죠. 문제는 그 횡포를 바라보는 농민들의 눈이 달라져 있었다는 점입니다. 1893년의 집회를 여러차례 경험하고, 서로 의견을 나눌 시간이 많았던 농민들인 더 이상 참으려 하지 않았다는 것이죠. 하지만, 이 때 농민들의 봉기는 아직 준비가 덜 된 상태에서 우발적으로 일어난 것이었고, 새로 부임한 군수 박원명이 농민들을 달래면서 하나의 헤프닝으로 끝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부에서 농민들을 달래기 위해 파견한 안핵사 이용태가 민란을 엄하게 다스리려고 하면서 문제가 다시 커졌습니다. 이용태는 민란의 주동자인 전봉준 등에게 역적죄를 적용하려고 하였습니다. 결국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등 농민 대표들은 백산에서 격문을 발표하고 1차 동학농민전쟁을 시작합니다.전봉준이 농민들을 모으기 위해서 만든 아이디어는 사발통문이었습니다. 사발통문이란, 사발을 엎어놓은 듯한 원으로 이름을 적어 누가 지도자이고 주동자인지를 모르게 하는 방법입니다. 그림을 보면 이름이 원으로 둘러 적혀있어서 누가 주동자인지 모르겠죠?
이제 농민들을 모아 전쟁을 시작합니다. 그럼 백산의 격문과 농민들의 행동 강령을 한 번 볼까요?
백산격문을 보면 전봉준 등이 봉기한 이유가 단지 고부라는 한 마을의 사태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동학농민의 1차 봉기는 탐관오리를 축출하고, 나라를 제 자리에 되돌리겠다는 의지가 보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것이 하나의 지역문제였다면 전국에서 농민들이 모두 모이는 대규모 전쟁까지 발전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농민들은 사회의 모순이 무엇인지를 알았습니다. 동학농민의 1차 봉기는 고을 단위의 봉기가 아니라 각 지역의 농민들이 힘을 합쳐서 중앙정부에 항거하는 형태로 발전하게 됩니다. 농민군은 민란을 일으킨 후 당황하는 정부에 여러 가지를 요구하였습니다. 물론 핵심적인 내용은 <탐관오리의 처벌, 세금의 공정한 부과와 잡다한 세금 혁파>가 요구사항이었습니다. 또 균전사의 수탈을 시정하라는 것도 요구사항의 내용이었습니다. 균전사는 1890년대부터 정부에서 지금의 전라북도 서부(군산, 익산, 고창, 정읍을 잇는 황해 루트)의 11개 고을의 개간사업을 위해서 파견한 관리를 말합니다. 균전이란 말 그대로 토지를 균등히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 균전사들은 왕실의 힘을 등에 업고 농민들을 괴롭혔습니다. 특히 개간 사업에 필요한 돈을 빌려준다는 명목으로 백성들의 토지를 함부로 관리하고, 지대를 걷어가기도 하였습니다. 동학농민운동의 원인 중 가장 큰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이런 나쁜 탐관오리들이 잡다한 세금을 핑계로 백성들을 괴롭히는 것 때문이었죠. 농민들은 장성전투, 황토현 전투에서 싸울 의욕이 없는 정부군을 격파하고 전라도의 중심지 전주까지 입성하게 됩니다. 실제 전라도 지방의 정부군은 농민군과 적극적으로 싸우지 못하였습니다. 지방군 자체가 농민들 중에서 착출된 이들이 많았기 때문이었죠. 4. 농민들이 전라도를 스스로 다스리다. 농민들이 전주를 점령하자 정부는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국가의 군대가 농민군에게 연전연패했다는 것에 충격을 받은 것이지요. 정부는 바로 청에게 연락을 하여 원병을 요청합니다. 1894년 5월 청나라군이 조선에 입성하였습니다. 문제는 청과 일본이 갑신정변에 맺은 톈진 조약에 의해 청나라 군대가 조선에 출병하자 일본군도 같이 충병하였다는 것입니다. 갑신정변 때 길게 서술한 톈진조약 기억하나요? 청과 일본은 조선에 출병과 철수를 상의하여 같이 처리한다는 조약이었죠. 우리나라 정부는 일본군이 조선에 오자 또 다시 당황합니다. 청을 통해 농민군을 진압하려다 일본이라는 여우새끼를 불러들이게 된 것이지요. 정부는 청과 일본에게 군사를 돌려 돌아갈 것을 요구하였고, 농민군과는 타협으로 일을 마무리하려고 하였습니다. 농민과 타협하기 위해 고종이 농민들에게 했던 따끔한(?) 한마디를 살펴볼까요?
농민들 역시 청, 일본이 조선에 와서 설치는 것이 불안하였습니다. 농민군은 전쟁 50일만에 정부와 타협을 하였습니다. 타협의 조건은 정부는 농민들의 요구사항의 일부를 들어주고, 농민군의 신변을 보장한다는 내용입니다. 단, 농민들도 더 이상의 소란을 피우지 않겠다는 것도 추가되었죠. (전주화약) 이제 농민들은 자유를 얻었습니다. 프랑스 혁명처럼 모든 사회를 뒤집어 엎어 버린 혁명은 아니였지만, 스스로 싸워 자신들의 요구를 현실로 바꾼 것입니다. 농민들은 전라도 전주를 중심으로 전라도 53곳에 자치기구인 <집강소>를 설치합니다. 정부는 농민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교정청>을 설치하고 국가적인 개혁 사업에 들어가는데 이것이 1894년 같은 해의 갑오개혁으로 일부 계승됩니다.
농민들은 12개조의 폐정개혁안을 발표하고 전근대적인 <구제도의 모순>을 바꿔나갑니다. 12개조의 내용은 대부분 사회체제의 개혁과 일본의 침략에 대한 대응이라는 관점에서 기술되어 있습니다. 12개조의 내용도 한번 볼까요? (내용 분석은 동학농민운동 4부할 때 몰아서 하겠습니다.)
자 이제 1차 동학농민운동이 끝났습니다. 혁명까지는 가지 않았지만, 농민들은 원하는 것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 평화는 몇 달도 가지 못합니다. 일본 때문이었지요. 다음 장에서는 동학농민운동의 2차 봉기인 <일본군과의 전쟁>을 한번 다루어 보도록 하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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