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의 종교 이야기 <기독교 편>
4화. 로마의 크리스트교가 박해 속에서 살아남은 이유는?
1. 탄압 속에서 성장한 크리스트교 사도 바울이후, 극심한 탄압을 겪으면서 크리스트교는 교세를 확장해 나간다. 도대체 어떤 힘이 정치적 탄압에도 불구하고, 크리스트교를 발전시킨 것일까? 로마 황제들은 지속적으로 크리스트교를 탄압했다. 그 가장 큰 이유는 크리스트교의 일신 사상이 로마 황제 체제에 위협이 되기 때문이었다. 기본적으로 크리스찬들은 로마 황제가 아닌 하느님을 숭배한다. 황제가 탄압하면 숨어서 예배를 드리면 그만이다. 지하공동묘지(카타콤)에서 예배를 하는 크리스찬들은 지독하다는 소리까지 나온다. 기본적으로 만민에 대한 사랑과 평등을 강조하는 크리스찬은 정복 국가인 로마의 이상과도 맞지 않는다. 로마는 병영제도에 따라 시민권을 분배하고, 정복사업에 따라 경제체제를 확장시킨 말 그대로 <제국>이었다. <제국>에서 군대를 가지 않는 다는 것은 곧 국가체제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었다. 반면, 크리스트교의 만민애는 하층민뿐 아니라 지배층에도 매력적인 것이었다. 처음 로마의 지배층은, 예수의 부활과 구원에 대한 믿음을 <로마 신화> 정도의 이야기로 치부했었다. 그러나, 2-3세기가 지나면서 로마인들은 점차 이 매력적인 종교에 대해 적응해 나가기 시작한다. 3세기 이후, 점차 쇠약해져 가던 로마는 현실로부터 눈을 돌려 내세도 생각하게 되었다. 믿음이 곧 구원이라는 기독교 이념은 단순하면서도 매력적인 것이었다. 특히, 책으로 구성된 신약은 각 복음서별로 읽기가 간편했다. 유대교는 구전된 율법체계가 복잡했고, 로마 신화의 신들은 체계화되지 못하였다. 셩경은 인간의 창조부터, 악을 이겨내는 과정, 그리고 천국으로 가는 결말이 명확했다. 어렵고 방대한 내용의 구약을 예수의 가르침에 맞게 쉽게 정리한 <바울>과 후계자들의 노력은 로마인과 이교도를 크리스찬으로 끌어들이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더 중요한 점은 굳이 책으로 읽지 않아도 그 시작과 결말이 너무나 명확하기 때문에 구원에 대한 믿음을 단 몇마디로 설명하기 좋았다는 점이다. 종교의 핵심 교리를 쉽게 이해하고 빠져들면, 그 다음에 구체적인 내용들은 살을 붙여서 더 배우면 된다. 결정적으로, 로마인들이 크리스찬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지속적인 <순교자들> 때문이었다. 로마의 지배층은 기존 전통신을 부정하고 로마의 가치체계를 흔든다는 이유와 황제 숭배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크리스찬을 처형하였다. 그것도 잔인한 방법으로 처형하기 위해 광장에서 공개처형한다던가, 사지를 찢어죽인다던가 하는 방법을 쓰곤 하였다. 그러나 초기 순교자들은 죽음을 맞이하여 행복한 표정을 짓곤 하였다. 최대한 행복한 얼굴을 보여야 천국에서 문을 열어주는 이들이 자신을 기쁘게 받아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처참한 죽음에 기쁜 얼굴을 보이는 크리스찬을 보면서 로마인들은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2. 로마 행정구역과 일치하는 교구제도의 확립 3세기, 강대했던 로마제국은 팽창할 만큼 팽창해 버렸다. 더 이상 점령할 곳이 없어지자 로마는 전성기를 지나 몰락의 길로 접어든다. 점령할 곳이 없다는 것은 그 많은 군대를 유지할 이유가 없다는 뜻도 된다. 점령지의 땅을 군사시민에게 분배하여 세금을 받아온 로마로서는 체제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그러나 체제를 바꾸기엔 로마의 덩치는 너무나 커져 버렸다. 로마의 영토가 일정화 된 3세기 무렵,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노력으로 곳곳에 교회를 세운 크리스찬들은 교회의 조직을 로마 제국 전체의 영역에 맞추어 조직하였다. 국가 행정구역과 종교구역을 일치시킨 <교구>가 등장한 것이다. 일단, 하나의 도시와 그 도시를 둘러싼 농촌지역을 통합하여 하나의 큰 교회가 설립된다. 지역 교회를 다스리는 수장을 <주교>라고 한다. 쉬운 말로, 도시 내 교회의 수장을 말한다. 이런 작은 도시들이 모인 각각의 로마 속주에는 관할 도시의 교회를 총괄하는 수장으로 대주교가 있다. 예를 들어 과천, 안양, 수원에 각각 주교가 있다면, 그 지역을 총괄하는 서울에는 <대주교>가 있어서 각각 도시의 주교를 총괄하는 것이다. 이들은 책임지는 지역이 각각의 교구이다. 즉, 교구는 로마의 도시행정구역과 일치한다. 그보다 상위 개념으로 예수의 <사도>들이 교회를 세운 5교구가 있다. 5교구란, 로마제국의 핵심 지역으로서 수도 로마, 안티오크, 알렉산드리아, 콘스탄티노플, 예루살렘을 말한다. 이 5교구의 수장은 수좌대주교라 불리며 크리스트교 사회의 핵심 중책을 맡는다. 그런데, 이 5교구 중에서 예수의 제자 <베드로>과 관련된 로마의 교회는 점차 다른 지역의 교구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찾게 되었다. 특히 로마의 수도라는 점에서 다른 교회보다 우위에 있었고, 점차 로마 교회는 다른 모든 교회를 총괄하는 최고 교회가 되었다. 로마 시대 이후, 로마 교회의 수장은 <교황>으로 여겨지게 되었고, 서방 모든 교회를 총괄하게 된다. 반면, 로마 멸망 이후 동방 교회는 동로마의 중심지 <콘스탄티노플>에서 책임지게 된다. 동방 교회 역시 동로마제국의 행정구역 체계에 맞게 교회 조직이 이루어져 있었다. 이 교구제도는 로마가 크리스트교 국가로 변신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도시 교구의 주교는 주민들의 동의로 선출되면 죽을 때까지 그 자리를 유지하였다. 특히 크리스트교가 전체 로마 인구의 20%에 육박했던 3세기 말엔 그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중앙에서 로마 황제가 제국을 총괄한다면, 도시내에서는 주교의 영향력이 행정관리의 영향력과 맞먹는 정도였다. 더 중요한 점은 이러한 교구제도가 주민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이끌어 냈다는 점이다. 초기 교회는 순교자들의 순수한 열정이 남아있었다. 교회는 예수의 믿음에 따라 약자를 보호했으며, 제국의 횡포로부터 시민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였다. 제국은 시민과 이민족에 대한 차별이 남아있었고, 강자와 약자에 대한 대우가 달랐다. 그러나 종교는 어떤 이들이든 받아들였다. 로마 제국이 도시내에서 무리한 징병을 할 때 교회는 적당한 선에서 타협안을 제시하였으며, 무리한 세금 요청이 들어오면 <지식인>이자 <협상가>인 교회 지도층이 나서서 타협하였다. 즉, 초기 교회는 주민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자치 역량을 키웠던 것이다. 도시 안의 사람들이 이민족에 의해 잡혀갔을 때, 그들의 몸값을 지불하고 타협안을 제시하는 역할도 교회가 하였다. 기원후 4세기, 황제도 결코 교회를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 되었으며, 로마 황제가 제국의 체체를 그대로 둔 채 나라를 이끌어가려면 크리스찬의 교구제도를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마련된 것이다. 3. 로마가 전통적으로 믿었던 종교와 크리스트교 초기 로마는 다신교 사회였다. 로마 문화 자체가 그리스적인 요소를 많이 받아들었고, 그리스 문화는 이집트 문화의 요소를 받아들였다. 따라서, 로마의 신화를 보면 거의 그리스 신화와 체계가 비슷하다. 그리고, 이집트 오리시스 신화 등의 영향을 받은 신화 이야기도 많이 담겨 있다. 그리스와 로마신화는 제우스 신을 쥬피터라고 부르는 등 명칭과 풍습, 일부 줄거리 등이 바뀐 것을 제외하고는 신화내용도 유사하다. 이러한 다신교의 풍습이 로마 초기부터 그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으므로, 로마의 종교는 그리스 신화를 기반으로 황제 예배를 시도한다. 즉, 그리스 신화의 가장 상위신인 쥬피터(제우스)를 황제의 권위와 맞먹는 권위로 신격화한 상태에서 나머지 신들은 각각 로마의 지배층 사회에서 숭배하는 하위신으로 여긴 것이다. 초기 신앙을 황제예배 신앙과 결부하여 국가종교화 시킨 것이다. 이렇게 설정된 로마의 전통 종교는 로마 제정 초기 견고하였다. 그 고유신앙은 황제예배와 결부되어, 황제권 강화에 이용되었다. 그러나, 로마 후기 사회혼란으로 이러한 황제중심의 전통신앙이 흔들리게 된다. 특히, 제우스 위주의 신의 위계질서보다 그리스식 디오니소스 신앙이 대두되었다. 디오니소스 신앙은 이집트 오리시스 신화에서 영향을 받아 영생, 불멸, 구원, 재생 등을 강조하는 신앙이다. 또, 오리엔트의 밀의 종교도 도입되어 로마는 점점 다종교 사회가 되어갔다. 기원후 4세기, 로마 지배층은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아 강건함을 잃고 향략적인 생활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특히, 에피쿠로스 학파적인 쾌락주의가 만연하게 되었다. 본래 에피쿠로스의 이념은 경건한 생활 속에서 <정신적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였다. 그러나, 이들 로마의 지배층은 이 사상을 단순한 쾌락주의 이념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하였고, 기독교적 이념을 가진 로마인들은 에피쿠로스 학파는 악마의 학파다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로마의 지배층은 이 사태를 놓고 의견이 분분하였다. 제우스를 비롯하여 전통적 신을 무시하였기 때문에 로마가 망한다고 말한 사람도 있었고, 크리스트교라는 이단 때문에 로마가 흔들린다는 말을 한 사람도 있었다. 반대로, 크리스트교인들의 겸손하고, 청렴한 정신을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어찌되었던, 4세기의 로마는 더 이상 정복사업을 하지 못하면서, 대중들에게 어떻게 하면 잘 보일까 하는 쇼맨쉽을 자랑하는 사회가 되었다. 제정 초기부터 등장한 <빵과 서커스> 정책은 그것을 대변한다. 이 정책은 로마 시민들에게 먹을 것과 볼 거리를 계속 제공해서 국가에 대한 불만을 최소화하는 정책이었다. 검투사들은 피터지게 싸웠고, 시민들은 콜로세움에 먹거리를 들고가 잔뜩 취한채 고성을 질렀다. 이러한 제정 후기 로마 사회의 전반적 향략주의와 기강 문란은 민중들의 종교적인 경향을 기독교쪽으로 돌리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특히, 교양있는 로마의 철학자들과 지식인들은 이러한 문제의 해결점을 신플라톤 철학의 이상주의적 관점에서 해결하려고 했다. 신플라톤 철학은 지상 세계의 세속적, 향락적 생활보다, 더 높고 가치있는 이데아의 세계를 추구하여 로마인의 기강을 바로잡으려 한 사상이다. 이러한 이상주의적 사상은 크리스트교의 신비주의적 사상과 맞물려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게 된다. 실제 플라톤 사상은 그리스 종교와 연관된 고대 사상이지만, 크리스트교가 이 고대 철학들을 받아들이게 됨으로서 중세시대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크리스트 교리가 합치되는 스콜라 철학으로 발전하게 된다. 4. 교세가 커질수록 박해도 커지고... 크리스트교의 교세가 확장될수록 반대로 박해하는 사람들의 강도도 더해져갔다. 네로 황제는 로마의 대화재가 발생하자 그것을 모두 크리스트교 소행으로 몰아 수많은 예수인들을 죽였다. 5세기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아예 칙령을 발표하여 크리스트교인들이 종교적 활동을 하느라 국가 대업을 경시한다면서, 크리스트교인들이 교리를 내세워 국가 사업을 방해하는 것을 막아 버렸고, 반대하는 자들을 모두 죽여 버렸다. 그러나, 4세기 로마 사회는 몇몇 크리스찬을 죽인다고 사회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였다. 밀려오는 게르만 족들을 막을 수 있는 힘이 로마에게는 없었고, 정복 전쟁 중단으로 발생한 수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체제 전환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결국,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새로운 체제의 로마를 만들기 위해 결단을 내린다. 동쪽의 콘스탄티노플을 하나의 수도로 정하여 로마와 함께 2개의 수도 체제와 3명의 황제체제로 국가를 개편한다. 아울러, 크리스찬들의 교구제도를 인정하여 교회의 지역 지배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였다.(밀라노 칙령) 즉, 크리스트교가 각 교구내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것이다. 자, 지금까지 곁다리 짚듯이 내려온 크리스트교 성립의 역사는 이만큼에서 막을 내리도록 하자. 지겹고도 재미없는 이야기를 끝내고, 본격적으로 교회 이야기에 들어가도록 하겠다. 지금부터 이어질 내용들은 거시적 틀에서 이야기하는 크리스트교가 아니라 하나 하나 인물들을 통해서 교회의 역사를 살펴보려고 한다. |
- 참고할 만한 책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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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 영화와 방송, 인물, 정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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