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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풀이/히스토리아 역사 스토리

포스트 모던과 문화 코드 (3) - 역사학과 사회학이 싸우던 낡은 시대를 뛰어넘어...

포스트 모던과 문화 코드 (3)

역사학과 사회학이 싸우던 낡은 시대를 뛰어넘어...

1. 18c :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아마추어다.

익숙한 문화 코드로 이야기를 전개해야 하는데, 계속 이론 이야기만 해서 지루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문화 이야기는 이 편만 끝나면 시작될 것이니, 좀 참고 견뎌보자. 자, 오늘은 포스트모던 역사학이 과연 역사학에 가까운지, 사회학에 가까운지 간단히 짚어보자.

역사학과 사회학의 처절한 결투는 18세기 이래 계속되었다. 서양 연대기로 따지자면 프랑스 혁명 전후부터랄까?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시대는 수많은 학문이 분화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역사>와 <사회>라는 항목이었다.

혁명의 기록은 역사이나, 그 과정과 결과에 대한 통계는 <사회학>에 가까운 것이었다. 이후 등장한 철학자들은 모두 역사학자같은 사회학자들 이였으니....

사실 서유럽에서 프랑스 혁명 이전까지는 역사라는 독립된 학문이 존재한다는 것을 크게 인식하지 못한 듯 싶다. 고대라 불리던 사회에서는 과거와 관련된 모든 학문이 다 역사였고, 철학이었다. 중세에는 <신의 역사>가 곧 신학이으로서 역사와 동의어였다.

서구에서는 근대에 접어들면서 그나마 역사다운 역사물이 등장하였다. 그러나 그것도 서유럽의 <절대왕정>이 등장하면서 정치적인 사건들을 기록한 기록을 현재의 우리가 <역사>로 인식하는 것 뿐이다.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은 시민계급의 성장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말하고 있지만, 결국 국가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정치학, 사회학>을 논의할 뿐이었다. 루소의 사회계약론, 로크의 시민정부론도 <혁명>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결국은 올바른 <정치체제>가 무엇인가를 이야기할 뿐이었다. 밀러의 <신분론>은 사회계급현상을, 아담스미스의 <국부론>은 경제체제를 이야기하기 위해 역사를 인용할 뿐이었다.

아담스미스가 <중상주의 체제의 발전과정>을 이야기한다 해도, 그것은 중상주의보다 자율적 가격합의에 의한 시장경제질서가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한 것 뿐이다. 맬서스가 <인구론>에서 원시사회부터 상업사회까지의 발전과정을 이야기한 것은 결국 <인구 증가와 자원의 한계>를 증명하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이다.

이렇게 역사학과 사회학을 구분하지 못한 혁명기 철학자들은 역사는 당연히 <사회>를 연구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생각했다. 역사자체만을 공부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는 이런 말이 어울렸을 것이다.

왜 이래? 아마추어같이....

2. 19c : 랑케가 뜰 수밖에 없었던 이유...

이런 현실 속에서 <아마추어 같은 역사>를 독립적인 학문으로 끌어올린 사람은 랑케였다. 랑케는 1편에서 자세히 설명했으니, 그의 이론은 생략하고 이야기하자.

그럼 왜 뜬금없이 <역사 독립선언>이 등장하게 된 것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프랑스 혁명 이후 유럽의 각국이 새로운 철학을 지지하였기 때문이다. 프랑스 혁명기의 사회 철학은 <계몽 사상>이었다. 인간의 능력으로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이 철학은 <민중이 혁명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을 긍정하였다. 루소, 로크 등의 시민철학은 왕정을 박살내고 민중의 정부가 가능하다는 가능성까지 제시하였다.

이런 혁명의 시대를 겪은 유럽의 각국은 혁명이 끝나자 새로운 철학을 찾기 시작한다. 이젠 유럽의 각국 스스로가 <국민들에게 일체감>을 심어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 때 등장한 철학이 바로 <낭만주의> 사상이었다.

낭만주의는 <합리적 이성>보다는 <민족적 자긍심, 끓어오르는 열정과 애국심, 폭발적인 사랑의 힘> 등 내면적 가치관을 중요시하는 사상이었다. 국가는 애국심, 민족의 위대함, 공동체의 단합 같은 것을 강조해야만 수많은 유럽 국가들 안에서 독립국가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탈리아와 독일 같이 분열된 국가에서는 특히 이 <낭만주의>가 유행하였다. 랑케와 달타이 등은 독일 역사가였고, 크로체는 이탈리아 역사가였다. 이들 분열된 국가에서 <역사학의 독립>을 주장하는 사상가들이 많았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훗날 이 두 나라에서 낭만주의적 애국심을 바탕으로 한 파시즘 사상이 유행했던 것도 우연이 아닐 것이다.)

유럽의 국가들은 나폴레옹 이래 <국민 교육>과 <시민 교육>을 실시하였고, 역사는 민족 정신을 함양하기 위해 필수교과로 채택되었다. 랑케가 국가 공문서를 바탕으로 한 정치사 교육이 <본질적 역사>라고 말한 것은 이러한 시대적 요청을 받아들인 것 이다. 사실, 정부와 역사학자가 가장 긴밀한 유대관계를 가지고 상호협조했던 지역이 바로 랑케가 살았던 <분열된 독일>이었다.

이제 역사는 연대기를 보면서 과거의 일을 하나 하나 생각해보는 수준의 역사를 벗어나, 국가의 공문서를 바탕으로 기술되었다. <학교>라는 지식주입소는 새시대 인력들의 머릿속에 과거의 정치적 지식을 콸콸 쏟아부었다. 역사는 독립했지만, 그 지식의 선택권은 국가에게 있었다. 역사는 국가에 의해 재미있는 이야기로 재구성되었지만, 그것이 절대적 진리인지에 대한 판단은 학생들에게 없었다.

역사는 사회현상을 연구하기 위한 도구에서 벗어나 재미있는 이야기(내러티브)가 되었다. 랑케는 있는 그대로의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것이 역사의 의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랑케의 역사는 위대한 영웅들의 이야기와 그들을 통해 바라보는 세상 이야기였다. 서민들의 이야기는 없었으며, 정작 역사를 알고자 하는 사람들이 흥미를 가지는 이야기는 없었다.

3. 진화론을 믿었던 사회학자들의 역사 만들기...

19세기 랑케가 역사학의 독립을 부르짖을 때, 한편으로는 사회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콩트가 <사회현상>을 체계적으로 연구해야 한다고 연설하고 있었다.

콩트는 과거를 아주 간단히 정의하였다. 과거란 <종교의 시대, 형이상학의 시대, 과학의 시대>로 발전하였다고 말이다. 콩트 이래, 과거를 간단히 정의하는 사회학자들이 대거 등장하였고, 이들은 자신들의 역사관이 뚜렷한 과학적 근거를 가진 <사관>이라고 생각한 듯 싶다.

이들 사회학자들의 사관은 <진화론>에 의거하고 있다. 다윈이 <종의 기원>에서 말한 <인간은 원숭이에서 진화했으며, 우성은 살아남고 열성을 도태되는 적자생존의 원칙이 자연에 적용된다>는 이론을 사회학과 역사학에 인용한 것이다.

진화론을 사회학에 인용한 대표적인 학자는 스펜서이다. 그는 <노동자는 열성 유전자를 가졌기 때문에 가난은 자신의 탓이다>라고 말하여 산업 사회의 약자가 무능하다는 것을 진화론으로 증명한다. 또, <강대국이 약소국을 점령한 것은 사자가 배고픔에 양을 잡아먹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회의 법칙이다.>라고 말하여 제국주의를 옹호한다. 그는 제국시대를 살아간 자랑스런 영국인이었으니까... 그가 생각한 역사는 야만적 무력 사회에서 제국의 산업자본사회로 발전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하나의 관점에서 역사를 바라보는 <사관>을 가진 역사가들이 대거 등장한다. 그런데 그 <사관>은 역사가 진화하고 발전한다는 믿음을 가진 사관이었다.

헨리 메인은 역사를 <노예사회에서 신분사회로, 신분사회에서 계약사회로> 이동한다고 말하였다. 새로운 사회로의 진화는 인류문명이 발전할 수 있었던 힘이라고 본 것이다.

심리학자 프로이트는, 역사란 원시적 본능으로 이루어진 사회에서 본능을 누르고 문명사회로의 진화하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진화는 원시적 유전자를 바탕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문명인들 역시 내면 속에는 <성적 본능과 원시적 욕망>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가장 역사적으로 유용한 <사관>을 뽑으라고 한다면 <마르크스 사관>일 것이다. 마르크스는 역사의 발전 과정을 <원시공동체 - 고대노예제 - 중세봉건제 - 근대산업자본주의 - 공산주의 사회>의 단계로 설정하고, 각 단계로 이행하는 과정의 필연성을 증명하였다. 다음 단계가 전단계가 진화한 결정체라는 것이다.

여기에 딴지를 건 학자들도 있다. 튀니스는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사회의 발전 단계는 퇴보할 수도 있다면서 공동체 사회보다 후진적인 <익명성을 가진 사회>를 말하기도 하였다. 

베버는 아예 죽은 마르크스를 평생 비판하면서 살아간다. 마르크스가 말한 계급이란 단순한 대립구조에 불과할 뿐, 실제 사회 안에는 다양한 이해관계를 바탕으로 세분화 된 <계층>이 있다는 것이다. 그가 저술한 <프로테스탄티즘과 자본주의 정신>은 기독교 계층의 힘이 근대 사회를 이끌어간 동력이었음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자신의 역사적 사관을 바탕으로 아예 <사회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체계를 수립한 사람도 있으니, 그가 바로 사회학의 아버지 <뒤르껨>이다. 그는 마르크스의 사회 발전 과정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면서 사회의 구성 요소를 <기능론> 입장에서 제시한다.

사회는 우리 몸과 같은 유기체이며, 몸의 각 기관은 맡겨진 기능을 담당한다. 머리, 가슴, 손, 발 등이 모여 하나의 몸을 구성하므로 어느 하나도 빠져서는 안된다. 단, 머리가 손, 발 보다 중요한 기능이므로 그 기관이 우대받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있다. 머리에 해당하는 엘리트, 손과 발에 해당하는 노동자, 심장에 해당하는 정치인 등등.... 사회에 대한 기여도가 다르므로 엘리트와 노동자의 급여가 다르지만, 그들은 모두 사회를 위해 꼭 필요한 사람들이다. 사회는 그들이 전부 존재해야 유기적으로 돌아간다. 역사도 이러한 역할 분담을 통해 과거의 질서를 유지한 것이다....

그의 이론은 훗날, 수많은 세부분야의 역사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1편에서 이야기 했던 아날 사학의 아버지 <브로델>도 역사 자체를 심층적이고 점진적인 발전 속에 이루어지는 유기체적 결합으로 보았다. 역사란, 사회학에서 말하는 커다란 구조 속에서 이루어지는 법칙과 같은 것이다. 그 안에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가고 수많은 이야기가 존재하지만, 사람들의 우연스러운 행동 역시 그 법칙에 제시한 과정 속으로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역할이 있고, 자신의 존재 의미가 있기 때문에 그 틀 안에서 우리는 행동하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진화론을 믿었던 사회학자들의 생각은 다시 18세기로 돌아가게 된다.

역사 자체를 알아서 어디다 쓰려고? 왜 이래? 아마추어같이....

그러나, 우리는 생각해본다. 역사가 마르크스나 브로델이 말한 것처럼 어떤 결말을 가지고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역사는 어떤 법칙을 가지고 파악해야 하는 과학이 되는 것일까? 역사의 발전 과정 속에 모든 인간들의 삶을 집어넣어 버린다면 수없이 많은 <다양성>을 가진 인간들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진화론은 <역사가 가진 위대한 힘>과 <무한한 가능성>을 다시 보여주었고, 인간의 미래는 결국 가장 합리적인 결말로 이어질 것이라는 기대를 불어넣어주었다. 그러나, 그 안에 존재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은 주변 이야기가 되어 사라져갔다.

역사는 과거를 살았던 다양한 인간들의 삶을 이야기하는 학문이다. 사람이 없는 이야기를 하면서, 진화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4. 랑케를 넘어 역사를 <인문학>으로 만들어 버린 역사학자들...

진화론이니, 사회학이니 하는 일련의 사회학자들 때문에 <역사의 독립성>을 주장하는 역사가들은 아예 역사를 사회학과 분리시키려는 이론을 만들어 제시하기 시작한다.

가장 먼저 칼을 뽑아든 사람은 <크로체>였다.

도대체 <발전 사관>이라는 것을 만들어 <역사의 동력이니, 역사의 목표니, 역사의 발전과정이니...> 하는 거대한 틀을 만드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그는 사회학자들의 역사관은 역사도, 과학도 아닌 어중간한 발전 법칙이라고 비난하였다. 사이비 역사를 넘어, 사이비 과학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역사학을 사회과학과 다른 <인문학>으로 정립시킨 이가 있으니, 그가 바로 <딜타이>이다.

그는 사회학을 사이비로 몰아세우며 역사학과 분리시켰다. 사회과학은 사회가 발전하고 유지되는 과정을 법칙으로 설명하기 때문에 자연과학과는 다른 사이비 과학이다. 과학은 외적인 법칙을 <설명>하는 것이지만, 역사는 인간의 삶을 <이해>하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는 사회학과는 학문 체계가 다른 <인문학>이라는 것이다.

이 이론에 따라 역사학을 <인문학> 관점에서 서술한 학자가 <콜링우드>였다. 그는 과거의 일들은 법칙이 아닌 <과거인의 사상>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시저가 <주사위는 던져졌다>고 말하며, 로마로 진군한 것은 법칙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사고방식에 따라 가장 합리적인 행동을 한 것 뿐이고, 그 결과는 그의 사상에 비추어 가장 있을 법한 행동으로 나타난 것이다. 과거에 살았던 시저 자체를 이해하는 것이 역사일 뿐, 그의 행동에서 법칙을 찾아내고 인간 행동 패턴의 일반화를 찾는 것은 역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콜링우드가 생각한 역사는 과거인의 <생각>을 과거의 상황에 비추어 가장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그에 따른 의미를 찾아내는 것이다. 거대한 법칙이나 틀을 찾는 것은 역사가 아니라 사회학에서 할 일이라는 것이다.

이로서 역사학과 사회학을 구분할 수 있는 이론이 마련되었다. 하지만, 20세기 사회학자들과 역사학자들은 또 다시 역사학의 본질을 놓고 싸움을 시작하게 된다.

5. 20c : 랑케의 정치사를 깨고 다양성을 찾는 역사학자들...

20세기 사회학자들은 역사학자들이 주장하는 역사의 독립성에 대해 큰 의문을 품게 된다.

사회가 세분화 되면서 역사, 정치, 지리, 인류학, 민속학 등 많은 분야가 제각각 독립을 주장한다. 새롭게 등장한 수많은 학문들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독립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모든 인문학과 사회과학이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이들 학문들은 서로 인접할 수밖에 없다. 20세기 사회학과 역사학, 그리고 수많은 학문들은 서로 교류하면서도 독자성을 내세우는 모순을 보여주게 된다.

그리고 역사학은 새로운 시대적 상황에 맞게 새로운 철학으로 거듭나게 된다.

20세기 역사학의 특징은 랑케가 말한 <국민 공통의 정치사>를 벗어나려는 시도였다. 역사는 과거를 다루는 학문인데, 왜 정치사만 다루어야 하는가? 왜 영웅의 일대기만 역사가 되는 것인가?

이러한 의문을 본격적으로 제기한 나라는 랑케의 고향 독일이었다. 세계 1,2차 대전을 패하고, 국가집단의 무서운 광기를 맛본 독일은 의도적으로 정치사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오히려, 왜 국가는 인간을 억압하는가, 왜 히틀러라는 지도자의 광기가 사회적으로 용인되었는가 등의 근본을 탐색하기 시작한다.

독일에서 역사는 랑케가 만든 역사의 독립성을 다시 벗어나기 시작한다. 사회 구조와 변화과정을 과학적으로 탐구하고 사건이 발생한 인과관계를 따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역사 경향을 묶어 사회구조사 연구라고 부르기도 한다.)

전쟁은 어떤 원인으로 시작되며, 전쟁의 역사는 어떻게 이루어진 것일까? 유태인들의 이주와 독일에서의 정착생활은 역사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이러한 원인을 먼 과거부터 추적하여 <탐문 수사>하듯이 파헤치는 것이다. 이 역사인식론은 랑케를 반발하는 과거 학자들로부터 이어져 세계 대전 이후 급속히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이와 발맞추어 등장한 또 하나의 역사 철학은 프랑스의 <아날 사학>이었다. 1편에서 이야기 말했듯이 역사를 오랜시간 동안 서서히 변하는 <지중해>에서의 삶과 같이 표현하면서 일상적인 생활 모습을 이야기하는 것도 역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독일과 프랑스의 역사학은 랑케 사학의 <정치사> 뿐 아니라 사회 구조와 <인간들의 아주 작은 이야기>들도 역사의 분야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는 랑케의 역사 보다 훨씬 재미도 없고, 쉽지도 않은 것이었다. 고대부터 이어진 전쟁의 역사를 알기 위해서는 역사적 지식을 넘어 군사학과 통계학 등 다양한 분야의 지식에 손을 대야 하기 때문에 전문 역사가나 사회학자, 군사전문가가 아닌 일반인들이 역사에 접근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이렇게 전문가들이 각종 사회학 이론과 통계학 등을 기초로 만들어낸 역사는, 일반인들이 비판하기 어려웠다. 또, 쉽게 쓴 동화책이나 영상물 등 이야기(내러티브)로 만들어 설명하지 않는 이상 이해조차 쉽지 않았다.

또, <인간들의 작은 이야기>라는 측면에서 <미시사>를 쓴다 할지라도, 그것은 인간 자체에 대한 탐구가 아니라 사회 구조 속에 살아가는 인간들의 필연적인 선택을 법칙으로 만들어 버린 것에 불과했다.

<지중해>라는 표본지역에 살아가는 인간들은, 스스로 선택을 해서 살아가는 것 같다. 그러나, 오랜시간 살펴보면, 자신의 자연환경에 맞춰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다른 인간들이 그곳에 살아간다고 해도 아마 비슷한 삶을 살았을 것이다. 이것은 인간 자체의 고유성을 바라보는 역사가 아니라, 인간이기 때문에 <사회 구조>에 종속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역사에 불과했던 것이다.

결국 20세기 서구유럽에서 보여준 새로운 역사적 흐름은 역사의 독립성을 주장하는 <인문학자>들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역사는 어쩔 수 없이 <사회과학의 법칙>을 받아들여야 하는가, 아니면 독자적으로 <인간 자체>를 연구해야 하는가?

6. 이들의 논쟁을 정리한 포스트모더니즘

역사학자과 사회학자들이 바라보는 역사에 대한 시각은 <구조냐, 인간이냐>의 차이에서 출발하였다. 포스트 모더니즘은 이 차이점을 모두 융합하면서 역사의 <세밀한 부분>을 강조하였다.

역사를 <진화론>으로 바라보는 거대한 법칙과 사관은 필요가 없다. 역사가 어떤 형식으로 발전한다고 믿는 것 자체가 누군가의 <주관성>이 들어간 것이기 때문이다. 마르크스건, 베버건, 뒤르껨이던 간에 그들은 역사와 사회를 자기 나름대로 해석한 <포스트모던>일 뿐이다.

랑케가 주장한 <정치사>도 허구이다. 영웅이란 것은, 국민교육을 위해 누군가가 만들어 낸 허상일 수도 있다. 더구나 영웅에 대한 과거의 자료들은 <영웅 만들기>를 좋아하는 누군가의 작품일 수도 있다.

포스트모던은 20세기 역사가들이 보여준 <아주 작은 인간들의 이야기>에 큰 관심을 갖는다. 왜냐면, 역사란 과거를 살아간 하나 하나 인간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20세기 역사에서 보여준 인간에 대한 관심은 포스트모던과 달랐다.

20세기 역사가들은 인간들이 집단 구조 속에서 살면서 그 구조를 유지하는 <손과 발>이 되었다고 생각하였다. 뒤르껨의 유기체론과 기능론에 입각해서 <사회를 구성하는 존재로서 인간>을 설정하고, 사회 속에서 의의를 갖는 인간을 연구했던 것이다.

포스트모던은 이것을 반박한다. 인간은 사회 속에서 살아가고 사회의 문화에 영향을 받지만, 일률적으로 똑같이 종속되지 않는다. 똑같은 노비가 존재하더라도 신분에 적응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그 시대의 이념에 저항하고 새 시대를 지향하는 인물도 있는 것이다.

또, 사회 구조 속에서만 찾는 인간은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에, 구체적인 생활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찾아야만 살아있는 역사를 찾아낼 수 있는 것이다.

<아날 사학>은 연역법과 같다. 미리 사회 구조의 특징을 정해놓고, 그 정해진 패턴에 따라 인간들의 삶의 방식을 규정한다. 이런 사회였으니,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은 이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포스트모던>은 귀납법과 같다. 인간들이 그 사회와 문화의 틀에서 살아가는 다양한 방식들을 하나 하나 상상력을 동원해 구성해 나간다. 이미 정해진 사회 구조는 누군가 만들어놓은 것 뿐이다. 내가 생각해보고, 내 관점에서 구축된 작은 이야기들을 바탕으로 <그 시대에는 이런 삶이 가능했다>는 것을 생각해보는 것이다.

그래서 포스트모던 역사는 과거인들의 일상 생활에 자신을 집어넣어 보기도 한다. 내가 과거인이었다면 어떻게 살았을까를 스스로 생각해보는 것이다. 단, 사회 구조 속에 가두어진 과거인이 아닌, 그 시대의 문화와 사상을 공유하는 깨어있는 과거인으로 말이다.

역사에 있어 법칙이란, 누군가가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만들어 놓은 <가설>에 불과하다. 과거의 <자료>란 완전한 것도 아니고, 그것밖에 없기 때문에 우리가 역사 토대로 삼는 일종의 <참고서적>일 뿐이다.

역사를 만들어가는 것은, 내 의지와 판단에 따른 것이다. 내가 정치사가 아닌 여성들의 이야기, 소수 인종들의 이야기, 이색적인 문화에 관심이 있다면 그 과거에 파고 들어 그들의 삶과 문화를 공유하면 그 뿐이다.

하지만, 이론적으로 가능한 포스트모던이 현실에서도 가능한 것일까? 지금부터 그 가능성을 한국 사회 각 분야의 문화에서 찾아보려고 한다.

지겹도록 재미없는 이론이야기를 이쯤에서 끝내고 실제 <문화>를 가지고 포스트모던을 이야기해보자.

다음 이야기는 문학에서의 영웅 서사 구조가 어떤 역사적 의미를 가졌길래 <게임 바람의 나라>와 <드라마 주몽>이 탄생하게 되었는지를 포스트모던으로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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