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민주주의의 발전
앞서 살펴보았듯이, 광복 이전에 건국을 준비해오던 단체들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건국의 강령으로써 내세웠다. 자유와 민주주의는 그 당시 모든 사람들이 꿈꿔오던 단 한 가지 목표였으며, 각종 파벌과 이념으로 갈라져있던 독립운동세력을 아우르는 하나의 매개체였다. 하지만 광복 이후에도 그들의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름뿐인 자유와 민주, 자신의 부정부패를 합법적인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의원들과 대통령들― 일제강점기를 억압을 벗어나 순탄할 것만 같았던 우리나라 현대사는 또다시 민주화를 부르짖으며 격동에 휩싸인다.
1) 이승만의 독재와 4.19
이승만 ‘박사’는 과거 임시정부의 대통령직을 맡았던 인물로, ‘이름난’ 독립운동의 ‘거목’이었다. 이승만은 주로 하와이나 미국 등지에서 활동하였으며, 각종 국제회의에 조선을 대표하는 인물로 참여한 바 있다. 이승만의 ‘공식적인’ 활동들로 인해 그는 국내외에서 유명해졌으며, 결국 광복 이후에는 초대 대통령직으로 선출되기에 이른다.
하지만 그가 정권을 잡은 것도 결코 순탄치만은 않았다. 대다수의 민족주의자들은 남한 단독정부의 수립을 반대하여 이승만을 지지하지 않았으며, 그로 인해 이승만은 미약했던 자신의 지지기반을 다지기 위해 친미파로 변신에 성공한 친일파와 손을 잡지 않으면 안됐다. 헌법을 만든 초대 의회였던 제헌의회制憲議會는 친미파였던 한국 민주당 출신들이 대부분을 차지하였으며, 그들은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추대하였다. 이승만이 친일파 청산에 소극적이었던 것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그의 지지기반의 대부분이 친일파 출신이었기 때문이었다.
제헌의회의 임기가 2년으로 끝나고, 6.25 전쟁 직전에 이루어진 선거에서는 과거 선거에 출마하지 않았던 민족주의자들과 이승만을 비판했던 사람들이 대거 당선되어 이승만의 대통령직이 위태로워졌다. 이승만은 2대 대통령 선거가 행해질 1952년, 6.25 전쟁 중 임시 수도였던 부산에서 계엄령을 선포하고 경찰, 군대, 폭력배 등을 동원하여 강제로 대통령 간선제에서 직선제로 헌법을 고쳤다(발췌개헌). 1954년에는 초대 대통령만은 계속 대통령직을 역임할 수 있도록(중임 제한 규정 철폐) 다시금 헌법을 고쳤다. 1954년 개헌에서는 개헌과 함께 웃지못할 이야기가 전해진다. 본래 헌법을 고치기 위해서는 전체 국회의원의 2/3의 동의가 필요했다. 1954년 당시 국회의원 재적은 203명으로, 그의 2/3은 135.33333....이었으며, 때문에 개헌을 위해서는 136명이 개헌에 동의해야했다. 투표 결과는 135명이 찬성하여 부결되었지만, 후에 이승만의 자유당은 0.333....명은 있을 수 없으므로(자연인이 아니므로) 소수점을 반올림(사사오입)하여, 135명의 찬성만으로도 개헌이 가능하다는 어처구니없는 논리를 펼쳤다. 결국 극적인 반올림으로 대통령의 중임제한을 철폐하는 것으로 헌법이 개정되었는데, 이를 사사오입 개헌이라고 한다.
이승만의 이러한 ‘노력’에도 대통령 선거에서 그는 항상 시험 당해야 했다. 이승만과 갈라선 이들은 민주당을 만들어 대립하였는데, 민주당은 1956년 정부통령 선거 때 “못살겠다 갈아보자”라는 구호를 내걸고 대통령 후보에는 신익희, 부통령 후보에는 장면을 입후보하였다. 선거 유세 도중 신익희는 급사하였지만, 장면이 부통령에 선출되면서 자유당을 견제하였다. 1960년에 이루어진 대통령 선거에서는 혁신을 주장했던 진보당의 조봉암이 인기를 끌자 이승만과 자유당은 3.15 부정선거를 자행했을 뿐만 아니라, 진보당 사건을 일으켜 조봉암을 간첩으로 몰아 사형을 선고했다. 이외에도 이승만은 그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국가보안법을 개정하였으며, 언론을 탄압하고 반공사상을 강화시켰다.
3.15 선거는 3인조, 5인조로 묶어서 투표를 하도록 하거나 투표함을 교체하는 등의 부정행위로 많은 사람들의 규탄을 받았다. 국민들은 부정부패와 생활고에 허덕이고 있었으며, 이러한 불만들은 각종 시위를 통해 표출되었다. 김주열이 참여한 마산 시위도 이러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 중에 하나였다. 고등학생이었던 그는 마산 시위에 참여하였다가 행방 불명 되었는데, 얼마 후 눈에 최루탄이 박혀 있는 시체가 마산 앞바다에 떠올라 발견되었으며, 시체를 유기한 것이 경찰의 소행임이 알려지자 시위는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김주열의 사망소식은 전국적인 시위의 계기가 되었으며, 4.18 고대 학생시위를 거쳐 4.19 전국 시위가 전개되었는데, 경찰들이 시위대에게 발포하였기 때문에 많은 시민들과 학생들이 희생당했다. 결국 같은 해 4월 26일에는 이승만이 대통령직을 하야함으로써 막을 4.19는 막을 내렸다. 4.19는 학생과 시민을 중심으로 민주화 운동이 진행되었다는 의의를 갖는다. 또한 4.19 이후로는 그동안 북진 통일 이외에는 사실상 ‘금기’로 여겨지던 통일에 대한 열망을 어느 정도 펼쳐 볼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판문점으로! 등“)
4.19 이후 대통령이 아닌 국무총리를 중심으로 하는 내각제 개헌이 이루어졌으며, 과거 선전하였던 민주당의 장면이 국무총리로서 권력을 잡았다.(대통령 윤보선, 국무총리 장면)
Tip1. 이승만 정부
1952. 발췌개헌
1954. 사사오입 개헌
1956. 대통령 이승만(자유당) vs 신익희(민주당) / 부통령 이기붕(자유당) vs 장면(민주당)
민주당 “못살겠다 갈아보자” / 신익희, 선거 유세 도중 급사
1960 대통령 이승만(자유당) vs 조봉암(진보당) / 조봉암, 간첩으로 몰려 사형
Tip2. 4.19 혁명의 전개
3.15 부정선거 -> 마산 규탄 시위 -> 김주열 사명 -> 전국적으로 확대 -> 고대 시위 -> 4.19 전국적으로 확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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