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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놈, 무식한 놈, 자유로운 놈에서 초원의 한 유목민으로

  우리가 유목민하면 떠오르는 몇 가지 코드가 있다역사상 가장 광활한 영토를 정복한 칭기즈 칸이나약탈을 일삼는 잔혹한 문명의 파괴자그리고 푸른 초원을 자유롭게 유랑하며 가축 떼를 몰고 다니는 목자牧者가 바로 그것이다유목민들은 그동안 우리가 배워왔던 역사에서 많이 등장하지는 않았어도뚜렷하고도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우리는 그들이 남긴 이러한 몇 안 되는 이미지를 골라 그들을 판단한다 

  드넓은 제국을 완성하고도 200년 이내에 붕괴한 유목제국들을 보고 우리는 그들이 혼과 정신으로 상징화 되는 주체성이 없다고 비난했다또 우리는 정주 문명 과 유목 야만 =이라는 문명과 야만의 이분법적인 잣대로 유목세계를 판단했다유랑하는 유목민의 이미지는 우리에게 어느 것에도 구속받지 않는 자유라는 환상을 만들어 내면서 어떤 원초적인 향수를 떠올리게 했다하지만 이러한 편견과 환상은 유목과 유목사회에 대한 막연함에서 비롯되었다. 

  유목은 초원에서 살아남기 위한 독특한 생산 경제로현대사회에서 막연한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개념과는 완전히 다른 개념이다초원은 사람이 살기에 그다지 녹록한 환경이라고 할 수는 없다.평소 날씨가 건조하고 강수량이 많지 않아서생각보다 가축들이 먹을 풀이 적다우리가 초원을 상상할 때 사진에서 봤던 아름다운 풍경이나잔디밭을 생각하면 곤란하다또한 기후 역시 그다지 좋은 조건이라고는 할 수 없다. 몽골의 경우 겨울에는 영하 40도까지 떨어지는데다큰 눈이 오면 그 눈이 얼어 초원을 덮는다초원의 겨울은 인간에게나 동물에게나 무척이나 가혹하다 

  유목민에 속담에는 부자도 조드 한 번이면 족하고영웅도 화살 하나면 족하다.”라는 말이 있다.여기서 조드란 가축이 집단 폐사하는 현상을 말한다유목민에게는 재앙이다이러한 속담이 있을 정도로유목경제는 대단히 불안정한 경제체제이다그렇게 때문에 그들은 생존을 위해 약탈과 정복활동을 할 수 밖에 없었다역사시대 변방에서 행해지던 유목민의 약탈이 가을에 집중되었던 까닭은 초원의 가혹한 겨울을 나기 위한 것이었다. 

  유목민의 이동 생활은 정처 없이 떠도는 것이 아니라역병을 피해물과 풍족한 목초지를 찾아 조상 대대로 확인된 곳으로만 이동한다유목생활은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운 방랑이 아닌가혹한 초원과 가축빈곤에 얽매인강요된 이동생활인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유목민들이 문명에 대한 항체가 없다고 한다실제로 유목민들이 세운 제국은200년도 안 되서 빠르게 붕괴했고빠르게 정주사회에 동화되었다하지만 유목민들이 정체성을 갖지 않고풍요롭고 안락한 정주화를 추진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이러한 역사적 사례는 유목민들의 군주인 칸Khan들의 노력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고구려와 동맹을 맺어 당과 대항할 정도로 강성했던 투르크Turuk(돌궐突闕)는동맹인 고구려의 몰락과 차차 강대해지는 당에게 흡수되었다그 후 투르크인들은 당나라의 용병으로 활용되었으며옛 돌궐의 땅은 당나라의 식민지가 되었다투르크인들은 당의 기미지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고결국 새로운 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다이를 돌궐 제2제국이라고 하는데초원에 우뚝 선 돌궐비석에는 돌궐의 독립과정과 돌궐의 칸이 돌궐인들에게 당부하는 메시지가 그들의 언어로 적혀있다.

나라를 가진 민족이 있었는데우리의 나라는 어디에 있으며군주를 가진 민족이 있었는데우리의 군주는 어디에 있는가?”

중원 백성의 달콤한 말에부드러운 비단에 속아튀르크 백성들아너는 많이 죽었다튀르크 백성들아너는 분명히 죽었을 것이다.”

- 돌궐의 빌게 카칸 비문에서

  중국을 지배했던 몽골인들도 투르크인들과 다르지 않다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서 묘사되고 있는 대도大都(지금의 북경 지역)의 주인인 원 세조 쿠빌라이 칸은중국의 지배를 상징화하기 위해 중국의 격식을 완벽히 갖춘 궁궐을 지었다이 궁궐은 당시 원활한 동서교역으로 막대한 부를 올린 몽골제국의 자금으로 지어진 것으로어떤 중국 왕조도 감히 생각해낼 수 없는 어마어마한 규모를 자랑했다하지만 쿠빌라이가 선택한 곳은 거대한 궁궐이 아닌자신과 전장을 누빈 그의 천막이었다그는 그 천막에서 먹고 자고또 계절에 따라 이동하면서유목민의 기질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훈(흉노)족 추장.
야만인, 악인의 이미지가 너무나도 선명하다.
서양이 문명 개화를 주장하며 함포 외교를 시작한지 300년, 
그들의 시선은 여전히 바뀌지 않은 듯 하다.



  우리는 그동안 지나치게 편견과 환상이 가득한 시선으로 유목사회를 바라봤다우리의 이러한 시선은 이는 과거 서구의 제국주의가 동방을 바라봤던 시선을 닮았다최근 유행하고 있는 디지털 노마드’, '우마드라는 신종어 역시 유목에 대한 환상을 확대재생산했다이와 같은 환경에서 다원화나 문화 상대주의는 윤리 교과서에서 나오는 고리타분한 말이 되었다이제 우리는 그동안 가져왔던 편견과 환상을 넘어 열린 자세로 있는 그대로 그들을 인식해야한다이러한 편견 없는 인식은 점차 다인종다문화 국가가 되어가는 우리나라와 하나로 엮인 국제사회를 살아갈 우리가 가져야할 자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