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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국원왕

역사 속의 종교 이야기 <불교편> - 16화. 고구려의 불교 이야기 역사 속의 종교 이야기 16화. 고구려의 불교 이야기 1. 불교가 원시 신앙을 대신하다. 자, 이번 회부터의 불교 이야기는 우리 역사 속의 불교 이야기이다. 그럼 시작해볼까? 한반도의 불교 이야기는 인도나 중국 이야기처럼 재미있는 일화로 구성하기가 힘들다. 특히, 고대 불교는 삼국사기, 삼국유사, 해동고승전 등 일부 자료와 중국측 기록 외에는 남아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누가 불교 이야기를 적더라도 거기서 거기일 수밖에 없는 현실을 감안해야 한다. 일단, 삼국유사에 따르면 불교는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에 전진왕 부견이 승려 순도를 통해 불상과 불경을 전파했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2년 뒤 아도화상이라는 스님이 다시 건너오자 성문사에 순도를, 이불란사에 아도를 머물.. 더보기
고대 경제 무역권이 우리 민족국가의 운명을 좌우하였다. 고대 경제 무역권이 우리 민족국가의 운명을 좌우하였다. 는 역사적 사실일 수는 있지만, 정설로 인정된 내용은 아닙니다. 일부 사료의 파편으로 구성한 내용이거나, 아직 공식적으로 인정되지 않은 역사적 내용들을 가지고 구성한 페이지입니다. 정설이 아니니, 글에 대한 비판보다는 이런 내용도 있을 수 있구나 하는 측면에서 만든 카테고리라는 점을 이해하고 읽어주세요. 1. 고대의 전쟁을 왜 공성전으로만 보는가? 우리는 고대의 전쟁하면 동이족과 중국족의 싸움.... 고조선, 고구려 등 북방의 패자들과 중국 춘추시대와 수당으로 이어지는 중국 국가들간의 세력 다툼으로 이해하곤 합니다. 그리고 동북아 국가와 중원국가의 싸움에서 주목하는 것은 부여성 - 요동성 - 평양성 등으로 이어지는 공성전을 생각하곤 합니다. 하지만,.. 더보기
백제 건국기의 정복 전쟁 백제초기의 정복전쟁 온조왕 13년(기원전 6년) 8월에 마한에 사신을 파견하여 천도를 알리고 영토를 명확히 정하였는데, 북으로 패하에 이르고 남으로 웅천에 이르렀으며 서로 큰 바다에 닿고 동으로 주양에 이르렀다. 24년 7월에 왕이 웅천책을 만드니 마한왕이 사신을 보내 꾸짖어 말하기를, 라 하니, 왕은 부끄러이 여겨 그 책을 헐었다. 26년 10월에 왕이 군사를 내어 겉으로는 사냥한다 하고 몰래 마한을 습격하여 마침내 국읍을 병합하였는데, 다만 원산과 금현 두 성을 고수하여 함락하지 못하였다. 27년 4월에 두 성이 투항하여 그 인민들을 한산의 북으로 옮기니 마한은 마침내 망하였다. - 삼국사기, 백제본기 1 - 근초고왕 26년(371)에 고구려가 군사를 일으켜 오니, 왕이 듣고 패하 강변에 군사를 매복.. 더보기
4세기 고구려의 위기 - 모용씨의 침입, 근초고왕의 침입 고구려의 위기 - 모용외의 침입 12년 봄 2월에 환도성을 수리하고, 또 국내성을 쌓았다. 가을 8월에 왕이 거처를 환도성으로 옮겼다. 겨울 10월에 연나라 왕 모용황이 용성으로 천도하였다. 건위 장군 모용한이 먼저 고구려를 빼았은 다음 우문씨를 멸망시키고, 나아가 중원을 차지하자고 청하였다. 고구려로 가는 길은 두 곳이 있는데, 북쪽 길은 평탄하고 넓은 반면 남쪽 길은 험하고 좁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북쪽 길로 가려고 하였다. (모용)한이 말하였다. 모용황이 이말을 따랐다. 11월에 모용황이 스스로 날랜 군사 4만을 거느리고 남쪽 길로 진군하여 모용한과 모용패를 선봉으로 삼았으며, 따로 장사 왕우 등을 보내 15000명을 거느리고 북쪽 길로 침략해왔다. 왕은 아우 무를 보내 정예군 5만명을 거느리고 북쪽.. 더보기
고대의 전쟁 노비 관련 사료 고대의 노비 고구려왕 사유(고국원왕)가 보병과 기병 2만을 거느리고 와서 치양(황해도 백주)에 주둔하고 군사를 나누어 민가를 약탈하였다. 왕(근초고왕)이 태자에게 군사를 주니 곧장 치양으로 가서 고구려군을 급히 깨뜨리고 오천명을 사로잡았다. 그 포로를 장사에게 나누어 주었다. - 삼국사기 - 가야가 배반하니 왕(진흥왕)이 이사부에게 토벌하도록 명령하고, 사다함에게 이를 돕게 하였다. 사다함이 기병 오천명을 거느리고 들이닥치니 일시에 모두 항복하였다. 공을 논하였는데 사다함이 으뜸이었다. 왕이 좋은 농토와 포로 이백명을 상으로 주었다. 사다함은 세 번 사양하였으나 왕이 굳이 주자 받은 사람은 놓아주어 영민으로 만들고, 농토는 병사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를 보고 나라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하였다. - 삼국사기..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