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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풀이/역사 사료와 데이터

중국사에 나오는 한국사 자료들 - 당서 북적전 흑수말갈

중국사에 나오는 한국사 자료들 - 당서 북적전 흑수말갈

흑수말갈은 숙신 땅에 있는데, 이것은 또 읍루라고도 한다. 원위 때에는 물길이라고 했다. 서울의 바로 동북쪽 육천 리 되는 곳에 있다. 동쪽은 바다에 닿아 있고, 서쪽은 돌궐, 남쪽은 고려, 북쪽은 실위에 소속되어 있다. 이들은 각각 수십부씩이 있는데 부마다 추장이 있어 다 각각 다스린다.

  그 중에서 제일 이름 있는 것은 속말부로서 가장 남쪽에 있으니 바로 태백산에 닿아 있는 때문에 역시 도태산이라고도 한다. 이곳은 고려와 인접되어 있고, 속말수에 의저해서 산다. 이 물은 산 서북쪽에서 시작되어 타루하로 흐른다. 이곳에서 조금 동북쪽에 있는 것이 골줄부이고, 그 다음이 안거골부이며, 제일 동쪽에 있는 것이 불열부이다. 거골부의 서북쪽이 흑수부이고, 속말부 동쪽이 백산부이다.

  부와 부 사이는 먼 곳은 삼, 사백 리나 되고, 가까운 곳은 이백 리쯤 된다. 백산은 본래 고려에 신하노릇했다. 중국 군사가 평양을 취하자 그 무리들이 많이 당나라로 들어갔고, 이 때 골줄부, 안거골부 등은 모두 흩어져 버려서 소식을 들을 수가 없다.

  그 중에 남은 사람들은 발해로 들어갔고, 오직 흑수부만이 완전하고 강성했다. 이 부는 십육부락으로 나뉘었는데, 모두 남과 북으로 불렀으니 이것은 대개 가장 북방에 살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튼튼해서 보전을 잘한다. 풍속에 머리를 땋아 내리고 돼지의 어금니와 꿩의 꼬리를 장식으로 단다. 성질이 잔인하고 사나와서 사냥을 잘하며, 근심하고 슬퍼하는 것이 없다. 사는 집이 없이 산이나 물을 등지고 땅을 파고서 그 위에 나무를 걸친 다음 흙으로 덮어 마치 무덤처럼 만들어 가지고 산다.

  여름이면 물과 풀을 따라다니면서 살고, 겨울이면 이 굴 속으로 들어간다. 오줌으로 얼굴을 씻으니 오랑캐 중에서도 가장 추한 인종이다. 사람이 죽으면 그대로 갖다 묻고 관이나 곽이 없다. 그리고 죽은 자가 타고 다니던 말을 죽여서 제사 지낸다.

  그 추장은 대막불만줄이라고 하고, 대마다 서로 계승하여 추장이 된다. 글이 없고 화살은 돌로 촉을 만드는데, 길이가 두 치나 된다. 이것은 대개 싸리나무촉을 쓰던 옛법을 본받은 것이다. 가축은 돼지가 많고 소나 양은 없다. 수레와 말이 있지만, 밭은 쟁기로 갈고 수레는 사람이 밀고 다닌다. 땅에서는 조와 보리가 난다.

  담비, 쥐, 흰 토끼, 흰 매가 난다. 염천이 있는데 일기가 더우면 소금 기운이 나무에 서려서 이것을 따다가 먹는다.

  무덕 오년에 우두머리 아고랑이 처음 중국에 왔고, 태종의 정관 이년에 신하노릇을 하고 바치는 물건이 일정해 있었다. 이에 그 땅을 연주를 삼았었다. 그 뒤에 제가 고려를 치자 그 북부가 반란을 일으켜 고려와 합쳤다. 이 때 고혜진 등이 무리를 거느리고 안시성을 구원할제 싸움마다 말갈이 맨 앞에 섰다. 제가 안시를 깨치고 혜진을 잡고, 말갈 군사 삼천 명을 잡아서 모두 땅 속에 묻어 죽였다.

  개원 십년에 그 추장 예속리계가 입조하자 현종은 즉시 그에게 발리주자사를 배했다. 이 때 안동도호 설태가 흑수부를 두자고 청하자 부장으로 도독자사를 삼았다. 그리고 조정에서 장사를 두어 이를 감독하도록 하고, 부도독에게 성을 이씨, 이름을 헌성이라고 하사했다.

  또 운휘장군으로 흑수경략사를 삼아 유주도독을 거느리도록 했다. 이로부터 대마다 입조하여 물건을 바친 것이 열 번이었으니 대력 때에 모두 일곱 번이요, 정원 때에 한 번이요, 원화년중에 두 번이었다.

  처음에 흑수의 서북쪽에 또 사모부가 있었고, 거기에서 북쪽으로 십일을 가면 군리부가 있고, 동북쪽으로 십일을 가면 굴설부가 있는데, 이것은 또 굴설이라고도 한다. 여기에서 조금 동남쪽으로 십일을 가면 막예개부가 있고, 또 불열, 우루, 월희, 철리 등의 여러 부가 있다.

  그 땅은 남쪽으로는 발해와 떨어져 있고, 북동쪽은 바다에 닿았으며, 서쪽은 실위에 닿았다. 남과 북의 거리는 이천 리가 되고, 동과 서는 천 리가 된다. 불열, 철리, 우루, 월희 등은 때때로 중국과 서로 통하고, 군리, 굴설, 막예 등은 모두 통하지 못했다.

  지금까지 계속하여 중국에 입조한 곳은 좌편에 소속되었다. 불열은 또 대불열이라고도 하는데 개원, 천보 사이에 입조해서 고려 눈동자와 담비, 흰 토끼의 가죽 등을 바쳤다. 철리는 개원년중에 여섯 번이나 왔고, 월희는 일곱 번을 왔으며, 정원년중에 한 번을 왔다. 또 우루는 정관년중에 한 번을 왔고, 뒤에 발해가 강성해지자 말갈은 모두 거기에 소속되어 그 뒤로는 다시 중국에 오지 않았다.(唐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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