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의(賈 誼)의 합종 연횡책 중에서 - 과진론(過 秦 論)
진(秦)나라의 효공(孝公)은 효산( 山)과 함곡관(函谷關)의 견고한 요새지에 웅거하고 옹주(雍州)의 땅을 안고 군주와 신하가 굳게 지키면서 주(周)나라 왕실을 엿보았다. 천하를 석권하고 온 세상을 모두 하나로 싸들고 사해(四海)를 주머니에 넣어 묶으려는 생각과 사방을 병합하려는 마음이 있었다. 이러한 때를 당해 상군(商君)이 보좌하여 국내에 법도를 세워 농사짓고 옷감 짜는 일에 힘쓰게 하며, 수비전(守備戰)의 장비를 정비하고 국외로는 연횡책(連횡策)을 써서 제후(諸候)들끼리 싸우게 했다. 이리하여 진(秦)나라 사람들은 팔짱을 낀 채로 서하(西河)의 밖을 차지했다. 효공이 죽고 나자 혜문왕(惠文王)·무왕(武王)·소양왕(昭襄王)은 선왕(先王)의 유업을 이어받아 물려준 정책에 따라서 남족으로는 한중(漢中)을 차지하고, 서쪽으로는 파촉(巴蜀)을 차지하며, 동쪽으로는 비옥한 땅을 갈라받고 북쪽으로는 요충지(要衝地)의 군(郡)을 거두어 들였다. 제후들은 두려워서 모여서 맹약을 맺고 진(秦)나라를 약화시키려 하며 진귀한 기물이나 귀중한 보물과 비옥한 땅을 아끼지 않고, 천하의 인재들을 초청하여 합종책(合縱策)을 맺고 하나로 뭉쳤다. 이 때를 당해 제(濟)나라에는 맹상군(孟嘗君), 조(趙)나라에는 평원군(平原君), 초(楚)나라에는 춘신군(春申君), 위(魏)나라에는 신릉군(信陵君)이 있었다. 이 네 사람은 모두 현명하고 지혜로왔으며 충성스럽고 신의가 있었으며, 관대하고 온후하여 사람을 사랑했으며, 현자(賢者)를 존경하고 인사를 중히 여겼다. 합종책(合縱策)을 약속하여 연횡책(連횡策)을 버리고, 한(韓)·위(魏)·연(燕)·조(趙)·송(宋)·위(衛) 중산(中山)의 군사를 합쳤다. 이리하여 여섯 나라의 인사로는 영월(영越)·서상(徐尙)·소진(蘇秦)·두혁(杜赫) 등이 있어 그것을 모의하고, 제명(薺明)·주최(周最)·진진(陣軫)·소활(召滑)·누완(樓緩)·적경(翟景)·소려(蘇 )·악의(樂毅) 등이 그들의 뜻을 통하게 하였다. 오기(吳起)·손빈(孫 )·대타(帶他)·아량(兒良)·왕료(王廖)·전기(田忌)·염파(廉頗)·조사(趙奢) 등이 그들의 군대를 다스렸다. 일찍이 열 배가 되는 국토와 백만의 군대로 함곡관(函谷關)을 올려다보며 진(秦)나라를 공격하였다. 진나라 사람들이 관문을 열고 적을 맞으니 아홉 나라의 군대는 도망하여 감히 나아가지 못했다. 진나라는 화살을 없애고 살촉을 잃는 낭비가 없었고, 천하의 제후들은 이미 곤경에 처했다. 이리하여 합종책은 흩어지고 동맹은 해체되어 다투어 영토를 갈라 진나라에게 뇌물로 바쳤다. 진나라는 여력이 있어 피폐한 군대를 제압하고 도망하는 군대를 추격하여 패배한 군대를 물리치니 엎어진 시체가 백만이고 흐르는 피에 큰 방패가 떠다녔다. 편리한 형세를 타고 지배하고 다스려 산하(山河)를 분열시켰다. 강대국들은 항복을 청하고 약소국들은 입조(入朝)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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