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 이야기 28 - 중국 최초의 통일국가 진나라의 통일 배경
이번 장에서는 진나라의 통일 배경만 다루어 보겠습니다. 진에 대한 이야기는 통일배경론, 진의 정치사, 진의 제도사로 나누어 3파트를 정리하고, 나머지 파트에서는 진나라가 중국 역사에 남긴 유산 부분을 다루어 보죠. 그게 진나라 이해에 효율적일 것 같습니다. 1. 진의 통일 이전부터 추구해온 통일사상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기 전부터 <춘추전국시대>에는 통일론이 각 제자백가 사상 속에서 내포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제자백가의 각 사상들은 자신들의 사상의 논의의 궁극적인 목표가 모두 이 혼란한 세상이 끝나고, <통일된 국가>가 탄생하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단지 그 방식이 달랐을 뿐이지요. 유가는 도덕원리로서, 법가는 법치원리로서, 묵가는 겸애사상으로, 도가는 자연철학으로 그 방식이 달랐지만, 모두가 통일을 원한 것은 사실입니다. 실제 전국시대의 통일은 이러한 혼란기를 극복하고 평화를 염원하는 당시 사람들의 바램이 이루어전 것입니다. 통일의 방식 중에서 법가사상이 가장 군주의 이상적 통치방식이라고 생각하였고, 그 방식을 통해 진이 통일을 이루었던 것 뿐이죠. 세계사적 보편성으로 보아도 초기 철기를 넘어 본격적으로 철기가 보급되는 시기에는 대부분의 소국들이 하나로 통합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진이나, 아시리아, 페르시아, 마케도니아와 같은 강력한 통일국가들의 통치이념이 대부분 강력한 법치주의를 통한 각종 제도 개혁이었다는 사실을 볼 때 <엄법주의 사상>이 이 시대에는 가장 잘 적용되었던 듯 싶네요. 법가사상의 가장 큰 장점은 엄격한 국가 통제 아래에서 <경제력>을 통일시키기 좋다는 점도 있습니다. 실제, 춘추전국시대에는 인위적인 각 국가간의 관세 장벽, 화폐, 도량형의 불일치로 인하여 당시 성장하고 있던 상공업 계층의 불만도 많았습니다. 따라서 통일은 곧 정치적 통일 뿐 아니라 경제적 일원화도 뜻하는 것이었으며, 진시황이 통일 후 바로 강력하게 화폐, 도량형, 도로 등을 통일하거나 정비하는 것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실제, 페르시아를 통일한 다리우스 1세기에도 진시황제와 거의 비슷한(똑같은 것도 있더군요) 경제 통일 정책을 실시하는데, 역시 통일 전 경제적인 단위의 불일치로 인한 문제점이 있었다는 점을 반증합니다. 또 진시황의 통일은 <중화>라는 개념을 통해 뭉치려고 했던 주나라 이후 중원 민족들의 일체감이 완성되었다는 것도 반증합니다. 실제 은, 주대에는 황하강 유역만이 중화의 개념이었으나, 춘추전국시대 이후 <초, 월, 오>라는 양자강 국가가 등장함으로서 이들 역시 <중화>로 포함되어야 한다는 논의가 계속되었습니다. <초>는 스스로도 남방의 오랑캐가 이닌 <중화민족의 일부>임을 자처합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서방의 오랑캐 취급을 받아야 마땅한 서부의 <진>이 통일함으로서 서-중-남을 통합한 <중화>개념이 등장합니다. 즉, 중국민족이라는 보편 의식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죠. 그러나, 당시 진이 너무 빨리 망한 관계로 중국 민족을 뜻하는 한족은 다음 왕조인 <한나라>에서 비릇됩니다. 또 서-중-남의 통합은 이제 북- 동부 오랑캐 정벌이라는 시각에서 중화의 영역의 확장을 시도합니다. 진나라는 북방 유목민족인 흉노를 중화 외의 경계로 설정하였고, 한나라는 동부 고조선을 외부 경계로 설정하면서 이들 민족과의 투쟁이 시작되는 것이죠. 남부로는 양자강 훨씬 이남이 이제 오랑캐의 영역이 된 것입니다. 서부는 산맥이 가로막고 있어, 더 나아갈 곳이 적었으므로 오랑캐의 개념과 함께 다른 세계와의 소통을 할 수 있는 무역권으로 인식을 합니다. 또 하나 중국 통일의 배경은 바로 북방 <흉노>의 강성합입니다. 강력한 유목민 문화권의 흉노가 중화문화권을 위협하는 상황에서 중국인들은 하나로 뭉쳐 대항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어느 국가든지 강력한 통일 국가가 등장하기를 바라는 염원이 있었고, 이것은 <진>이라는 오랑캐 국가가 중원을 통일했음에도 그 통일을 이민족의 침입으로 보지 않는 관점이 성립된 듯 싶습니다. 2. 그럼 왜 하필 진이였는가? 서방의 진이 중국을 통일한 가장 큰 원인은 <상앙>으로 대표되는 강력한 법가주의 사상의 수용입니다. 다른 국가들과는 달리 진의 변법은 1차, 2차, 3차로 이어지면서 계속적으로 국가 개혁을 끊임없이 시도했는데, 주변에 강국이 없는 서부의 외진 국가라는 점이 변법 수행을 차질없이 진행하게 한 원동력이었습니다. 이 변법을 통해서 진은 구세력을 일소하고 강력한 중앙집권을 이루었으며, 모든 백성들이 토지를 사유하는 제도를 완성하여 생산성이 비약적으로 증가합니다. 상앙의 제원전을 보면, 당시 농법기술의 발달이 자세히 나와있습니다. 예로, 당시에는 획기적이라고 할 수 있는 휴한농법이 이 때 도입되었죠.(유럽 중세에서의 삼포제가 보통 9- 10세기 정도에 정착되는 것으로 미루어 천년은 빠르다고도 볼 수 있겠네요.) 따라서 모든 백성들이 토지를 가지는 토지 사유제를 실시함으로서 국가는 엄청난 조세를 걷을 수 있었고, 이것이 철제무기를 원할히 생산할 수 있는 기본 바탕이 되었습니다. 또, 농업의 안정은 군공수작제 등을 통한 능력주의에 바탕을 둔 부병제를 완성시켰고, 진에서는 중국 전래의 전차전, 보병전에 유목민족의 기마전법까지 더한 강력한 군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또 능력에 따라 재산과 권력을 재분배하는 변법의 원칙은 국왕이 신료들을 능력별로 통제할 수 있는 매우 효율적인 것이었습니다. 더욱이 진의 근거지인 서방의 영토는 위수분지를 포함하는 그 서역으로서 훗날 국제적 도시 장안 등을 이루는 천연적 요새이자 동서무역의 요충지로서의 가치가 높았습니다. 또 진은 중원보다 후진적인 지역이라는 틀을 벗기 위해 북방문화도 적극 수용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진의 외교적인 역량도 높이 살 수 있죠. 진은 가까운 나라를 치기 위해 먼 나라와는 동맹을 맺어둔다는 <원교근공책>을 아주 효과적으로 이용하였습니다. 진의 이 외교는 소진, 장의 등의 합종연횡 등의 제자백가 이야기에 자세히 나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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