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번의 십자군 원정 : 후진 유럽이 아시아사회 수준으로 올라서다
앞 포스트에서는 십자군 원정이 이베리아 정복과 시칠리아 정복사업 등이 바탕이 된 교황의 프로젝트 사업이라고 정리해 보았습니다. 그럼 이제 실제로 십자군 원정 과정을 간략히 살펴볼께요. 1. 1차 십자군 1차 십자군은 교황 우르반 2세가 강력한 교황권을 바탕으로 가장 열정적으로 추진하였던 십자군입니다. 우선 선발대로 농민 십자군이 출정하였습니다. 이들은 교황의 말에 혹하여, 천국에 갈 수 있는 권리를 확보하기 위해서, 혹은 토지를 얻기 위해서, 혹은 자유민이 되거나 부채를 감면받기 위해 예수의 고향으로 출정한 것이지요. 요즘 TV에서 나오는 <사채광고처럼 1544-****를 누르세요. 5분안에 대출해 드립니다. >와 같은 맥락입니다. 이 때는 사회분위기가 모두 십자군 출정에 대한 환상적 광고를 때리는 분위기였습니다. <파병만, 다녀만 오세요. 당신의 삶이 달라집니다.> 같은 분위기였죠. 물론 이 농민 십자군은 선발대이자, 정찰대 개념이었고, 강력한 투르크 세력에게 일방적으로 궤멸당하고 맙니다. 농민십자군은 너무 성급했습니다. 아무런 준비도 없었고, 투르크의 강성함을 미처 깨닫지도 못한 농민들이 교황의 경고마저 무시하고 출정했다가 당한 것입니다. 교황은 실제 정예 십자군을 11세기 말 파견합니다. 이 때 출정한 세력들은 영국, 프랑스의 강력한 왕가 출신들이었습니다. 십자군 세력은 이슬람 세력이 채 준비하기도 전에 파죽지세로 몰아세웠고, 로마시대 대교구인 <안티오크>를 탈환하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였습니다. 유일하게 성공한 십자군이지요. 십자군은 그 땅에 십자군 왕국(라틴왕국)을 건설하고 갓프리를 볼드원 1세로 선출하였습니다. 그리고 교황은 약속대로 제후들에게 봉토로서 그 땅을 증여하였습니다. 이로서 1차 십자군으로 생긴 십자군 왕국은 유럽체제를 모방한 전형적 봉건국가로 성립된 것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등의 성지는 제후와 그의 기사들이 철저히 수호하였습니다. 이들은 교황의 말에 따라 종교적인 열정을 가지고, 그 땅을 지켜갑니다. 사원기시단은 순례자를 보호하였으며, 병원기사단은 약자와 노인들을 보호하였습니다. 이 당시 가장 강성했던 세력은 독일 소국의 제후들로 구성된 독일기사단이었습니다. 이들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권에 반발하면서 교황권에 빌붙은 세력들이 주축을 이루었는데, 이들은 철저한 수도원적 규약에 따라 새 영지를 다스리고, 영토를 분봉받았습니다. 이들은 청빈, 정결, 복종 등의 수도원 서약을 지키겠다고 교황에게 맹세하였고, 교황은 정복지의 교회, 요새, 영토 등을 이들에게 관리하도록 허락하였습니다. 따라서 이들은 이미 자신의 유럽 본거지에 가진 광대한 영토에, 새로운 지역의 영토를 더함으로서 거대 봉건영주화 되었습니다. 그리고 본영지와 새 영지를 통한 무역로를 만들어 상업, 금융업 등에도 적극적으로 뛰어들게 됩니다. 3. 2-4차 십자군 기세가 오른 십자군은 다시 2차 십자군을 결성하여 이슬람 왕조의 근거지인 <다마스쿠스>마저 공격하였습니다. 이슬람은 1차 십자군의 후유증으로 정비가 안된채로 겨우 겨우 다마스쿠스를 막아내고, 십자군을 격파합니다. 하지만, 유럽의 도전이 심상치않음을 깨닫은 이슬람 세력은 다시 체제를 정비하고 서유럽에 대한 반격을 시작합니다. 2차 십자군 이후 이슬람에서는 위대한 장군이라 칭송되는 <살라딘>이 등장하여 예루살렘을 다시 이슬람 세력으로 복원하고, 유럽 세력을 각지에서 격파하기 시작했습니다. 서유럽은 3차 십자군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이 때 출정한 영국의 리차드 왕과 프랑스의 루이왕은 서로 대립관계였고, 3차 십자군은 내분으로 실패하게 됩니다. 영국과 프랑스는 철수해 버렸고,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은 홀로 이슬람과 싸우려다가 죽습니다. 4차 십자군은 <이노센트 3세>시기인 12세기 말 - 13세기 초로서 교황권이 최전성기였던 시기였습니다. 이 때 교황은 <교황은 태양, 왕은 달>이라는 말을 하는 등 위대한 교황으로서 최고의 십자군을 성공시키겠다고 호언하였죠. 그러나 당시에는 이미 <십자군>의 본질은 사라진지 오래였고, 유럽의 제세력들은 <교황의 십자군 프로젝트>가 단순히 종교적 열정뿐만 아니라, 교황권 강화라는 숨은 뜻이 있었음을 간파하고 있었습니다. 각국의 왕들은 이제 스스로의 십자군을 할 지언정, 교황의 십자군에는 위세에 굴복하여 형식적으로만 치루려고 하기 시작합니다. 상인들도 3차 십자군의 참패를 보고는 십자군에 대한 경제적 지원을 망설이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이제 예루살렘 탈환보다는 자신들의 <동방무역권>을 확보하는 것이 더 중요했습니다. 상인들은 경제력을 바탕으로 교황과 합의하에, 십자군의 방향을 변경합니다. 베네치아 상인들은 십자군 원정에 대한 엄청난 경제적 지원의 대가로 달마티아 짜라시를 요구하였고, 십자군은 이제 상인들의 이익을 위해 <하느님의 뜻>과는 전혀 상관없는 지역을 공격하게 됩니다. 그리고 십자군은 이슬람이 아닌 <비잔틴 제국>으로 그 화살을 돌립니다. 독일의 제후들은 당시 비잔틴 왕위다툼에 관여하고 있엇고, 상인들은 콘스탄티노플의 동방무역권을 원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세속제후와 상인의 이익을 위해 4차 십자군은 <비잔틴>으로 출격하였고, 비잔틴을 점령하였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라틴제국이 아니라, 비잔틴의 <라틴제국>을 성립합니다. 이 사건으로 비잔틴 사회는 엄청 큰 충격을 받습니다. 서유럽은 동유럽의 친구가 아니였던 것입니다. 크게 배신당한 것이지요. 베네치아 상인들은 콘스탄티노플, 크레타섬 등 주요 무역 항로를 장악하였고, 그리스 본토에는 서유럽식 봉건국가가 성립되었습니다. 그러나 명분도 없고, 비잔틴을 점령한 후 제국을 유지할 중심세력도 없었기에, 이 비잔틴의 <라틴 제국>은 비잔틴의 구세력과 토착민들에 의해 반백년도 못가 사라지고 맙니다. 비잔틴은 다시 부활합니다. 4. 5 - 7차 십자군 5차 십자군부터는 이제 십자군이라고도 볼 수 없는 세속적인 이해관계에 의하거나, 형식적인 십자군으로 전락합니다. 이제 점점 각 국왕으로부터 군을 차출할 수 없게 된 교황은 소년들을 모아 소년 십자군을 보내기도 했답니다. 교황은 어린 소년들에게 <신의 계시>를 받았다면서, 그들에게 축복을 내리고 성지를 탈환하도록 독려했습니다. 소년들은 신의 가호아래 용감했지만, 강대한 이슬람 세력을 이길 수 없었지요. 소년들이 전쟁에 질 때 마다 상인들은 <신의 가호도 지키지 못하는 어리석은 아이들>이라며, 패배한 소년들을 노예로 팔아서 이득을 챙기기도 했답니다. 5차 십자군은 이제 이집트로 발길을 돌린 십자군이었습니다. 물론 지중해 상권과 식민사업이라는 정치적 논리가 연계된 십자군이었죠. 당시부터는 이미 교황은 십자군의 중심이고 유럽사회의 태양이나, 지는 태양이라는 인식이 강해진 시기였습니다. 십자군의 중심은 제후와 상인들이었습니다. 이집트 원정은 실패하고 맙니다. 6차 십자군은 교황이 독일황제 <프리드리히 2세>와의 약속 때문에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교황은 교황권의 힘으로 <프리드리히 2세>가 황제가 되는 것을 밀어주면서 그 대가로 십자군 원정을 적극적으로 해 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프리드리히는 아주 성이없이 십자군 출정을 미루고 미루다가 교황의 독촉 때문에 어쩔수 없이 원정을 떠납니다. 하지만 그는, 교황의 요구대로 이슬람을 격파하는 쪽의 방법은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교황에게 요구한 약속은 오로지 <예루살렘>에 대한 성지탈환이었으므로, 그는 협상을 통하여 이슬람과 전쟁을 하지 않고 성지인 <예루살렘>을 임대하여 돌아옵니다. 어찌되었든 교황과의 약속은 지킨 것이지요. 그러나, 이렇게 어설프게 획득한 예루살렘은 이집트계 마물루크 용병들에 의하여 바로 빼앗깁니다. 7회 십자군은 프랑스의 성왕 루이왕을 중심으로 종교와 도덕적 열정을 되살리고자 시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성왕 루이는 이슬람의 포로가 되는 수치만 겪고 십자군은 이제 종료됩니다. 더 이상 이슬람과의 싸움은 소모전일 뿐, 그들을 격파한다는 것은 <교황>이 약해진 이후에는 의미가 없게 된 것이죠. 5. 십자군의 의미 십자군은 성지회복이라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실패한 원정이었습니다. 그러나 비록 원정은 실패했다 하더라도 유럽이 얻은 것은 많았습니다. 후진적이었던 유럽사회가 서진문물을 얻었고, 중국-인도-이슬람이라는 세계 3대 무역권에 동참하게 되는 계기가 마련되었습니다. 이 후 유럽은 세계사라는 무대에 후발주자로 뛰어들어서 이미 체계가 잡혀있던 아시아의 선진사회체제에 동참하게 됩니다. 당시 14세기 이전까지의 세계경제는 중국-인도-이슬람 사회가 약 80% 정도의 시장을 장악하고 있었고, 비 동반구 사회가 20%를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서유럽사회는 가장 열악한 자급자족적인 봉건사회로 더 큰 사회로 눈을 돌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십자군 전쟁을 통하여 유럽사회는 이제 동반구로 눈을 돌리기 시작합니다. 유럽이 보기에 동부 아시아, 특히 인도와 중국은 향료와 자원이 가득하고, 선진적인 문명으로 이루어진 환상의 나라였으니까요. 13세기에 이르러서야 유럽은 이븐바투타, 마르코폴로와 같은 여행가들이 동반구를 여행하면서, 아시아의 선진문물을 소개하기 시작합니다. 십자군 전쟁은 유럽 사회에 직접적인 변화도 크게 초래합니다. 우선 200년에 이르는 전쟁의 결과, 원정의 실패로 교황권은 급속히 붕괴됩니다. 전쟁에 참여했던 영주권도 몰락하고, 기사계급 역시 몰락하였습니다. 교황권이 몰락하자 상대적으로 왕권은 강화되었습니다. 그리고 전쟁을 통하여 무역로를 개척할 수 있었던 상인계급은 급속히 성장합니다. 이것은 농업사회를 기반으로 하는 지역적인 구세력이 몰락하고, 상업사회를 기반으로 하는 세력들과 중앙집권을 추구하는 고전적 국가개념이 등장함을 의미합니다. 특히 십자군으로 얻은 것은 <동방무역>을 통해 유럽사회가 발전할 수 있다는 새로운 인식이었습니다. 십자군은 지중해 무역을 부활시켜 주었고, 비잔틴과 이슬람의 선진문물을 유럽에 소개시켜 주었으며, 농촌사회를 대신할 도시 사회가 등장하게 된 계기가 된 것입니다. 유럽 근대인들은 르네상스의 배경을 그대 그리스, 로마 문화의 부활이라는 관점에서 보면서 유럽 스스로의 힘으로 근대가 일어섰다고 말하지만, 이건 명백한 오류입니다.(그 오류를 교과서에 그대로 싣고 있는 한국 세계사도 오류입니다.) 유럽인의 르네상스는 십자군 원정 이후, 지중해를 중심으로 한 아시아 무역과의 연계 속에서 발전한 측면이 더 크다는 것을 왜 묻어두는 것인가요? 너무 서구적 관점에서만 유럽사를 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실제, 2010년부터 제시되는 새로운 세계사 교과서와 동아시아사 교과서에서는 유럽중심이 아닌 전세계의 다양한 문물 교류를 통한 세계사, 즉 <간지역적 접근>에 의한 세계사 교과서가 나온다고 합니다. 기대하고 있습니다. 십자군으로 보통 교황권이 쇠퇴한다고 말하지만, 사실 교황권은 십자군이 진행되는 중기부터 이미 쇠퇴하고 있었습니다. 교황권의 쇠퇴는 십자군으로 가속된 정도이고, 실제로는 12세기 이후 각국의 왕권이 서로 각축전을 벌이면서 강화되는 과정에서 교황권이 쇠퇴된 측면이 더 크게 작용했습니다. 이제 십자군으로 유럽사회는 새로운 세계와 직접 대면하였고, 세계 속의 유럽이라는 인식을 분명히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유럽세력은 이슬람 세력에 막혀 중국, 인도 문화권과 접촉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나온 하나의 해법이 이슬람을 피해 다른 문명권과 접촉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거나, 지구 반대편으로 돌아가거나 하는 시도가 그것이었죠. 이것은 유럽인의 모험심의 발로가 아니라, 유럽 세력이 그만큼 선진문물에 대한 수용과 자원 보급(향신료 등)에 대한 절박감이 있었다는 것을 반증합니다. 자 그럼 십자군은 이정도로 정리하고, 다음부터는 중세 유럽이 후진적 울타리를 벗어나, 아시아 사회와 대등한 위치까지 올라서는 14-16세기의 역사를 살펴보도록 하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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