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퀴즈풀이/히스토리아 역사 스토리

중국사 이야기 35 - 한 무제 사후 내외조의 대립과 전한의 멸망

중국사 이야기 35 - 한 무제 사후 내외조의 대립과 전한의 멸망

이번 장에서는 한무제가 죽은 직후 황제권의 약화와 전한의 멸망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어보죠.

1. 한무제가 만든 외조, 내조의 문제점

한무제는 자신의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기존 국가 지배 기구인 진시황제 이래의 외조를 통제하였습니다. 즉, 황제권에 도전할 수 있는 강력한 외조 기관인 3공을 통제한 것이지요. 따라서 승상(재상), 어사대부(감찰), 태위(군사)라는 삼권은 이전보다는 상당히 약화된 기능을 수행했습니다.

반면, 황제는 자신의 최측근에서 일할 수 있는 비서기관인 상서, 중서라는 기관의 <시중>의 권한을 느렸습니다. 무제는 자신들의 측근인 조신(상서, 중서, 중시)들과 국사를 의논하여 처리하였고, 이러한 황제 측근 기관을 흔히 <내조>라고 합니다. 한무제의 <내조정치>는 강력한 황제와 그 측근 비서들로 이루어지는 정치로, 외조인 승상 등은 행정실무를 담당하는 정책집행기관 정도의 역할에 머물게 됩니다.

그러나 한무제가 죽은 뒤 큰 문제가 발생합니다. 이 내조, 외조로 나눈 정치는 황제가 내조, 외조를 완전히 장악하지 못할 경우, 내분이 일어날 소지가 크다는 점을 한무제가 간과한 것이지요.

2. 염철 논쟁

이제 어리석은 황제, 나이어린 황제들이 한무제의 뒤를 잇게 되면서 전한 특유의 내조, 외조 다툼이 시작됩니다.

그 첫 시작이 바로 유명한 <염철논쟁>입니다. 염철논쟁은 한무제가 죽은 바로 뒤, 내조의 인물들이 외조를 공격하면서 시작됩니다. 내조의 곽광은 외조의 어사대부 상홍양이 한무제 시절에 실시한 전매제도, 평준법, 균수법 등의 모든 조치들이 상공업을 통제하는 정책으로 폐단이 많음을 지적하였습니다. 내조의 곽광은 상업가들과 귀족세력의 지지를 바탕아로 자유 경제를 주장하였고, 귀족의 토지소유를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반면, 한무제의 신임을 받았던 상홍양은 전매제도와 국가통제정책들이 한무제 시기 국가 부강의 기반이었다고 주장하면서 국가사업들은 꼭 필요함을 주장합니다. 이 염철 논쟁은 처음에는 <소금과 철을 국가가 전부 전매하는 것이 바람직한가?>라는 학문적 성격도 가진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내조와 외조의 주도권 싸움이었습니다.

이 주도권 싸움에서 내조가 승리함으로서 한나라의 정치는 <내조>가 장악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후 선제 등이 왕권 강화를 위해 <외조>에 힘을 실어주면서 외조가 내조와 동등한 위치를 갖게 되기도 하였고, 이러한 과정 속에서 전한은 발전하고 있었습니다.

3. 내조정치가 학자들의 기관이 아니라, 환관의 거처가 되다

한나라 시대에는 한무제 사후에 이상하리만큼, 나이어린 황제들이 즉위하게 되면서 외척 세력이 강해졌습니다. 이 외척 세력이란, 황제의 어머니(모후)를 중심으로 외가 세력, 황제의 부인(황후)를 중심으로 한 처가 세력을 말하는 것으로, 황제가 나이가 어릴수록 외척인 외조부, 외삼촌 등의 입지가 강해지는 상황이 발생합니다. 실제 한나라에서 황제들의 절반은 외척세력이 득세하는 시기를 겪었습니다.

황제들은 나이가 들어 스스로 정치할 시기가 되면 이 외척세력들을 견제하려고 하였고, 그 때마다 내조에 <환관>들을 측근으로 심어 외척을 견제하려 하였습니다. 궁정에 외척이 득실대므로, 황제가 이들 외에 자기 세력으로 끌어들일 자들은 거세당한 채 궁중에서 잡일을 하는 <환관>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되니, 한나라 후기에는 내조와 외조의 싸움 이외에 외척과 환관의 싸움이라는 것이 더 큰 문제거리로 대두하였습니다. 실제 황제 측근인 내조를 환관이 장악하면, 국가행정기관인 외조를 외척이 장악하면서 서로 다투는 형세였던 것입니다.

실제 전한기에는 외척이 환관보다 강했지만, 후한이 건국된 이후에는 환관이 외척보다 강했습니다. 따라서 전한은 외척에게 멸망하였고, 후한은 환관에 의해 멸망하게 됩니다. 그러나, 한 대에는 아직 군신윤리라는 유교덕목과 한무제 이후 황제에 대한 강렬한 인상이 남아있던 시기라 외척이나 환관이 황제를 마음대로 폐립하고 하지는 못하였습니다. 신을 건국한 왕망도 황제를 폐립하고 한을 이어간 것이 아니라, 새로운 국가를 천명하면서 <혁명>을 일으킨 것이지요.

결과적으로 보면 전한의 멸망은 한무제의 내조정치 때문에, 이후 외척과 환관이 외조, 내조에서 대립하는 결과를 낳았으며, 결국 외척 왕망에 의해 국가가 멸망하게 된 것입니다. 즉, 최고의 전성기였던 한무제의 강력한 정책은 한의 멸망으로 이어지는 정책이 된 것이지요.

이 글에 대한 참고사항

1. 이 글에 대한 관련 사료는 이 사이트 검색창에서 자유롭게 검색가능합니다.(관련 검색어로 검색하세요)
   2. 이 글을 운영자 허락없이 불펌할 경우 티스토리에서 제공하는 <CALL BACK>기능이 자동으로 삽입됩니다.
   3. 네모칸이나 밑줄이 삽입된 단어 단어를 클릭할 경우 사이트 내 연계된 포스트들이 자동 출력됩니다.
   3. 관련 글 모음
방 : http://historia.tistory.com/category/동양사이야기/중국사이야기

<http://historia.tistory.com 역사전문블로그 히스토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