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 이야기 38 - 왕망의 신(AD. 8~23)
이번 장에서는 짧지만 역사적 의의가 꽤 있는 왕망의 신나라에 대한 중요 개념들을 짧게 포스팅 해보겠습니다. 1. 신 건국의 배경 왕망은 외척출신입니다. 신이 건국된 배경을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한나라의 내조와 외조가 서로 대립하는 가운데, 끊임없이 투쟁하던 외척과 환관 세력의 다툼이 곧 신의 건국 배경입니다. 왕망은 이 싸움에서 환관을 몰아내고 외척으로서 새로운 나라인 신을 건국한 것이지요. 자세히 볼까요? 왕망의 이복동생인 왕씨가 왕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엔 황후가 되어 버렸죠, 왕망과 그녀의 여동생인 황후는 최고의 위치에 올랐습니다. 당시 왕인 성제는 황황후의 아들로서 왕망의 사촌이었습니다. 성제는 외척 중 4명을 뽑아 돌아가면서 정치를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왕망은 당시 아버지가 일찍 죽어서 후원자는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성제 다음으로 성제의 조카인 애제가 등극했는데, 이 애제는 왕씨가문이 아닌 관계로 왕망을 파면해 버렸습니다. 그러나 애제가 빨리 죽고, 평제가 즉위하면서 왕망은 평제의 황후를 자신의 딸로 만들었습니다. 왕망의 최전성시기가 온 것이죠. 하지만, 평제도 빨리 죽어서 왕망은 또 다시 정치적 위기가 왔습니다. 왕망은 2살인 영을 황제로 뽑아 그 위기를 극복하고, 반대파 귀족들을 모두 제거해 버립니다. 그리고 왕망은 한의 국운이 다하여, 새로운 왕조가 건국해야 한다는 음양오행설을 대대적으로 선전합니다. 즉, 수금토화목의 우주 순행에 따라 새로운 왕조가 필요하므로, 자신이 백성을 위해 왕위를 물려받아 새 왕조를 개창하겠다는 것이죠. 그는 <신>을 건국합니다. 2. 주례체제를 모델로 한 이상국가를 선포하다 왕망의 신은 특이하게도 <주례체제>에 입각한 이상국가를 재건하려고 했습니다. <주례>체제란 중국 주나라의 주공 단의 이상을 실현하는 제도로서 유교윤리에 의한 국가 건설, 봉건제도를 통한 중화질서 확립, 국가주의적 부국강병을 위한 제도 개혁 등을 포함하는 체제를 말합니다. 이 체제는 유교이념을 통한 사회질서 확립인 듯 하면서도, 실제로는 국가주의적이고 법가주의적인 통제가 상당히 강한 체제였습니다. 이 <주례체제>는 국가가 유교이념을 장악함으로서 모든 사회제도를 국가주의적으로 개혁함을 원칙으로 하였는데, 이러한 통제정책은 당시 지방분권적이던 대지주, 대상인 등 호족화된 세력들의 대대적인 반발을 불러올 수 있었던 제도입니다. 3. 주례적 개혁을 시작하다. 그럼 실제 개혁 내용을 볼까요? 일단 토지제도의 개혁부터 시작합니다. 이것은 주나라의 <정전졔>를 모델로 하여 국가가 토지를 장악하는 토지 공유제적 개념의 개혁입니다. 이 정전제를 모델로 한 왕망의 토지제도를 <왕전제>라고 합니다. 왕전제는 호족들이 대토지를 소유하는 것을 일체 금지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토지의 소유를 제한하여 호족이 많은 토지를 못가지게 하는 제도이죠. 이 제도는 <완전한 토지 공유제>라는 설과 <무분별한 토지 소유의 일정한 상한선 제한>이라는 2가지 학설이 있는데, 어느 쪽이 맞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다음으로 사속제도가 있습니다. 사속제도는 호족이나 대토지 소유자들이 임의로 인신매매를 시도하는 것을 금지한 법입니다. 물론, 노예제도의 완전한 폐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제도를 실시함으로서 일반 백성이 노예가 되는 것을 막을 수는 있었습니다. 국가 입장에서 백성이 노예가 된다는 것은 국가 세금을 걷을 주체가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하고 반대로 지방 호족(대토지 소유자)이 강해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속제도는 엄격하게 시행하려 했었습니다. 다음으로 철저한 국가주의적 상업통제 정책으로 오균, 육관제가 있습니다. 오균제란, 중요도시에 오균사시사라는 기구를 설치한 다음, 상공업을 국가기관이 철저히 관리하는 제도입니다. 세금을 징수하거나, 물가를 통제하는 것을 국가가 도맡아서 함으로서 상권의 이익을 국가의 이익으로 돌리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물론 대상인들은 크게 반발합니다. 한무제 때의 균수-평준법을 좀더 구체적으로 실시한 것이라 보면 됩니다. 육관제란, 한무제 때의 <전매제도>와 비슷한 개념입니다. 소금, 철, 술, 화폐주조 등을 모두 국가가 전담함으로서 국유독점체제를 완상하는 제도를 말합니다. 이를 위하여 왕망은 계속적으로 화폐개혁을 단행햇는데, 너무 많은 화폐제도 개혁의 실시로 돈의 가치와 효용성이 많이 떨어졌고, 돈의 신용도가 없어서 오히려 국가적 혼란을 초래했다고 합니다. 4. 주례적 외교질서를 확립하다. 주례적 외교질서란, 주변국에 대하여 <중화사상>을 강요한 외교질서를 말합니다. 주나라 시대에도 주는 <천자국>, 주변 이민족은 <오랑캐국>이라는 인식이 있었는데, 이것을 왕망이 확장한 것이지요. 왕망은 자국의 모든 지역을 유교적 명칭으로 바꿉니다. 관직과 관제, 관명 등 모든 국가 행정 기관의 명칭도 유교식으로 바꾸어 자신의 국가가 곧 <유교적 중화 국가>임을 천명합니다. 그리고 주변 국들에게는 중화사상의 외교를 강요합니다. 자신이 <황제>이므로, 주변국들은 영토를 분봉받은 제후국으로서 <왕>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변국들 안의 소국은 자신의 입장에서는 작은 제후가 되므로 <후>라고 부를 수 있겠죠. 이렇게 용어를 정리하고 나서는, 주변국들은 천자국은 왕망의 영토에 와서 <조공>을 바쳐야 합니다. 주변국이 조공을 바치면 왕망은 유교이념에 따라 주변국을 <책봉>하여 서열을 정해줍니다. 이것이 바로 주례적 중화질서에 입각한 조공-책봉의 관계입니다. 이 조공, 책봉의 관계는 이후 모든 중국 국가에서 이민족이라 부르는 국가와 관계를 맺을 때 쓰는 전통적 외교 방식이 되었습니다. 여기에 코웃음을 보이며 기도 안찬다고 반발한 자들이 흉노족입니다. 흉노족은 짜증이 났습니다. 중국은 전통적으로 주변민족들을 업신여겨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활을 잘쏘는 민족의 <동이>라는 말은 <동쪽의 오랑캐>라는 한자어로 해석하고, 남부 민족은 <남만 : 남쪽의 오랑캐>, 서쪽의 민족은 <서융 : 서쪽 오랑캐>, 주나라 시대에는 <견융 : 하찮은 놈들 또는 개같은 놈들> 등으로 자의적인 한자해석을 합니다. 흉노는 <흉칙한 노예놈들>, 선비는 <비루한 족속들>, 저갈강 족등은 <동물같은 놈들>로 멋대로 한자를 바꿔 해석하곤 하죠. 당시 주대의 주례 체제에 입각하여 주변 민족을 격하시키는 움직임이 있자, 전통적으로 중국과 대립하던 흉노가 대대적으로 반항을 합니다. 왕망은 흉노 토벌을 위해 진시황, 한무제 등이 했던 방식으로 토벌에 나섰지만, 참패하고 맙니다. 중국 역대 왕조 중에 흉노족을 크게 토벌했던 황제는 없었습니다. 당시 북방문화권이 중화문화권을 비웃을 만한 위치가 되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죠. 5. 진시황제의 국가처럼 허망하게 단명하다 왕망의 신은 아주 짧게 단명한 왕조가 됩니다. 그 이유는 진시황제가 당시 지배세력들과 크게 대립하였던 것과 별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왕망이 실시했던 토지국유화 제도, 사속제도, 상업통제제도 등은 당시 크게 성장하고 있던 호족세력, 대상인 등 기득권 세력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었습니다. 전한 대 후반이후 대토지를 가진 호족들이 성장하고 있던 것은 시대적 대세였는데, 이 대세를 무리하게 혼자 <고루한 주대 방식>으로 눌러보려고 했던 것입니다. 호족들은 왕망이 한의 황제를 죽인 찬탈자이자, 도덕적으로 약점이 있는 유교사상의 이방인이라며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왕망이 성급하게 사회모순을 해결하려고 발버둥칠수록 호족들과 대상인들은 크게 반발하였습니다. 그는 결국 왕조찬탈의 독재자라는 낙인이 찍힌 채 남방호족인 유수가 중심이 된 호족연합세력에 의해 죽음을 당하게 됩니다. 6. 신의 역사적 의의는? 신나라도 나름의 역사적 의의가 있습니다. 먼저, 주대의 체제를 복고하여 국가주의적 사회건설을 추진하려고 했다는 점입니다. 비록 왕망은 악인으로 항상 묘사되곤 하지만, 그의 체제 복고 개혁은 훗날 국가가 위기에 빠졌을 때 어김없이 등장하는 사회 체제 개혁의 모델이 되곤 합니다. 조선의 건국기에도 부국강병을 위한 <주례체제>에 입각한 개혁이 있었습니다. 또 그는 음양오행설과 참위설을 바탕으로 한이 기울어 새로운 천명의 신이 등장했다는 여론 정치를 실시한 인물로도 유명합니다. 즉, 동중서의 천인상응설과 오행설, 맹자의 혁명론을 교모히 묶여 왕조 개창의 이론을 완성하였고, <선양>이라는 평화적인 왕위 계승을 통해 새 왕조를 열어습니다. 후대 조조의 아들 조비부터 시작된 <선양>이라는 평화적 왕조교체는 그가 사상적으로 정립하였고, 음양오행과 참위설을 통한 혁명론은 고대의 혁명론을 종합한 것에 의의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신의 가장 큰 역사적 의의는 <전한>의 내조, 외조를 통한 국가중심의 중앙정치사회가 <신>왕조를 기점으로 <호족중심적 지배체제>로 전환되었다는 점입니다. 신을 멸망시킨 호족연합세력들이 사회전면에 부상함으로서 <후한>시대는 호족들이 마음껏 나래를 펼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된 사회로 나아가는 역사성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
이 글에 대한 참고사항
1. 이 글에 대한 관련 사료는 이 사이트 검색창에서 자유롭게 검색가능합니다.(관련 검색어로 검색하세요)
2. 이 글을 운영자 허락없이 불펌할 경우 티스토리에서 제공하는 <CALL BACK>기능이 자동으로 삽입됩니다.
3. 네모칸이나 밑줄이 삽입된 단어를 클릭할 경우 사이트 내 연계된 포스트들이 자동 출력됩니다.
4. 관련 글 모음 방 : http://historia.tistory.com/category/동양사이야기/중국사이야기
<http://historia.tistory.com 역사전문블로그 히스토리아>
'퀴즈풀이 > 히스토리아 역사 스토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중국사 40 - 황건적의 난과 후한의 멸망 (0) | 2007.03.16 |
---|---|
중국사 39 - 후한의 건국과 멸망에 대한 이야기 (1) | 2007.03.16 |
중국사 이야기 37 - 한나라 시대의 제도사 : 중국엔 자사? 조선엔 관찰사! (0) | 2007.03.15 |
중국사 이야기 35 - 한 무제 사후 내외조의 대립과 전한의 멸망 (1) | 2007.03.15 |
7번의 십자군 원정 : 후진 유럽이 아시아사회 수준으로 올라서다 (1) | 2007.03.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