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퀴즈풀이/역사 사료와 데이터

고려시조 - 태조 왕건


출생과 초기의 이력

성은 왕(王). 이름은 건(建). 자는 약천(若天). 아버지는 금성태수 융(隆)이며, 어머니는 한씨(韓氏)이다. 송악(개성)에서 출생하였다.

후삼국시대에 궁예(弓裔)가 한반도 중부지방을 석권하고, 철원에 도읍을 정하자 궁예의 부하가 되었다. 왕건은 궁예의 명령으로 군대를 이끌고 군사활동을 하여 큰 공을 세웠다. 즉, 900년에는 광주(廣州), 충주, 청주 및 당성(唐城: 지금의 南陽), 괴양(槐壤: 지금의 槐山) 등의 군현을 쳐서 이를 모두 평정,  그 공으로 아찬(阿飡)이 되었다.

903년 3월에는 함대를 이끌고 서해를 거쳐 후백제의 금성군(錦城郡)을 공격, 이를 함락시켰다.
그리고 그 부근 10여개 군현을 쳐서 빼앗아 나주를 설치, 군사를 나누어 이를 지키게 하고 돌아왔다.
이해에 양주수(良州帥) 김인훈(金忍訓)이 위급함을 고하자, 궁예의 명을 받고 달려가 구하여 주었다.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하여 왕건은 궁예와 주위의 신망을 얻게 되었다.  이해에 그동안 쌓은 전공으로 알찬(閼飡)으로 승진하였고, 913년에는 파진찬(波珍飡)에 올라  시중(侍中)이 되었다.

고려의 건국

그뒤 궁예의 실정이 거듭되자, 홍유(洪儒), 배현경(裵玄慶), 신숭겸(申崇謙), 복지겸(卜智謙) 등의  추대를 받아, 918년 6월 궁예를 내쫓고 새 왕조의 태조가 되었다.  철원의 포정전(布政殿)에서 즉위하여 국호를 고려(高麗), 연호를 천수(天授)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많은 난관이 가로놓여 있었다. 먼저, 안으로는 왕권에 도전하는 적대세력에  대처하여야만 하였다.  환선길(桓宣吉), 이흔암(伊昕巖) 등의 반역사건 등이 그것이다.

또한 민심을 수습하고 호족세력을 회유, 포섭하는 대책을 강구할 필요가 있었다.  이와 함께 밖으로는 강대한 후백제 견훤(甄萱)의 세력에 맞서 싸워야만 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어려운 과제에 기민하고 탄력성있게 대처해 나감으로써 난국을 극복하여 나갔다.    태조가 즉위 초부터 가장 역점을 둔 국내정책은 민심 안정책이었다.   따라서, 신라 말기 이래 크게 문란하여진 토지제도를 바로잡고, 궁예 이래의 가혹한 조세를 경감하는 제도적 조처를 취하였다.  취민유도(取民有度)의 표방은 그 구체적인 예가 될 것이다.

이와 동시에, 신라 말기 이래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등장한 호족세력을 회유, 포섭하는 적극적인 대책을 세워나갔다.  각 지방의 유력한 호족들의 딸과 정략적으로 혼인하였으며, 각 지방의 호족 및 그 자제들을 우대하는 정책을 펴나갔다.

태조는 후삼국시대의 지배세력인 궁예나 견훤에게서는 볼 수 없는 새로운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는  정치적 역량을 지니고 있었다.  짧은 기간 동안에 어느 정도 새 왕조의 왕권을 안정시킬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역량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919년 1월에 개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신라, 후백제, 고려의 후삼국 관계가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것은 920년부터였다.
태조는 신라에 대하여 친화정책을 썼다.  이해 10월에 견훤이 신라를 침범하자 신라에 구원병을  보냈으며,  이에 따라 후백제와 고려는 서로 적대 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그는 후백제와 결전하여  이기기 위하여서는 신라와의 친선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초기에는 후백제와의 관계에 있어서 화전(和戰) 양면정책을 썼다.    이처럼 신라·후백제와의 미묘한 관계 속에서 새 왕조의 안정과 국력신장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대체로 후백제와의 군사적 대결에서 고려는 열세를 면하지 못하였다.
후백제는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 일원에 대하여 군사적 압박을 가중시키고 있었다.   고려와 신라의 통로를 차단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려로서도 이 지역을 사수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따라서 이 지역에서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었다.

후삼국 통일

930년 태조는 고창(古昌: 지금의 안동지방) 전투에서 견훤의 주력부대를 대파함으로써 비로소  군사적 우위를 차지하였다.

935년 후백제의 왕실 내분으로 왕위에서 축출된 견훤을 개성으로 맞아 들여 극진하게 대우하였으며,  또 같은해 10월에는 신라왕의 자진항복을 받게 되었다.  이로써 후삼국통일의 주역이 될 가능성이 확실하여졌다.      마침내, 936년 후백제와 일선군(一善郡: 지금의 善山)의  일리천(一利川)을 사이에 두고 최후 결전을  벌여 후백제를 멸하고 후삼국 통일의 위업을 달성하였다.

저술

태조는 통일 직후 《정계 政誡》 1권과 《계백료서 誡百寮書》 8편을 친히 저술하여 반포하였다.

이 저술들은 새 통일왕조의 정치도의와 신하들이 준수하여야 될 절의를 훈계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나 현재 전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죽기 얼마 전에는 대광(大匡) 박술희(朴述熙)를 내전으로 불러들여 〈훈요십조 訓要十條〉를  친수(親授)하여 그의 후계자들이 귀감으로 삼도록 부탁하였다.    이 〈훈요십조〉는 그의 정치사상을 엿보게 하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시호는 신성(神聖)이며, 능은 현릉(顯陵)이다.

<창닫기>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