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운동에 대한 국외 기사
북경에서 당지에 보내 온 통보에 의하면 조선 소요에 대해 일본이 공표한 것보다 한층 더 격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즉, 이제는 조선 전토를 통틀어 모든 계급이 독립 운동에 참가했다. 일본 관헌은 3월 3일 고종 황제 국장날 소요가 일 것에 대비하여 조선 전토 각지에서 헌병을 경성으로 소집하여 대대적으로 준비에 임했다. 조선의 독립 운동가는 이 사실을 알고 선수를 써, 3월 1일을 기하여 조선 각지의 도회·시골을 막론하고 일제히 독립 운동 시위를 전개했다. 이에 일본측은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크게 놀랐다. 그러나 일본 관헌은 급속히 그 진압에 나서서 강경한 태도로 수천의 시위 운동가들을 체포했다. 일본 관헌은 독립 운동에 참가하지 않은 평양 장로파의 종교 학교 학생 일단을 체포하고 그들의 옷을 난폭하게 벗겨 크리스트가 십자가상에 못 박힌 것과 같이 그들 또한 그렇게 되어야 마땅하다고 외치며 고통을 주었다. 이제 일본인은 조선 독립 운동을 진압했다고 소리 높이 외쳤으나 이면에서는 조선 전국민을 모조리 격분 속에 몰아 넣은 것이 되었다. 우리는 파리 강화 회의에서 일본이 일정한 조건으로 조선에게 독립을 부여할 것을 절실히 바란다. 그 조건이란 조선이 스스로 독립 정부를 이루어 정치를 할 수 있을 때까지 일본의 권고에 따를 것을 요건으로 하고 있다. [ 뉴욕 타임스(3월 13일 발행) ] 재경성 한자 신문(在京城韓字新聞) 통신원의 보도에 의하면 3월 1일부터 4월 1일까지의 소요 때문에 생긴 한인 사상자 수를 정확하게 계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 하면 일본 정부는 그 사실을 은폐 발표할 방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백 군데의 통신을 종합한 우리 숫자는 진실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소요는 그 범위가 광대하고, 최근 일본 군대의 잔학성은 극에 달했다. 즉 총살된 자, 찔려 죽은 자의 총수는 3천 7백 30여 명이며 부상했다가 사망한 자는 4천 6백 명이다. 합계가 8천 3백 30여 명이다. 또 감옥 안에서 죽은 자가 다수일 터이나 정확한 숫자를 알 수 없다. 또 체포 수감된 자가 2만이 넘는다. 일본 군대에게 학살당한 이 한인들은 전혀 무장하지 않은 주민으로 그저 태극기로 만든 종이 모자를 쓰고 조선 독립 만세를 불렀을 뿐이다. 그런 데 그와 같은 만행을 입은 자는 남자뿐만 아니라 부녀자에게까지 미쳤다. 학살당한 대다수는 의사의 치료가 미치지 않은 벽촌 사람이었다. 한자 신문 통신이 어느 정도 신용이 있는 지는 모르나 외국인의 전보에 의하면 한 번에 백 명 혹은 천 명이 무참히 학살되었다. 또 다른 외국인의 보고에 따르면 최초의 일주일 동안에 107명이 학살되고 15군데의 교회가 파괴되었다. 현 하세가와 조선 총독은 10년 전 한인을 정복할 때 1만 4,000명의 한인을 학살했으므로 이 때 6천의 군대 증원과 함께 10년 전의 ‘기록’을 깨뜨리겠다고 단언했다. [ 노워스치즈니 4월 17일 하르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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