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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콜라 철학 이야기 1 - 교회에 각각 다양한 교단이 성립되다

오늘부터의 유럽 중세사 포스트는 교회를 중심으로 한 <교회문화>를 다뤄볼까 합니다. 교회문화는 거의 대부분이 교단의 이야기와 스콜라 철학의 이야기가 될 것 같습니다. 십자군이나 서임권 문제 등은 별도의 시리즈로 다루었기 때문에, 여기서는 스콜라 철학을 중심으로 한 문화부분만 다루고, 다른 파트에서 빠진 교회 건축, 예술, 문화 부분만 간략히 포스팅 하겠습니다.

1. 로마 이래 거대한 계서제도를 완성한 중세 교회가 탄생하다.

중세 교회는 로마 교회의 행정-교구제도를 그대로 답습하면서 이루어졌습니다. 고대 로마의 계서제도는 <로마사 이야기>에서 자세히 다룬 적이 있습니다.

1. 교황(교황청) - 추기경(교황선출) - 대주교관구(대주교) - 주교(실질적 교회관리) - 교구(하부조직 : 도시, 농촌)
   2.  교구사제는 일반민과 접촉, 외곽에 종교회의(공의회)를 만들어 운영하고, 수도원과 교단 등에 연결됨
   3.  교황 : 군주나 제후 파문 위협, 성상금지령, 교회법에 입각한 재판권(벌금형)

중세의 교회는 11-13세기 교황권이 강화됨에 따라 초국가적 조직체로서 <신의 명령>에 따라 모든 국가 사회에 간섭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습니다. 교황에서 - 추기경 - 교구까지 이르는 거대한 체계는 지역의 행정체계와 일원화된 조직이었습니다. 교회는 단순히 종교기관이 아니라 독자적인 재판권을 가진 정치권력으로 부상하였고, 그것을 뒷받침할 엄청난 경제력을 가진 <세속 권력체>였습니다.

특히, 교회의 광대한 재산은 <교회가 중세의 지주>임을 과시할 수 있게 하는 든든한 재원이었습니다.

교회는 <신의 이름과 섭리>라는 규칙 속에서 이 규율을 어진 자들에게 엄첨난 벌금을 걷었습니다. 그리고 벌금이 아니더라도 <신의 사랑에 대한 보답>이라는 명분으로 반강제적이면서도 자발적으로 보이는 막대한 <성금 : 십일조>를 걷기도 합니다. 교회 안의 모든 교구민은 마치 국가에 세금을 내듯이 교회에 헌금을 내야했습니다. 또 성직자는 성직 첫해에 <초입세>라는 꽤 많은 돈을 교회에 바쳐야 했습니다. 또, 이러한 재력을 바탕으로 세워진 각지의 수도원들은 광대한 장원을 보유하면서 그 경제력을 더욱 넓혀갔습니다.

베네틱트 수도원 이래 클뤼니 수도원 같은 수도원 단체들은 교회를 <영적으로 보호>하고 정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도 합니다. 성직임명권이나, 성직자의 부패를 막으려는 노력이 있기도 하였지만, 이러한 운동을 하는 수도원 역시 교회의 기득권 자체를 부인하지는 못하였습니다. 오히려 수도원은 크리스트인의 지상에서의 구원매개자인 <교황청>을 적극지지하는 경우가 더 많았죠.

2.12세기  시토교단이 등장하다

12세기의 시토교단은 12세기 영국 헨리 1세의 왕권 전성기 때 등장한 수도원입니다. 이 교단은 모든 수도원들이 검소하게 생활하여 하나님의 진정한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였습니다. 그 교리는 베네딕트 교단의 청결, 복종 등을 모방하였습니다. 이 교단은 거대한 장원을 소유하는 것 등에 부정적인 입장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교단은 직접 황무지를 개간하여 교단 수입으로 활용하였는데, 이 교단이 개간하고 넓힌 토지는 실로 어마어마한 것이었습니다. <신의 노동> 속에서 시토교단은 영국 요크셔 목양지에서 영국, 프랑스를 연결하는 프랑스 북부 플랑드르 지방까지 개간하여 <모직물>을 생산하게 됩니다. 이 모직물은 중세 상업의 가장 큰 <상업 교환 수단>으로 북부 플랑드르 ~ 영국 지방을 <북부 무역 중심지>로 만드는 데 크게 기여 합니다.

사실 원래 교회는 모든 상업활동에 부정적인 입장이었습니다. 교회는 자발적인 헌금과 빈빈 구제 등을 아름다운 덕으로 삼았고, 상업을 통한 부는 더러운 것으로 간주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시토교단의 개간 사업을 통하여 이러한 인식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가장 큰 인식의 변화는 상업을 통한 <이자 개념>을 인정한 것입니다. 원래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행위를 기독교인들은 더러운 죄악이요, 악마의 놀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따라서 기독교 사회에서는 금융업 발달이 더딜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 시토교단 이후 13세기에는 다양한 상공업의 발달로 정당한 이자를 받고 금융에 종사하는 이들이 늘게 되었습니다.

특히 유대인들은 금융업에서 크게 두각을 나타내어 돈을 벌게 되었는데, 이러한 유대인들의 활동 때문에 유럽사회에서는 유대인에 대한 악감정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구약을 믿는 유대인들이 금융에 종사하는 것을 영국인들은 조롱하곤 하였습니다. 세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을 보면 <이자를 갚지 못하면, 혹은 장사를 기한내에 하지 못하면 살 1파운드를 잘라야 한다>는 유태인의 악행이 나옵니다. 이것은 상업이 발달하여 이자업을 더 이상 죄악시하지 않았다는 점과 반대로 이것으로 성장한 유태인들에 대한 반발을 동시에 보여줍니다.

3.13세기  탁발교단이 등장하여 이단을 정화하려고 하다

13세기에는 도시문화가 발달하고, 각지에 대학이 설립되면서 유럽사회에 다양성이 생기는 시기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13세기는 교황권의 절정기인 시기였습니다. 교회세력은 13세기 이후 다양해지는 사회적 현상을 철저히 막고, 교황을 중심으로 한 일원적인 복음 논리만을 전파하려고 합니다. 따라서 도시와 학문의 발달에 따라 나오는 다양한 <성경의 해석>과 <그리스인들의 새로운 생활방식>에 대하여 교회는 이단이라고 하면서 탄압합니다.

이러한 이단파의 성장 속에서 카톡릭의 순수한 복음을 지키기 위해 등장한 일련의 교단을 탁발교단이라고 합니다. 탁발이란, 쉬운 말로 하자면 <빌어먹는 수도승들>을 말합니다. 우리 식으로 하면, 스님들이 시주를 받아 먹고 사는 것과 같은 개념입니다. 따라서, 유럽의 탁발교단은 순수한 영적 믿음을 가지고, 신성한 노동에만 종사하면서 크리스트교의 교리를 수호하려는 교단을 말합니다.

이중 가장 강력한 탁발교단은 도미니쿠스 교단이었습니다. 이들이 주로 한일은 교황청의 지원을 받아 이단을 개종하는 일을 주로 하였습니다. 특히, 13세기 프랑스 필립 4세의 알비즈와 십자군 등으로 이단인 <알비즈와파>가 약해지자, 이들을 개종하는 일들을 주로 맡아했습니다. 하지만, 이단이 개종하지 않거나, 이단의 논리가 정통 논리를 위협할 정도로 체계적일 경우, 도미니쿠스는 잔혹한 <종교재판>을 통하여 이단의 뿌리를 근절하기도 합니다. 이 종교재판은 <마녀사냥>이라는 이름으로 행하여지기도 하였죠.

교황청이 인정한 탁발교단 가운데, 가장 논란이 되는 파는 프란체스코파입니다. 성 프란체스코가 만들었다는 이 파는 초기에는 상당히 <이단>적인 성향이 많은 탁발교단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연을 찬미하고, 하나님께 직접 귀의하는 믿음이 중요하다고 하는 등, 신과의 직접 대화를 강조하였습니다. 교황청은 성 프란체스코를 이단으로 규정하여 죽일 수도 있었지만, 이들을 교회 세력안에 포섭하여 다른 이단을 견제하는 데 이용하기로 합니다. 중국에서 <오랑캐로 오랑캐를 잡는다>라는 것과 같이 <이단적 성향을 가진 파>를 정통파로 귀의하게 한 다음, 이단 사냥을 하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성 프란체스코는 도시민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자연스런 믿음을 전파하고, 독자적인 기독교 체계를 가진 정통파로서 중세에 살아남습니다. 그러나, 성 프란체스코 자체가 <하나님과의 직결된 믿음>이라는 사상체계를 가진 만큼, 교황청의 입장에서는 <지상세곙서의 교황의 우월성>에 대한 반항으로 보일 우려가 많았습니다. 결국, 프란체스코가 죽은 뒤 이 탁발교단은 프란체스코의 교리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강경파와, 프란체스코의 교리를 교황청의 요구에 따라 변형한 온건파가 대립하게 됩니다. 이후, 프란체스코의 강경파는 이단으로 규정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4. 이러한 교단들은 학문 발전에 공헌하다 : 스콜라 철학의 성립

이러한 정통 기독교 정통 교단들의 성립은 12세기 이후 대학발전에 큰 공을 세웁니다. 교단은 수도원을 넘어 대학 교수를 많이 배출하였고, 대학내 자치권은 이들 교단의 교수들을 철저하게 보호하였습니다. 이러한 학문 발전은 9세기 이후 아우구스티누스의 교부 사상을 체계화하고, 중세 교황청의 논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면서 유럽 사회 전반을 <신학>적인 학문구조로 이끌어 갑니다.

또 십자군 전쟁을 겪으면서 고도로 발전된 이슬람 문화와 만나게 되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아럽어로 번역된 원전이 유입되면서 이제 학문은 새로운 전기를 맞습니다.

원래 대학의 성립 이전에는 주교성당의 부속학교인 <스콜라>에서 학문을 연구하곤 하였는데, 대학의 성립 이후에는 대학에서 자치적으로 학문을 연구하면서 이 <스콜라>의 학문을 더욱 확장시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스콜라 철학이라고 합니다.

이 스콜라 철학은 가장 큰 목표가 체계적으로 크리스트교 교리를 정립하되, 기존의 교단들의 논리와 고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어떻게 접목시킬 수 있을지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로마시대의 교부철학(아우구스티누스), 아리스토텔레스의 그리스 철학 체계, 각 교단의 정통 교리를 서로 융합시키는 것이 이 시대 학문의 사명이었고, 그것을 위해 끊임없이 논쟁하면서 학문이 발전합니다.

이 학문적 과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현실론(이성론)과 기독교의 신앙론(관념론)의 조화를 추구하는 것을 그 목표로 삼았으며, 그 속에서 중세 유럽의 유명한 논쟁인 <보편논쟁>이 시작됩니다.

그럼 다음 장에서는 본격적으로 스콜라 철학을 다뤄 보겠습니다. 그 핵심은 <보편논쟁>입니다.

이 글에 대한 참고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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