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의 정치사에 대한 개관
통일신라에 대한 구체적인 포스팅을 하기 전에 통일신라시대에 대한 개관을 해보겠습니다. 1. 전제왕권이 성립하다 신라가 삼국통일을 하면서 겪은 가장 큰 변화는 국가 운영 체제와 영토의 팽창입니다. 삼국통일은 곧 영역의 확대 뿐 아니라 인구, 생산력의 증가를 가져왔습니다. 또 통일로 인하여 유민 세력에 대한 처우 개선, 군사력의 확보, 정치적 안정의 추구, 반신라세력에 대한 탄압 등 국가적 과제가 많았습니다. 즉, 국가적으로 팽창한 생산력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그것을 통하여 새로운 과제들을 해결할 정치적 역량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신라의 왕권은 이러한 새 시대의 과업을 <왕권의 전제화>를 통해 효율적으로 해결하였습니다. 무열왕은 최초의 진골충신의 왕으로서 새 시대를 위한 체제 개선을 효율적으로 수행하였습니다. 법흥왕대 시작된 상대등 세력을 키워주기 보다는 집사부의 <중시>를 왕명 전달 기구로서 확장 개편합으로서 귀족 대표인 상대등을 누르고 진골세력을 약화시켰습니다. 특히 중시는 왕과 직접적으로 명령을 주고 받으면서, 왕의 사적인 업무도 담당하였고, 국가 기밀 업무를 직접 처리하는 등의 역할을 하면서 성장하였습니다. 단, 국가적인 위기나, 왕에 대한 국가적 불만이 있을 경우에는 <중시>를 대신 희생양으로 처단함으로서 왕권은 타격을 입지 않는 것으로 이용하기도 합니다. 무열왕은 선덕여왕, 진덕여왕의 과도적인 여왕체제를 효과적으로 이용하여, 성골시대를 마감하고 진골시대를 연 왕입니다. 특히, 무열왕은 진골 무열왕계의 독재체제를 구축하기 위하여 비담, 알천의 난을 진압하는 등 상대등 귀족 세력을 탄압하였습니다. 또 왕권과 연계되어 실력을 행사하였던 갈문왕도 이 때 폐지됩니다. 통일 후 신문왕기에는 무열왕의 전제정치를 완성하였습니다. 신문왕은 장인인 김흠돌 모반사건을 이용하여 대다수의 귀족을 제거합니다. 당시 상대등인 귀족 김군관도 김흠돌과 관련있다는 이유로 자진하였습니다. 이것은 귀족 세력을 숙청함으로서 정치 세력을 재편하고,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체계를 시작함을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신문왕기에는 중앙정치제도, 지방행정제도, 군사제도, 토지제도, 유교사상의 도입 등 국가 체제가 전반적으로 변화합니다. 이것은 신문왕에 대한 포스팅에서 자세히 다루겠습니다. 2. 신라 중대에서 하대로의 전환 신라 중대는 강력한 왕권을 구축한 시기입니다. 신문왕이 체제를 완성한 이후, 성덕왕 때에는 정전을 지급하고, 통일전쟁 후 사이가 안 좋았던 당과 친선관계로 돌아서면서 전제왕권이 절정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나, 지나친 왕권의 독재는 왕권에서 소외된 진골세력들의 불만을 가져오기 시작합니다. 성덕왕 때부터 점차 반왕파 내물계 진골들이 왕권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기 시작합니다. 이후 경덕왕기인 8c는 신라 사회 체제의 완성기였습니다. 경덕왕은 중국식 한화정책을 통해 그동한 부족한 부분이 있었던 신라의 체제를 확실히 보완합니다. 또 집사부의 중시의 명칭을 시중으로 바꾸어 왕권 밑에 복속된 기구로서의 성격을 강화합니다. 이 때 녹읍이 부활되어 반왕파 귀족들의 세력이 점차 눈에 띄기 시작하지만, 경덕왕 때의 녹읍은 국왕이 지급된 녹읍에 대한 통제권을 가지고 있어서 녹읍의 부활이 왕권에 크게 위협을 줄 정도는 아니였습니다. 문제는 경덕왕이 죽은 다음이었죠. 혜공왕 때에는 이제 친왕파와 반왕파가 적극적으로 대립하기 시작합니다. 특히, 녹읍이라던가, 국왕의 지방통제 문제, 조세문제를 둘러싸고 발생한 <96각간의 난>은 신라 사회의 지배체제를 무너뜨리기 시작한 신호탄이었습니다. 결국 혜공왕이 피살되면서, 상대당 김양상이 선덕왕으로 등극하였고, 이 때부터 반왕파 내물계가 왕권을 장악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김양상은 정권을 안정시키지 못하고 5년만에 죽었기 때문에 이 때부터 신라는 걷잡을 수 없는 내전에 돌입합니다. 이 때부터를 삼국사기에서 신라 하대로 정의합니다. 신라 하대는 상대등 김양상, 시중과 상대등을 거친 김경신 등이 왕에 즉위하면서 상대등 계열이 왕권을 장악하는 현상이 발생하였습니다. 국왕이 귀족으로서 상대등 출신 진골이었고, 그 국왕에 대하여 차기 상대등이 왕권 후보로서 왕과 제휴하거나 대립하는 형세였습니다. 이것은 신라 하대에 상대등계열과 왕계가 분화되면서 신라 지배층이 분화되는 것을 상징합니다. 특히 원성왕 김경신이 즉위하면서 시작된 원성왕계 왕권은 시작부터 유력 왕위 후보였던 김주원계의 도전을 받았고, 이것은 김헌창의 난으로 연결됩니다. 초기에 원성왕은 김주원 세력을 누를 수 없어서 내물왕계인 김주원을 강릉명주군왕으로 임명하는데, 이 때부터 국왕 외에 강력한 세력이 지방에서 독자적인 <부>를 가지고 독자적 정치력을 행사하는 군부체제(작부체제 : 부체제>가 시작됩니다. 이 김주원의 부가 바로 역사상 최초의 <부체제>입니다. 이 군부체제는 유력한 중앙귀족이 독자적 지방 기반을 가짐으로서 훗날 유력 호족으로 성장하는 기반이 됩니다. 김헌창의 난도 바로 이러한 독자적 지방 기반을 가진 상태에서 발생하였습니다. 김헌창의 난 때 김헌창이 점령한 지방 세력이 신라의 절반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8c 말 - 9c인 신라 후기에 이르면 더 이상 왕권이 귀족권에 대한 우월권을 주장하지 못합니다. 흥덕왕은 청해진을 설치하여 장보고 세력의 해상통제권을 인정하면서 장보고의 경제력에 의존하려고 하였습니다. 나말에는 왕족이 왕과 상대등으로 분열된 것을 넘어서서, 진골간의 족적 강등도 심해집니다. 왕권에 가까운 진골은 1골, 왕권과 멀어지는 귀족은 2골로 분류되면서 2골은 이제 진골혈통이 아닌 일반 관료군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 이렇게 전락한 진골은 6두품에서 치고 올라온 세력과 함께 득난이라고 불리게 됩니다. 결국 신라 말기로 갈수록 진골간의 상호항쟁이 심해지면서 새로운 사회 체제가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신라의 멸망에 농민반란 등 수많은 이유가 있지만, 근본적인 원인을 <골품제도의 모순>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러한 나말의 상황에 기인합니다. 여기서는 아주 단편적인 정치적 상황만으로 통일후 신라 사회를 기술하였습니다. 지금부터는 구체적인 통일신라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포스팅해보겠습니다. 그럼 통일 신라시대로 들어가봅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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