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건의 출생 관련 사료
호경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스스로 성골장군이라고 일컬으며 백두산으로부터 유람하여 부소산(송악) 골짜기에 이르러 자리를 잡았다. 그는 한때 죽을 고비를 맞았으나 호랑이의 도움을 받아 생명을 구하고 나중에 산신과 함께 살았다. 그러나 옛 부인을 못잊어 밤에 내려와서 아들을 낳았다. 그의 아들 강충은 예성강 영안촌의 부잣집 딸 구치의라는 처녀를 아내로 맞이하였는데 풍수장이로부터 "만약 군을 산의 남쪽으로 옮기고 소나무를 심어 바윗돌이 드러나지 않게 하면, 삼한을 통합할 인물이 나리라"는 말을 듣고 소나무를 온산에 두루 심고 그 이름을 송악군이라 고쳤다. 그는 이제건과 보육이라는 두 아들을 낳았고 보육은 형의 딸 덕주를 아내로 삼았다. 보육은 두 딸을 낳았는데 작은 딸 진의는 바다 건너온 당나라의 숙종과 하룻밤을 지내게 되고, 여기서 작제건이라는 아들을 얻었다. 작제건은 활을 잘 쏘았는데 열여섯 살이 되어 아버지를 찾아 중국으로 가는데 도중에 배가 나아가지 않았다. 뱃사람들이 점을 치고서, "마땅히 고려 사람을 떼어 버려야 한다"고 하니 작제건은 스스로 바다에 몸을 던졌다. 그때 서해 용왕이 늙은이의 모습을 나타났다. 그는 부처로 변신해 자기를 괴롭히는 여우를 물리쳐 달라고 하였다. 작제건이 부처가 나타나자 활을 쏘았더니 여우였다. 그는 여우를 물리친 보답으로 여러가지 보물을 얻고, 용녀를 아내로 맞게 되었다. 이들은 용궁에서 얻어온 돼지가 드러눕는 곳에 새집을 짓고 살았다. 작제건과 용녀는 아들 넷을 낳았는데 장남은 용건이라 하였다가 뒤에 왕융이라고 고쳤다. 그는 용모가 뛰어나고 도량이 넓어서 삼한을 통합하려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 일찍이 꿈에 미인을 보고 부인으로 삼기를 약속한 일이 있었다. 뒤에 송악에서 영안성으로 가다가 길에서 여자 한 사람을 만났는데 용모가 똑같아서 혼인을 하였다. 그러나 그의 출신을 알지 못하여 세상에서는 몽부인이라 불렀으나, 나중에 '삼한의 어머니'가 되어서 성을 한씨라고 하였다. 왕융이 송악의 옛집에서 여러 해 동안 살다가 그 남쪽에 새 집을 지으려고 했다. 그때 동리산의 승려인 도선이 당에 들어가 지리법을 알아가지고 돌아왔는데 왕융이 새로 지은 집을 보고서 말했다. "기장을 심어야 할땅에 어째서 삼을 심었는가?" 왕융이 이 말을 듣고 급히 쫓아가서 그를 만났다. 마침내 도선은 왕융과 함께 이 지역의 산수의 맥과 천문을 살피고는 "이 지맥이 북방의 백두산으로부터 내려온 명당이니 내말대로 하면 내년에 반드시 귀한 아들을 낳게 되리라"하고 예언하였다. 왕융이 그의 말대로 하였더니 곧바로 부인이 임신하여 왕건을 낳았다. - 고려사, 권 1, 태조 왕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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