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과서의 오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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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해의 지배층은 고구려인, 피지배층은 말갈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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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디다 근거를 둔 것인가
가. 일본 학자가 제시한 문헌 - {유취국사(類聚國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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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국에는) 2000리다. 주, 현, 관, 역들이 없고 곳곳에 촌리(마을)들이 있는데 다 말갈인 들의 부락이다. 그 백성은 말갈인이 많고 토인은 적다. 다 토인들로써 촌장을 삼는데 큰 촌 의 촌장은 도독이라고 하고 다음가는 촌의 촌장은 자사라고 하며, 그 이하는 다 백성들이 수령이라고 부른다. 토지는 지극히 추워 논농사(水田)에는 마땅하지 않다. 延 兩千里 無州縣館驛 處處有村里 皆靺鞨部落 其百姓者 靺鞨多 土人少 皆以土人爲村長 大村曰都督 次曰刺史 其下百姓皆曰首領 土地極寒 不宜水田 |
이것은 당나라에 간 일본 중 永忠 등이 보낸 편지 내용이다(796년 4월). 여기서 토인이란 고구려인들을 말하는 것으로 지배층은 대부분 고구려인들이고 피지배층은 말갈인이라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이 자료에 나타난 상황은 발해의 초기, 그리고 현재 연해주 지방 정도를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발해를 2000리로 본 것도 신당서에 표현한 5000리의 반도 안되고, 주 현 관 역들이 없고 마을들만 있다고 했는데 발해는 5경, 15부, 62주가 있었다(신당서)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 다. 처음 나라를 세운 지역은 오지로 인구가 많지 않았었다. 신당서에는
[땅은 사방 5천리이며 호구는 십여 만이고 승병(勝兵)은 수만이다. 부여, 옥저, 변한, 조 선 등 바다 북쪽에 있던 여러나라 의 땅을 거의 다 차지하였다]
이것이 초기의 상황이 된 것이다. 이 때는 나라를 세운 지역이 말갈인들의 지역이기 때문 에 피지배층에 말갈인들이 많았다. 그러나 인구는 약 50만 명(10여만 호)밖에 되지 않았고 오히려 대조영이 끌고간 군인들이 수 만명이나 되었던 것이다. 당시 이때 나라를 세우러 몰 려간 고구려인들이 지배충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발해는 급속히 팽창하였고, 안동도호부가 요동을 떠나 요서로 이동했을 때는 요 동반도를 포함한 고구려의 땅은 모두 발해로 편입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자료를 가지고 발해의 주민 구성을 논의할 수는 없는 것이다. |
나. 중국 학자가 제시한 문헌 - 신당서
발해의 국민들의 종족기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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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숙신의 옛땅(肅愼故地) - 상경 - 용천부 남부 중경 - 현덕부
② 예맥의 옛땅(濊貊故地) - 동경 - 용원부
③ 옥저의 옛땅(沃沮故地) - 남경 - 남해부
④ 고려의 옛땅(高麗故地) - 서경 - 압록부
⑤ 부여의 옛땅(夫餘故地) - 부여부
⑥ 읍루의 옛땅(相婁故地) - 정리부
⑦ 솔빈의 옛땅(率賓故地) - 솔빈부
⑧ 불열의 옛땅(拂涅故地) - 동평부
⑨ 철리의 옛땅(鐵利故地) - 철리부
⑩ 월희의 옛땅(越喜故地) - 회원부 |
신당서(권 219 발해전)에 나온 고구려 종족구성이다. 언뜻 보기에는 대단히 자세하고 구체적이어서 설득력 있어 보인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 깊게 보아야 할 것은 여기 나온 모든 종족이 고구려에 속해 있었던 종족으로, 고구려 705년 동안 고구려에 동화되어 실직적인 고구려 백성의 주류를 이루었던 종족들이 대부분이라는 사실이다. 고구려가 예맥을 근거로하여 나타났고 숙신, 옥저, 부여, 읍루 등은 모두 고구려에 일찍이 복속되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여기 나온 분류는 발해가 아니라 고구려를 구성한 종족들이라고 한다면 훨씬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이 기록을 보면 마치 서경 압록부만 옛 고구려 땅이고 나머지는 고구려가 아닌 것으로 착 각하도록 교묘하게 역사를 왜곡한 것이다. |
2. 발해의 인구문제를 통해서 본 종족구성 문제 |
발해는 고구려 땅을 거의 물려받았기 때문에 고구려 땅에서 살던 고구려인들은 당연히 발 해인이 된다. 고구려의 5부 175성 69만여 호를 9 도독부 42주 1백 현으로 나누고 안동도호부를 평양에 설치하여 이를 통치하게 하였다(分 五部 百七十六城 六十九萬餘戶 爲 九都督府 四十二州 百 縣 置安東都護府於平壤 以統之). 69만여 호라면 약 (69만 여호 × 5인 =) 345만 정도가 당시 고구려의 인구라고 볼 수 있다. 고구려가 망하고 발해가 서는 30년 동안 많은 고구려인들이 당, 신라, 돌궐, 일본 등으로 넘어간다. 그러나 그 수는 많아야 45만 정도일 것으로 본다. 그렇다면 옛 고구려 땅에 살고 있던 300여 만이라는 고구려인은 다 어디로 갔는가?. 비록 고구려라는 국호가 없어지고, 고씨 왕조는 무너졌지만 옛날 살던 그 땅에 그대로 살고 있었 을 것이고, 지역에 따라 시차는 있었겠지만 결국은 발해인이 되었다. 신당서 발해전에 따르 면 발해의 국토는 5경, 15부, 62주이다. 고구려 멸망 당시 9 도독부 42주였으니 6부 20주가 더 늘었다. 발해가 차지한 동북지방은 춥고 인구가 적은 곳이다. 그렇다면 옛 고구려 땅을 포함하지 않고 어떻게 고구려보다 6부 20주가 늘 수 있으며, 춥고 생산력도 낮고 인구가 작 은 연해주 지방만 넓혀 가지고 어떻게 해동성국을 이룰 수 있겠는가? 인구 밀집지역인 평 안도와 요동지방을 차지하지 못했다면 발해는 결코 해동성국이 될 수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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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 대한 참고사항
1. 이 글은 인터넷에 게재되어 오픈된 학술자료들을 출처를 밝히고 인용한 것입니다.
2. 이 글이 인용된 원문 : http://www.koguryo.org/(사단법인 고구려 연구회 사이트)
<http://historia.tistory.com 역사전문블로그 히스토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