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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풀이/역사 사료와 데이터

장보고의 난 - 능력있는 자가 귀족 사회의 권력에 도전하는 사회

장보고의 난
  "청해진의 사병을 바탕으로 귀족 사회의 권력에 도전하다."
                                                                                                                                               

   신라 말기 신라사회는 골품제가 붕괴되면서, 새로운 시대를 창출할 수 있는 세력들이 호족으로서 등장하였습니다. 호족의 유형으로는 촌주, 해상세력, 군진세력, 초적, 낙향귀족 등 여러 세력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독자적 관직과 행정체계를 갖고 대토지와 사병을 소유하였으며, 새로운 사상을 수용하고, 지방의 향도조직을 장악하는 등 준국가적인 체계를 갖추어 나갑니다. 이 후 후삼국도 이들 호족세력들에 의하여 건국되었다고 볼 수 있죠. 이 중 해상군진세력으로 거대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던 세력이 청해진의 장보고입니다.

    드라마 해신 보셨죠? 장보고의 본명은 궁복입니다. 실제 기록인 입당구법순례행기〉라는 책에 장보고(長寶高)라고 기록되어 있죠. 그의 생애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전하지 않지만 서남해안 지방의 토호 출신일 가능성이 크며, 장씨 성은 당나라에 있을 때 칭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무예에 자질이 있어 당나라로 건너가 서주의 무령군 소장이 되었고, 당에서 귀국한 뒤 828년(흥덕왕 3) 왕에게 청해를 지킬 것을 청하였습니다. 당시 서남해안에서는 당의 해적들이 신라인을 노략질하여 노비로 팔거나 무역선을 약탈하는 경우가 빈번하였는데, 그는 왕의 허락을 받아 군사 1만 명을 모아 청해진(현재 완도)을 건설하였습니다. 청해진은 7세기말에서 8세기초에 걸쳐 설치된 군진의 하나이지만 건설 당초부터 독자적인 성격이 강하였습니다. 그에게 내려진 대사라는 직명은 다른 군진의 신라의 정규 관직과는 다른 것이었다는 점이 이러한 사실을 말해줍니다.

   장보고는 청해진이 건설된 뒤 해적을 소탕하여 서남해안의 해상권을 장악했고, 당·신라·일본을 잇는 해상무역로를 통한 무역활동을 주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신라 지배체제의 외곽적 존재로서 해상무역을 통해 일종의 해상왕국을 형성한 그는 당나라에 견당매물사와 무역선(교관선)을 보내 교역활동을 하였습니다. 840년(문성왕 2)에는 일본에 회역사를 파견하여 서신과 물건을 보내기도 하였구요. 일본측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무역은 허용했고, 그 사자에게 식량을 지급하기도 하였습니다. 그의 세력은 국제적으로 국제사회에 통용될 정도였습니다.. 또한 그는 무역활동을 통해 확보한 경제력을 배경으로 중국의 산둥 성에  법화원이라는 절을 세웠습니다. 이곳에는 500석을 수확하는 장전(장원, 사원)이 속해 있었는데, 많은 승려가 머물며 정기적으로 법회를 열었고, 청해진과의 연락기관 구실도 했습니다.


   그는 청해의 경제력과 무력을 배경으로 중앙의 권력쟁탈전에도 적극 개입하기 시작했습니다. 836년(흥덕왕 11) 왕위계승분쟁에서 패한 김우징이 청해진으로 와 그에게 의탁했을 때 받아주기도 하였습니다. 838년(희강왕 3) 희강왕이 피살되고 민애왕이 즉위하자  김양은 군사를 모집하여 청해진으로 와서 먼저 와 있던 김우징을 만나 장보고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장보고는 부하인 정년으로 하여금 군사 5,000명을 이끌고 김양과 함께 경주로 진격하게 하였고,  이들은 중앙군을 물리치고 경주에 침입하여 민애왕을 살해하고 김우징을 신무왕으로 즉위시켰습니다. 신무왕은 장보고를 감의군사로 삼고 식읍 2,000호를 봉해주었는데, 이것은 진짜 지급했다기 보다 명예로운 작위를 내린 정도로 해석됩니다. 신무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문성왕은 장보고를 진해장군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진골귀족들은 그가 중앙정부에서까지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을 견재하려고 하였습니다.. 845년(문성왕 7)에 왕이 장보고의 딸을 두 번째 왕비로 들이려 했으나 진골귀족들은 그가 '해도인'(海島人)이라는 이유로 반대하여 성사되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격분한 장보고는 부패한 전골사회의 중앙정부에 반기를 들었습니다. 중앙정부는 무력으로 그를 토벌할 능력이 없었으므로 한때 장보고의 부하였던 염장(염문)이라는 자를 자객으로 보내 그를 살해하게 하였습니다. 청해진의 세력은 그뒤에도 얼마 간 유지되었지만, 851년에 청해진을 없애고 주민을 벽골군(김제)으로 옮겼습니다.

 중국 법화원의 장보고 동상


드라마 해신에서의 장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