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보고의 난 장보고는 청해진이 건설된 뒤 해적을 소탕하여 서남해안의 해상권을 장악했고, 당·신라·일본을 잇는 해상무역로를 통한 무역활동을 주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신라 지배체제의 외곽적 존재로서 해상무역을 통해 일종의 해상왕국을 형성한 그는 당나라에 견당매물사와 무역선(교관선)을 보내 교역활동을 하였습니다. 840년(문성왕 2)에는 일본에 회역사를 파견하여 서신과 물건을 보내기도 하였구요. 일본측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무역은 허용했고, 그 사자에게 식량을 지급하기도 하였습니다. 그의 세력은 국제적으로 국제사회에 통용될 정도였습니다.. 또한 그는 무역활동을 통해 확보한 경제력을 배경으로 중국의 산둥 성에 법화원이라는 절을 세웠습니다. 이곳에는 500석을 수확하는 장전(장원, 사원)이 속해 있었는데, 많은 승려가 머물며 정기적으로 법회를 열었고, 청해진과의 연락기관 구실도 했습니다. 그는 청해의 경제력과 무력을 배경으로 중앙의 권력쟁탈전에도 적극 개입하기 시작했습니다. 836년(흥덕왕 11) 왕위계승분쟁에서 패한 김우징이 청해진으로 와 그에게 의탁했을 때 받아주기도 하였습니다. 838년(희강왕 3) 희강왕이 피살되고 민애왕이 즉위하자 김양은 군사를 모집하여 청해진으로 와서 먼저 와 있던 김우징을 만나 장보고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장보고는 부하인 정년으로 하여금 군사 5,000명을 이끌고 김양과 함께 경주로 진격하게 하였고, 이들은 중앙군을 물리치고 경주에 침입하여 민애왕을 살해하고 김우징을 신무왕으로 즉위시켰습니다. 신무왕은 장보고를 감의군사로 삼고 식읍 2,000호를 봉해주었는데, 이것은 진짜 지급했다기 보다 명예로운 작위를 내린 정도로 해석됩니다. 신무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문성왕은 장보고를 진해장군으로 삼았습니다. | ||||||||
중국 법화원의 장보고 동상 |
드라마 해신에서의 장보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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