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규의 난
"고려 초기의 상황은 너무나 어지러웠다. 그 복잡한 상황 속에서 왕규의 난은 아직도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왕규의 난의 기본적인 상황 배경은 태조 정책의 부작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태조가 호족들과 연합정권을 형성하기 위하여 호족들의 딸과 결혼한 것만 29차례이며, 역분전 등의 공신 지급, 사성정책, 중앙과 지방 호족들을 위한16관계제의 마련 등은 수많은 호족들에게 태조 사후 분란의 여지를 남겨두는 것이었습니다.
그 혼란을 정리하자면, 먼저 태조 사후 왕비가 연계한 호족들의 왕권에 대한 개입이 잦았다는 점입니다. 혜종기의 박술희 가문의 보호 아래 혜종 외척인 오씨 집안(전라도 나주집안)의 미약함은 왕에게 치명적인 것이었습니다. 또한 정종시 서경세력인 왕식렴의 보호, 왕실내 근친혼을 통한 수많은 배후세력의 존재 등은 고려 초기의 혼란함을 대변합니다.
보통 역사에서는 왕조 초기 혼란함을 개국 초기 증후군이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중국의 경우는 이런 일이 비일 비재 하는 데요 우리나라도 살펴보면 우선 삼국시대부터 이런 일이 일어 났다고 봐야겠네요. 구체적으로 난으로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백제의 시조 온조, 비류와 유리왕사이에 일어난 왕위계승싸움이 있었습니다, 결국 유리왕이 제 2대 고구려 왕위를 이었고, 온조와 비류는 지금의 백제의 근간이 되는 백제국을 건설하게 됩니다.두번째는 고려시대에 일어난 왕자의 난인데요.이건 구체적으로 난은 아니고,, 계승자 싸움이라 볼 수 있습니다.조선시대초기에 이르게 되면 아시다시피 이방원이 왕자들의 난을 거치면서 왕위에 오르는 것을 볼 수 있지요.
왕규의 난은 제가 지식이 부족한 관계로 밑에 읽기쉬운 논문을 한 편 적어두었습니다. 왕규는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지 판단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글은 역사적 해석에 따라 한 인물에 대한 평가를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역사교육적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서 올려봅니다.
'945년 한 여름 밤. 개경의 왕궁, 풀벌레들의 울음소리가 갑자기 멈추었다. 짙은 어둠을 타고 한 무리의 사내들이 조심스레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이 멈춘 곳은 국왕의 침전인 신덕전(神德殿)이었다. 신덕전 안에는 혜종이 잠들어 있을 것이 틀림없다. 위풍있어 보이는 사내가 잠시 묵묵히 바라보다가 이윽고 왕의 침소를 손가락으로 가르켰다. 그들은 재빨리 담벽에 달라붙어 허물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벽에는 한사람이 들어갈 만큼의 공간이 열리고 사내들은 칼을 빼어들고 우르르 몰려들어갔다. 그러나 국왕이 누워있어야 할 침전은 텅빈 채 황촉불 만이 인기척에 놀란 듯 펄럭이며 흔들리고 있을 뿐이었다. 사내는 잠시 망연한 채 빈 침전을 쏘아보았다. 또 실패로구나.'
무협영화의 한 장면에서나 있을 법한 상황이다. 일국의 왕이 잠들어 있는 궁궐의 침전에 왕을 시해하려는 무리들이 떼거리로 몰려들고 있다니. 더구나 그들을 이끌고 있던 사람은 바로 국왕의 장인이며 정부의 최고위에 있었던 당대의 권력자 왕규인 것이다. 그가 혜종을 죽이기 위해 자신의 가병을 이끌고 국왕의 침소인 신덕전을 공격하였으나 헛탕을 치고 만 것이다.
이 일에 대한 <고려사> 반역열전 왕규전에서의 기록은 이렇다. "하루는 혜종이 몸이 불편하여 신덕전에 있었는데, 최지몽(崔知夢)이 혜종에게 말하기를 '곧 변고가 있을 것이니 빨리 침전을 옮기셔야 합니다' 라고 하므로 왕이 몰래 중광전(重光殿)으로 침소를 옮기었다. 왕규(王規)가 밤에 사람을 시켜 벽을 뚫고 왕의 침실에 들어오니 방은 벌써 비어있었다. 왕규가 최지몽을 보고는 칼을 빼어 들고 위협하며 '임금의 침실을 옮긴 것은 반드시 네가 꾸민 짓이다' 라고 하였는데, 최지몽은 아무런 말도 없이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만 있었다." 최지몽이 침묵한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일이니 무슨 말이 필요하겠느냐는 뜻이었을 것이다. 이번에 혜종의 목숨을 구한 것은 최지몽이 미리 대비한 덕분이었다.
그런데 왕규가 혜종을 죽이려 했던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이에 앞서 왕규는 밤에 혜종이 깊이 잠든 틈을 타서 몰래 그 도당(徒黨)을 보내어 왕의 침실 안으로 들어가서 왕을 해치려고 한 적이 있었다. 자객이 살금살금 국왕을 향해 접근했을 때 잠들어 있는 줄 알았던 혜종은 이 기척을 알고 벌떡 일어나 오히려 한 주먹으로 자객을 때려 죽여버리고는 측근의 시중하는 신하를 시켜 끌어내게 하였다. 그리고는 이 일을 비밀로 하고 다시 묻지 않았다고 한다.
혜종은 일찍이 아버지 왕건을 따라 전장터에서 많은 무공을 세웠던 강건한 인물이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사건이 신기하긴 마찬가지다. 적어도 국왕을 시해하기 위해 보낸 자객이라면 무예가 출중한 인물을 엄격히 선발해서 파견했을 것이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다가 일어나서 한 주먹에 쳐서 때려죽였다니? 고려사에서 묘사한 데로라면 혜종의 주먹은 참으로 놀라운 위력을 가졌으며 국왕의 무예는 매우 뛰어났음에 틀림이 없다.
하지만 이런 의문은 그냥 지나치기로 하자. 놀라운 일들이 많은 것이 과거의 이야기이니까. 우리가 보다 주목해야 할 문제는 이 일을 불문에 부친 혜종의 태도이다. 왕규가 자신을 죽이려고 하였던 것을 알면서도 그를 내버려두었다는 것이다. 분명히 혜종은 자신을 암살하려 한 사람이 왕규임을 알고 있었다. 혜종은 이 사실을 불문에 붙이고 추궁하지 않았던 것은 물론이며 또 한번의 살해 기도를 꾀했음에도 불구하고 왕규를 그대로 방치하였던 것이다. 오히려 왕규는 공공연히 두 차례나 혜종을 살해하려 들었고 이를 방해하는 최지몽에게 칼을 빼어들고 협박을 하고 있는 것이다. 왕규는 어째서 이렇게 당당할 수 있었을까. 도대체 왕규는 누구이며 왜 혜종을 죽이려고 하였을까.
왕규는 어떤 인물인가?
왕규에 대해서는 <고려사> 반역열전에 소개되어 있는 짧은 내용과 몇 개의 단편적인 기록들이 흩어져 남아있을 뿐이다. 몇 줄 안 되는 산만한 기록들을 통해서 왕규라는 인물의 구체적인 면모를 살피기에는 한계가 있으나, 주변 상황을 자세히 살피면 몇 가지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1. 왕규는 경기도 광주의 유력한 지방호족출신이었다
지금의 경기도 광주에는 남한산성이 남아있다. 남한산성은 조선시대 도성을 수비하는 중요한 관문이다. 그 전략적 위치와 넓고 비옥한 터전은 강력한 세력의 존재를 가능케 하는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다. 이 지역은 일찍이 백제의 영토였으나 한강유역이 진흥왕에 의해 신라에 병합되면서 진흥왕 29년(568)에 신주를 설치하였다. 문무왕 12년(672)에는 토성(주장성, 일장성)이 축성되었고, 진평왕 26년(604)에는 한산주로, 경덕왕 16년(757)에 한주로 개칭되었다가, 고려시대에 이르러 태조 23년(940)에 광주라는 이름으로 확정되어 내려온다.
신라말에 이르면 중앙정부가 통제력을 상실함에 따라 각 지역의 지방세력가들이 스스로 독립하여 독자적인 통치체제를 구축하고 군사력과 경제력을 갖춘 독립세력으로 성장하게 된다. 이들을 호족세력이라고 부르는데, 왕규는 바로 광주지역을 바탕으로 성장한 호족인 것이다. 역시 호족이었던 송악지역의 왕건은 일찍부터 경기 황해 일대의 호족세력과 긴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광주지역의 호족 출신인 왕규 또한 왕건의 지지세력으로 건국과 통일의 과정에서 많은 공훈을 세웠을 것이다.
2. 왕규는 대중국사신을 지낸 문신계열의 인물이다.
왕규는 태조 정유 20년(937) 형순(邢順)과 함께 진(晉) 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건국을 축하하고 돌아온 적이 있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왕규는 문신계열에 속한다. 중국에 사신으로 파견되는 경우는 대개가 유학에 대한 이해와 중국문화에 대한 교양을 갖춘 인물을 선발하였기 때문이다. 한편 고려초기의 대중국 사신은 흔히 국왕으로부터 왕씨 성을 하사 받고 王子를 칭하곤 하였다. 본래 박씨였던 박유는 후당에 사신으로 파견되면서 왕성을 하사받고 왕유가 되었는데 당시 사람들이 그를 전왕자(前王子)라고 불렀던 것은 이런 까닭이다. 왕유 뿐만 아니라 왕인요 왕신일 왕융 왕긍 등 중국 사신의 경력이 있는 문신들의 경우도 대개 중국 사행의 과정에서 왕성을 하사받은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렇다면 왕규의 성씨도 또한 중국 사신으로 파견되었을 때에 하사받은 사성일 가능성이 크다. 그가 중국 사신의 경력이 있다는 점을 통하여 한문과 유학의 실력을 갖추고 중국의 문화에 대한 교양을 깊이 있게 갖춘 문신이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3. 왕규는 개국공신이며 조정의 실력자였다.
왕규의 관계(官階)는 대광(大匡)에 이르렀다. 고려의 관계체계는 모두 16개의 등급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대광이란 관계는 건국 초기의 공역자들이 가질 수 있었던 가장 높은 위계에 해당한다. 관계체계의 구조에 의하면 대광의 상위에는 1품에 해당하는 3중대광과 중대광이 있었지만, 이 두 등급은 사후의 추증에만 사용되었던 것이라서 실제적인 최고 관계는 대광이었다. 대광은 대부분 건국과 통일에 크게 공헌한 인물들이거나 국가에서 가장 유력한 세력가들에게만 수여되었다. 그러므로 고려 관직사회에서 왕규가 차지하는 위치는 매우 높은 것이다.
더욱이 왕규가 태조의 고명공신이었다는 점 역시 이를 뒷받침한다. 즉 태조 26년(943) 5월에 왕이 편치 못하여 정무 처리를 정지하였는데, 대신들인 염상(廉相), 왕규(王規), 박수문(朴守文) 등이 왕을 모시고 있을 때 태조가 말하기를“한나라 문제(文帝)가 말하기를 '천하 만물이 생겨나서 죽지 않는 것이 없으니 죽음은 천지의 이치요 만물의 자연이다. 어찌 너무 슬퍼하겠느냐'고 하였으니 옛날 명철한 왕들은 마음을 이렇게 먹었던 것이다. 내가 병에 걸린 지 벌써 20여 일이 지났다. 죽는 것을 돌아가는 것처럼 생각하노니 무슨 근심이 있으랴? 한 문제의 말이 곧 나의 의사이다. 오래 동안 해결하지 못한 안팎 중요 사무들은 그대들이 태자 무와 함께 처리하고 나서 나에게 보고하라.”라고 하였다. 이때 태조로부터 부탁을 받았던 염상, 왕규 박수문 등은 곧 혜종의 왕위계승을 받든 대신들인 셈이다.한편 이에 앞서 태조는 박술희에게 훈요 10조를 내린바 있었다. 박술희와 왕규는 모두 태조의 고명을 받들고 혜종을 보필할 것을 맹서한 대신이었다.
4. 왕규는 강력한 사병집단을 운용하고 있었다.
통일기의 혼란 속에서 전란을 헤쳐온 장수들과 호족들은 개인의 능력에 따라 사병집단을 유지하고 있었다. 호족세력들이 귀부하여 개경에 올 때에는 자신들의 무리들을 함께 거느리고 상경하였다. 이들이 각 정치세력가들의 군사적 배경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호족들의 사병이 완전히 해체되는 것은 광종대의 가혹한 호족숙청을 거친 다음인 성종대에 이르러서였다.
왕규도 사병을 거느리고 있었을 것이다. 혜종을 시해하기 위해 두 차례나 침투시켰던 자객들도 왕규의 사병이다. 그러면 왕규의 사병은 얼마나 큰 규모였을까? 왕규가 소위 왕규의 난이라고 불리우는 사건에서 서경의 왕식렴에 의해 제거될 때에 그 무리 300여인이 죽임을 당하였다고 한다. 이 300여인은 왕식렴의 군사들과 교전을 했거나 적어도 대적하려다가 피살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왕규가 운용할 수 있었던 사병은 일시에 300명이 넘는 규모라고 하겠다. 왕규가 이처럼 강력한 사병조직을 보유하고 있었던 까닭에 왕규와 대립하였던 박술희는 100여명의 무리로 항상 자신을 호위하게 하였다. 왕규의 전횡이 컸음에도 불구하고 혜종이 왕규를 얼른 제거하지 못한 것이나, 통일전의 맹장으로서 용맹을 떨쳤던 박술희까지도 스스로 신변을 보호하기에 급급했던 것은 왕규의 사병집단이 무시할 수 없는 강력한 위력을 지니고 있었던 까닭일 것이다.
5. 왕규는 유력한 외척세력이었다
그는 왜 혜종을 살해하려고 하였을까? 우리는 혜종과 왕규의 관계를 알면 더욱 미궁에 빠지게 된다. 혜종은 4명의 부인을 두고 있었는데 첫 번째 부인은 의화왕후(義和王后) 임(林)씨로서 진주사람 대광 임희(曦)의 딸이다. 태조 4년 12월에 혜종을 왕위 계승자로 책봉하면서 왕비로 삼았는데, 흥화군(興化君)과 경화궁부인(慶化宮夫人), 정헌공주(貞憲公主)를 낳았다. 두 번째 부인은 후광주원(後廣州院) 부인 왕(王)씨이며 광주사람 대광(大匡) 왕규(規)의 딸이다. 세 번째 부인은 청주원(淸州院) 부인 김(金)씨로서 청주사람 원보(元甫) 긍률(兢律)의 딸이다. 네 번째 부인은 궁인(宮人) 애이주(哀伊主)였다. 경주사람이요 대간(大干) 연예(連乂)의 딸이며 태자 제(濟)와 명혜(明惠) 부인을 낳았다. 이 네 부인 가운데 두 번째 부인인 후광주원부인 왕씨가 바로 왕규의 딸인 것이다. 그러므로 왕규는 혜종의 장인이 된다. 당시 호족과 왕실간의 혼인이란 혈연을 통한 두 세력간의 결합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므로 왕규와 혜종은 서로 통혼을 매개로 굳게 뭉친 셈이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왕규와 왕실간의 혼인은 혜종만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태조 왕건은 29명의 부인과 혼인을 하였는데, 그 가운데에 제 15비인 광주원부인과 제 16비인 소광주원부인 역시 왕규의 딸이었다. 이중에서 소광주원부인은 태조의 아들인 광주원군을 낳았다. 그러니까 왕규는 자신의 두 딸을 태조에게, 또 하나의 딸을 태조의 아들인 혜종에게 출가시킨 것이다. 윤리적으로 따지면 복잡하게 보이지만, 당시의 풍습이 그럴 수도 있었다고 설핏 이해 해두는 것이 좋겠다. 지방의 대호족세력들과 태조 왕건과의 혼인관계란 어차피 정실에 의한 정략결혼이었으며, 혜종과의 혼인관계를 맺은 것도 세력의 결합을 더욱 공고히 하자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왕규는 혼인을 통하여 태조왕가와 중첩적으로 혈연관계를 맺은 왕실세력인 것이다. 이런 정황을 바탕으로 추측한다면 왕규는 태조왕가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혜종의 측근세력에 해당하는 인물로 상정하는 편이 타당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규는 혜종을 살해하려 하였다. 그것은 어떤 이유에서였을까? 왕규는 정치적으로 경쟁적인 다른 세력들과 대결하고 있었다. 그러면 왕규와 대립관계에 있으면서 그를 압박하였던 정치세력들은 과연 누구인지 살펴보기로 한다.
왕규와 대립하였던 정치세력들
1. 왕위를 둘러싼 경쟁자 요와 소
혜종의 장인으로서 정계의 막강한 실력자라고 할 수 있는 왕규이지만, 그는 늘 불안한 가운데 초조해하고 있었던 것 같다. 아마도 그 가장 큰 이유는 태조의 둘째 아들인 요와 그 동모제인 소의 도전이었다. 태조는 29명의 부인을 두었지만, 그중에서도 왕후로 불리운 사람은 여섯 명뿐이다. 나머지 스물 여섯명은 모두 부인이란 칭호를 가지고 있었다. 이 6명의 왕후는 부인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유력한 정치적 프리미엄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태조 이후의 국왕과 왕비가 된 사람들은 모두 이들 6명의 왕비가 낳은 아들 딸들이었다. 아버지는 모두 같았지만 어머니가 서로 다른 형제 자매들 사이에서 근친간 혼인이 이루어졌고 그 소생들이 왕위에 올랐던 것이다. 이 왕실 혼인의 전통은 현종 때까지 유지되었다. 태조의 첫째 왕후인 신혜왕후 정주유씨는 자식이 없었으며, 혜종은 둘째 왕후인 장화왕후 나주오씨의 소생이다. 제 3왕후인 신명순성왕후 충주유씨는 태자 태와 정종 요, 광종 소, 문원대왕 정, 증통국사의 5형제와 낙랑, 흥방 두 공주의 5남 2녀를 두었다. 혜종의 뒤를 이은 정종과 광종은 바로 신명순성왕후의 소생이며,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이 귀부하였을 때 그에게 시집을 보낸 낙랑공주 또한 유씨 소생이다. 제 4왕후인 신정왕태후 황주황보씨는 대종과 대목왕후를 낳았다. 대목왕후는 광종의 왕비가 되었다. 제 5왕후인 신성왕태후 김씨는 신라왕실 출신으로 경순왕의 백부인 김억렴의 딸이다. 그는 안종 욱을 낳았는데 안종은 후에 경종비 헌정왕후 황보씨와의 사통관계에서 현종을 낳게 된다. 제 6왕후 정덕왕후는 1비와 같은 정주유씨 출신이며, 4남 2녀를 두었다. 이처럼 6명의 왕후들은 각기 왕실의 중요한 발언권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 중에서도 태조의 둘째 아들인 요와 셋째 아들인 소는 모두 충주유씨 소생으로서 강력한 왕위계승의 후보였다. 이들은 어머니쪽 세력을 배경으로 하여 왕권에 도전하기 위해 부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왕규는 바로 이 요와 소의 두 형제를 위험인물로 지목하고 있었다. 혜종이 왕위에 오른지 1년이 지났을 때 왕규는 혜종에게 이 두 형제를 제거할 것을 요구하였다. 요와 소가 반역을 꾀하고 있다고 참소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혜종은 왕규의 뜻을 따르지 않았다. 오히려 혜종은 그것이 왕규가 두 왕제를 모함하기 위해 거짓으로 구며낸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왕규의 말을 따르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의 맏딸을 소의 처로 삼아 그 세력을 더욱 강화시켰다. 왕규가 그들을 해칠까하여 동생들을 보호하려는 의도였다. 혜종이 왕규를 의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왜 혜종은 왕규를 멀리하려고 하였을까?
2. 왕규에 대항한 책략가 최지몽
왕규가 혜종 및 정종, 광종 형제에 대해 해치려고 했을 때마다 태조의 왕자들을 구원하고 왕실의 위기를 지켜낸 인물이 곧 최지몽이었다. 왕규가 요와 소를 역모로 모함하였을 때 최지몽은 미리 혜종에게 이르기를 "유성이 자미성을 침범하였으니, 나라에 반드시 적이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최지몽은 사천공봉의 직에 있었는데 사천공봉이란 천문과 지리, 점복과 길흉의 卜巫에 관련되는 직책이었다. 최지몽은 천문에 의탁하여 왕규의 모함을 경고하였던 것이다. 혜종이 왕규를 멀리하고 요와 소에게 은우를 더욱 두텁게 한 것이나 소에게 큰 공주를 시집보내서 세력을 키워준 것은 최지몽의 건의에 따른 것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최지몽은 그후 왕규가 혜종을 시해하려고 신덕전에 무리를 끌고 쳐들어갔을 때에도 왕을 옮겨 피신케 하였으며, 그후 경종대에 이르러 왕승 등이 모반하려고 할 때에도 이를 미리 고변하여 제거하도록 하는 등, 국가의 위태로운 위기에 왕실을 보위하는데 진력하였던 인물인 것이다.
3. 혜종의 후견인 박술희
한편 박술희는 혜종과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사람이다. 혜종의 어머니 장화왕후 오씨는 태조의 제2왕후이며 나주출신으로써 나주지역의 호족 다련군의 딸이었다. 그런데 오씨는 세력이 약하였으므로 태조가 아이를 얻는 것을 원하지 않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혜종의 얼굴에 있는 돗자리처럼 얽은 자국은 태조가 방사를 회피한 것을 흡입하여 아이를 배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혜종은 아마도 얼굴에 얽은 곰보자국이 있었던 모양인데, 그런 까닭에서 덧붙여진 설화일 것이다. 그러나 장화왕후 오씨의 아들인 태자 무(武)가 비록 태조의 맏아들이었다고 하지만 순순히 왕위를 계승하기에는 그 세력이 미약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태조는 6명의 왕후와 23명의 부인을 얻었다. 이들 사이에서 25명의 왕자와 9명의 공주를 낳았는데, 이들 왕자들은 각기 자신의 어머니쪽 외가세력의 크기에 따라 자신의 세력도 비례하기 마련이었다. 태자 무가 7살이 되었을 때 태조는 다음 왕이 될 정윤을 정하려고 하였다. 태조는 먼저 태자가 입는 예복인 적황포를 상자에 담아 오씨에게 주었고, 오씨는 박술희를 불러 이 옷상자를 보여주었으며, 이에 박술희는 태조에게 무를 정윤으로 삼을 것을 주청하였고, 태조는 비로소 무를 정윤에 봉하였다. 이 번거로운 과정을 거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세력이 미약했던 나주오씨 소생의 무를 정윤으로 삼는 것이 불안했던 까닭에 박술희로 하여금 무의 후원자가 되어줄 것을 요구하고 박술희가 이를 수락한 것을 확인한 연후에 비로소 무를 정윤으로 삼았던 의미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박술희는 혜종의 후견자로서 자신의 역할을 끝까지 수행하였다.
왕규가 혜종을 시해하려는 불온한 움직임을 박술희가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박술희라고 하여도 왕규를 제거할 수 있는 현실적인 방책은 갖지 못했었던 듯 하다. 오히려 100여명의 무인들로 하여금 호위하여야 했으리만큼 자신마저 목숨의 위협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혜종은 병이 들고 왕규의 제거에 미온적이었다. 박술희는 정적을 제거할 기회를 놓친 것이다. 그는 마침내 혜종의 죽음과 함께 제거되고 만다.
4. 서경의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하였던 왕식렴
혜종이 즉위한 초기까지 왕식렴의 태도가 어떻했는지에 대해 뚜렷하게 밝혀줄 자료는 없다. 그러나 어떤 증거물보다도 명확한 것은 그가 정종 요의 요구에 따라 서경의 군사를 이끌고 내려와 왕규를 제거하였던 실질적인 인물이었다는 점이다. 서경에는 박수문 박수경 형제가 웅거하고 있었으며, 태조의 가장 탁월했던 명장 유금필의 막강한 군사력이 포진하고 있었다. 이들을 이끄는 사람이 바로 태조 왕건의 조카인 왕식렴이었다. 개경이 정치의 중심지로서 전국의 각 지역에서 모여든 호족출신들이 각축을 벌이며 있는데 비해 서경은 군사적 중심지를 이루며 여진족을 기미하고 북방 진출의 기지로서 왕건 휘하의 정예부대들이 집결하고 있었다.
그런데 서경의 군사력에는 또 다른 역할이 있었다. 바로 여러 호족들이 모여들어 기반이 취약해진 개경의 왕실이 위기에 봉착하면, 배후의 서경에서 지원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이 점은 왕식렴에 의해서 증명이 된 셈이지만, 그 후에 현종의 즉위를 둘러싼 김치양의 난에서도 똑 같은 양상이 되풀이되었다. 서경의 사령관이었던 강조가 군사를 몰고 내려와 김치양 일파를 제거한 것은 왕규의 난을 재연한 것처럼 유사한 형태였던 것이다.
왕규가 혜종을 해치려한 이유는?
지금까지 왕규의 반대세력에 대해 제시해 보았다. 가장 직접적인 라이벌은 요와 소 두 왕자였으며, 이를 옹호하였던 문신 최지몽, 서경의 왕식렴. 그리고 왕규보다는 동생의 입장을 두둔한 혜종과 그 후견인 박술희가 있었다. 그러나 왕규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뼈 아픈 것은 혜종의 동향이 아닐 수 없었다. 자신의 사위이며 스스로 후견인으로 자처하였던 왕규는 혜종에게 반란을 경고하였지만, 혜종은 자신을 믿지 않고 오히려 정적의 편을 들었던 것이다, 혜종은 요와 소를 제거하기는커녕 소에게 자신의 장공주를 시집보내 세력을 키워주었고 보호하려들었던 것이다.
왕규로서는 위기와 불안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대로 있으면 결국 자신은 요와 소의 세력에 의해 당하고 말 것이다. 그는 혜종을 제거하고 스스로 권력의 정점에 오르기를 기도했다. 그에게는 자신의 외손자, 태조 16비 소생의 광주원군이 있었다. 이 아이를 왕위에 올리고 권력을 잡아 모든 정적들을 제거하자. 그것이 살아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왕규는 그렇게 판단했을 것이다. 혜종을 시해하려는 첫 번째 거사는 조심스럽게 시작됐다. 밤에 몰래 왕의 침전에 자객을 보낸 것이다. 그러나 혜종은 이를 알고 일
어나 쳐죽이고 말았다. 두 번째는 좀 더 과감했다. 스스로 앞장에 서서 떼거리로 몰려갔다. 그것도 공공연하게 침전의 담벼락을 부수고 들이닥쳤다. 그러나 이미 왕은 피신한 다음이었다. 화가 난 왕규는 최지몽을 향해 네 짓이로구나 하면서 칼을 빼 들고 위협했다. 이상하리만큼 당당하고 무모한 왕규의 행동이 아닌가. 그것은 그가 이미 막다른 골목에 처해 있었음을 반증한다. 왕규는 절망적인 상황에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미 혜종은 자신을 경원시 하고 있었고 반대세력의 포위망은 압축되어 조여들고 있었던 것이다. 왕규가 헤어날 수 있는 방법은 스스로 권력의 주인이 되는 것밖에 없었던 것이다,
왕규의 난을 둘러싼 몇가지 수수께끼
먼저, 혜종은 왜 왕규가 자신을 해치려는 것을 알면서도 내버려두었을까? 하는 점이다. 혜종은 왕규가 보낸 자객을 처치하고는 측근을 불러 시체를 치우게 하고 아무에게도 발설치 말라고 하며 불문에 부쳤다. 혜종이 왕규의 짓 인줄 몰랐던 것은 아니다. 이미 최지몽의 경고로 왕규의 동향에 대해 파악하고 있었을 것이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두 번째 왕규의 신덕전 침입 사건 이후에도 여전히 혜종은 왕규를 그대로 방치하고 있었다.
이 문제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은 혜종의 자기세력이 미약해서 왕규를 제거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렇게만 이해하고 넘어가기에는 석연치가 않다. 가령 혜종이 왕명으로 구원을 요청했다면 과연 왕식렴은 움직이지 않았을까? 박술희에게 보다 많은 병력의 지휘권을 부여할 수는 없었을까? 왕규의 제거가 어려운 일 일수는 있어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혜종의 의도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이 의문에 대해 해답을 줄 수 있는 자료를 갖지 못하고 있다. 단지 의혹만을 제기할 뿐이다. 그건 역사적 상상력의 영역이 아니라 소설적 상상력의 몫이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의문은 혜종이 즉위한지 2년만에 병사하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혜종은 일찍이 태조를 따라 전장에서 크게 활약하고 전공을 세운 강인한 인물이었다. 왕규의 자객을 한 주먹에 때려죽일 정도로 건장하고 용맹했던 30여세의 한창 나이의 장년이었다. 그런 그가 이때에 이르러 갑자기 발병하여 죽었다는 것이 아무래도 석연치 않다. 왕규의 해침을 당하고 두려움이 많아지고 사람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갑자기 병사하기까지 할 정도로 나약한 인간이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한편 혜종을 이어 왕위에 올랐던 정종도 재위 4년만에 죽어서 의심을 갖게 한다. 혜종과 정종이 각기 2년, 4년이라는 짧은 기간밖에 재위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건장하던 청년들이 왕위에 오르면서 갑자기 병을 얻어 요절한 것은 아무래도 의심스런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이에 비해 광종은 26년간 왕위에 머무른다. 광종대에 와서 왕권강화가 결실을 맺는 것은 긴 시간적 여유가 있었던 것도 하나의 조건이 된 셈이다.
다음으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왕규의 난에 대해 정황을 기술한 <고려사>의 설명내용이 수상쩍다는 점이다. <고려사>의 기록에 의하면,
"왕규는 일찍이 대광 박술희를 증오하다가 혜종이 죽자 정종의 명령을 위조하여 그를 죽였다. 이에 앞서서 혜종의 병이 위독하였을 때 정종이 왕규가 반역할 뜻을 가지고 있음을 알고 비밀리에 서경 대광 식렴과 사변에 대응할 계책을 상의해 두었다. 그러므로 왕규가 반란을 꾸미려고 하였을 때 식렴이 군사를 인솔하고 서울로 와서 숙위하여 왕규가 감히 반역 행동을 못하게 하였다. 이에 왕규를 갑곶으로 추방하고 뒤로 사람을 파견하여 목을 베었으며 그의 도당 3백여 명도 처단하였다."
이 기록에 따르면, 혜종이 죽고 정종이 왕위에 올랐는데, 왕규가 왕명을 위조해서 박술희를 죽이고, 왕규가 난을 일으키려하니 서경군이 와서 감히 반란을 못하게 하였으며, 왕규를 갑곶으로 추방한 후 300인을 처형하였다는 순서로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이 진행과정을 따라가 보면 앞뒤가 뒤바뀌어 도저히 요령이 없다. 특히 박술희를 살해한 허물을 왕규에게 뒤집어 씌우려는 듯한 혐의가 짙다. 우리가 이 말을 약간 바꾸어 보자. '(정종은) 혜종이 죽자 왕식렴의 서경군의 도움으로 왕위에 올라 먼저 박술희를 죽이고 이어서 왕규와 그 무리도 죽였다.' 이렇게 배열할 때 정황이 훨씬 쉽게 이해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박술희와 왕규를 제거한 것은 정종과 왕식렴이며, 따라서 왕규의 난이 아니라 정종의 쿠테타라고 생각될 여지를 남겨두고 있다.
지금까지 앞에서 제기한 의문들을 통하여 혜종의 죽음과 왕규의 난이라는 것이 그리 명확하게 똑 떨어지는 상황들이 아님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알려진 왕규에 대해서도 같은 의문을 제기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왕규란 인물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실들은 정확한가?
왕규에 대한 평가는 올바른가?
왕규의 사상과 정치적 지향을 알 수 있는 자료는 없다. 단지 그가 취했던 행동과 주변정황을 통해 짐작을 해 볼 뿐이다.
먼저 과연 왕규는 북진정책을 추진하고 북방 개척을 통해 대고구려의 꿈을 실현하려는 야심이 있었던 인물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 살펴보자. 이 시대의 역사를 소재로 한 드라마에서는 왕규라는 인물을 그렇게 해석하려고 모색하는 듯하다. 그렇지만 이에 대한 대답은 결코 긍정적이지가 못하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고구려 옛 영토를 수복하려는 북방개척의 전진기지는 서경이었다. 태조는 자신의 본향인 개경이 전국에서 모여든 호족들로 메워지자 가장 충실한 군사력을 서경에 집결시켰다. 폐허로 남아 있던 옛 고구려의 도읍지에다 사람들을 옮겨 만든 서경은 북진을 향한 고려의 의지와 고구려의 후예라는 자부심으로 새롭게 건설된 도시였다. 그 북진정책의 책임을 담당하였던 사람은 태조의 조카인 왕식렴이다.
그러나 왕규는 서경의 왕식렴과 대립하였던 인물인 것이다. 왕규가 제거하려고 했던 정종은 왕식렴의 도움으로 왕위에 오른 후 서경으로 천도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실천에 옮기지 못한 채 죽고 말았다. 오히려 왕규와 대립적인 세력들과 북진정책은 더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꿈과 이상이 같았다면 그들은 대립이 아니라 서로 협조했어야 마땅하다. 따라서 왕규에게서 북방개척의 이상을 찾는 것은 지나친 추측이 아닐까 한다.
다음으로 또 하나의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보자. 왕규는 국가 건설의 기초를 담당한 제세의 경륜가는 아니었을까? 혹시 정종과 광종이 왕위에 오른 후 반대세력이었던 왕규를 반역자로 처단하고 모든 죄악을 뒤집어 씌운 것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왕규란 단지 권력의 희생자로 역사에 오명을 뒤집어 쓴 인물일 수도 있다.
조선이 건국하였을 때의 정치적 진행과정과 고려 초기는 서로 유사한 점이 없지 않다. 권력의 재편이 생겨날 때 그 권력을 누가 담당하게 되느냐에 따라 입장이 갈라진다. 조선 초기에 정도전이 태종 이방원에 의해 제거되었듯이 왕규는 광종에 의해 제거된 것은 아닐까 하는 점이다. 왕권의 확립을 위해 숙청을 단행하던 태종 이방원에 대해 정도전은 신권을 대표하는 방해물이었던 것이다. 국가를 건설하는데 주역을 담당했지만, 건설된 국가에서 국왕권의 확립을 위해서는 희생되지 않을 수 없었던 인물이 정도전이었다. 왕규와 정도전을 비교하는 것은 가능할까? 이미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왕규의 난에 대한 <고려사>의 기술은 모순되고 불명확한 것이었다. 의혹의 여지는 충분한 셈이다.
새로운 국가와 사회를 건설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의 꿈과 이상이 모이고 모여서 큰 흐름을 이룰 때 가능한 것이다. 고려가 건국하고 후삼국의 통일을 이룩하였던 기간은 한국사의 거대한 변화를 가져온 전환기의 시대로 인식되고 있다. 신라라는 고대적 체제를 벗어나 중세사회로 이행해 가는 소용돌이와 격랑 속에서 변화와 새 사회의 건설을 꿈꾸던 수많은 사람들의 염원이 모여서 도도한 흐름을 형성하였다. 혹시 왕규 또한 그 큰 흐름의 한 줄기는 아니었을까. 왕규 또한 전환기의 한 시점에서 건국초기의 국가와 정치를 이끌었던 주역 중의 한사람이었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역사상의 어떤 기록을 통해서도 그의 사상이나 이념을 구체적으로 밝혀 낼 수는 없다. 그가 꿈꾸던 사회의 모습이 어떤 것이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이미 정상의 위치에 도달했던 그가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더 큰 권력이 필요했던 것일까. 단순한 권력에의 욕구와 생존의 경쟁 탓이었는지, 아니면 무언가 목숨을 걸고라도 이루어야할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결론을 얻기는 쉽지 않다. 왕규에 대해 따뜻한 시선을 보낸다 하더라도 그건 역사학의 영역에서 벗어나서 상상력의 영역에 맡겨야 할 문제이다. <고려사>의 기록을 통해서 복원할 수 있는 왕규라는 인물은 권력을 추구하여 반역을 꾀하다가 몰락한 패배자의 형상일 뿐이다.
왕규의 전기는 반역열전에 실려 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한다. 분통이 터지는 사람이 있겠지만, 그건 맞는 말이다. 역사의 눈길은 패자에게 관심을 던질 만큼 한가하지 못하다. 아무리 승자라 하더라도 역사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은 무대의 한 중앙에 서 있는 그 순간뿐이다. 불행히도 역사가 조명을 비춘 그 시간에 왕규는 반역자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왕규를 반역자로 기억한다. 누군가 왕규를 반역자가 아닌, 역사의 수레바퀴 밑에 깔린 위대한 정신, 혹은 이루지 못한 꿈과 이상을 간직한 채 구렁텅이로 떨어져 반역자의 낙인을 쓰고만 절세의 경륜가로 이해하고 싶다면, 나 역시 그러고 싶다. 나는 역사상의 모든 지도자들이 다 그랬기를 강하게 바라고 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역사의 기록과 기록 사이의 그 넓고 공허한 공간에 장엄하고 아름다운 상상력의 성채를 세우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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