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의 미술 - 4. 고딕 양식의 미술
이 글에 대한 원문 포스트 : http://blog.naver.com/tori2984?Redirect=Log&logNo=10013241401 위 블로그를 클릭하시면 유럽 미술사에 대한 많은 자료를 얻으실 수 있습니다. 너무 정리가 잘 되어 있어서 위 사이트에서 가져온 글입니다. 제가 정리하는 것보다 100배는 나은 듯 하네요. 역시 제 사이트는 전문가의 손길이 필요해요. ------------------------------------------ 원문 : 고딕Gothic이라는 단어는 '고트족의'라는 뜻으로, 15세기 르네상스 시대에 14세기 이전의 건축물을 '괴물 같고 야만적'이며 '고트족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폄하한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그러나 13,14세기 당시의 프랑스 사람들은 고딕 스타일을 현대적인 건축이라고 불렀다. 이전 시대의 건축보다 공법에서도 훨씬 발전시켰을 뿐만 아니라 미감에서도 아주 새로웠기 때문이다. 12세기 후반부터 14세기에 이르는 중세 말의 발전은 십자군 원정에 힘입은 바가 큰데, 200여 년 간 계속된 유럽과 동방의 왕래로 교통과 도시가 발달하고, 상공업의 부흥에 따라 중상층이 대두하게 되었다. 기독교도 외진 곳에 위치한 수도원 중심의 이전과는 달리 도시에서 대성당 위주로 발달하였다. 이제 교회는 단순히 기도만 하는 곳이 아니라 대학과 이에 따른 출판, 문화기관이기도 하였으며 병원과 사회시설을 관장하는 복지기관이기도 하였다. 당시의 생활전반을 관장하던 교회를 위해 제작된 미술품에서 이 시대의 사고방식과 인식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고딕건축양식은 로마네스크 양식의 발전된 형태로 로마네스크 양식의 교차형 아치는 육중한 벽면을 필요 없게 만들었고, 기둥과 늑재만 있어도 건물은 유지 될 수 있었다. 고딕건축가들은 여기에 예전의 반원형 아치에 비해 훨씬 큰 하중도 견딜 수 있고, 건물을 훨씬 높이 세울 수 있는 첨형 아치를 개발한다. 첨형 아치는 건축물의 요구에 따라 평평하거나 좀더 뾰족하게 만들어 높이를 자유롭게 조절할 수 있었고, 육중한 돌로 벽을 쌓을 필요가 없어지면서 그 대신 큰 창문을 낼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구조는 고려해야할 사항이 있었다. 궁륭을 구성하고 있는 돌들의 무게는 아래쪽으로만 압력을 가하는 것이 아니라 양옆으로도 가해지기 때문에, 비록 첨형 아치가 반원형 아치의 개량형이라고는 하지만 기둥만으로 이 압력을 지탱하기에는 충분치 않았다. 건물이 높아짐에 따라 돌의 무게와 압력을 분산시키기 위해서 측랑의 벽에는 부벽이, 신랑은 공중부벽이 만들어져 고딕 건축양식의 완성도를 높이고 있다
벽면이줄어들고 창문이 많아지자 창문의 시각적 역할이 증대되어 스테인드글라스stained glass가 발달했다. 빛에 의한 아름다운 채색 효과를 보여주는 스테인드 글라스는 고딕 예술의 진수라고 할 수 있다. 스테인드 글라스는 색유리 조각를 단면이 H형으로 생긴 납으로 된 끈으로 조합해서 그림을 그린 것인데, 고딕 건축에서 그 절정을 이루었다 .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은 고딕 건축 양식의 대표적인 건물로, 특히 서쪽 정면은 고딕 양식의 아름다움을 대표한다. 건물 정면의 맨 위에 놓인 사각형의 쌍탑과 쌍탑의 모서리를 따라 정면을 세 부분으로 분할한 수직선의 부벽, 그리고 부벽의 수직적 흐름에 대응하여 수평으로 전개되는 ‘그랜드 갤러리’, 그 아래 설치된 풍부한 조각장식으로 가득한 첨형 아치를 지닌 세 개의 문은 정면 가운데에 놓인 ‘장미의 창’을 중심으로 비할 데 없이 아름다운 조화와 통일감을 보이고 있다. 로마네스크 건물의 정면에서 느껴졌던 육중한 둔탁함이 여기에선 경쾌한 조화와 아름다움으로 바뀌어 있다.
고딕 조각에서는 로마네스크 조각에서 보인 경직성과 비현실성이 서서히 사라지고 고대 그리스 조각에서의 자연스러운 생명감이 조금씩 살아나기 시작했다. 이 역시 자연주의적 묘사가 목적이 아니라 성서의 내용을 보다 실감나게 전달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고딕 조각가들은 형상을 실감나게 표현하고자 노력했다. 이러한 변화는 서서히 이루어졌는데, 12세기의 예수 얼굴(그림4)과 13세기 고딕시대의 예수 얼굴(그림5)을 비교해 보면 왕관을 쓴 엄격한 모습에서 모범적인 인간형상 1세기동안 매우 사실적으로 변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림 5 右) 예수, 일명 아름다운 신(神)-아미엥 대성당 서쪽 정면의 중앙기둥 부분/1220-35년 기둥 조각인 그림 6, 7, 8을 통해 이러한 변화를 비교할 수 있는데, 거의 환조에 가까운 샤르트르 대성당의 기둥에 새겨진 구약의 선지자들은 과장되게 뒤틀렸던 로마네스크 조각과 비교해 볼 때 정돈되고 사실적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보다 80여 년 후에 조각된 아미엥의 사도들은 훨씬 자연스럽다. 여기에 비하면 샤르트르의 조각은 아직 기둥에 제한되어 있는 경직된 모습이다. 아미엥 조각의 사도들은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며 옷 주름도 5명이 서로 리듬을 지니면서도 자연스럽게 흘러 내려와 있으며, 샤르트르 조각이 기둥과 한 돌로 된데 비하여 아미엥의 조각은 기둥과 완전히 분리된 환조로 건축전체와 어울리지만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것을 알 수 있다.
그림 7右) 사도들-아미엥 대성당의 서쪽 정면 기둥/1220-35년
랭스 대성당의 서쪽 정면 그림 8은 아미엥의 조각들 보다 조금 늦게 제작된 랭스 대성당의 조각들이다. 왼쪽의 두 여인은 가브리엘 천사와 마리아 즉 <수태고지>이고, 오른쪽은 마리아가 90세가 넘은 그의 사촌 엘리자벳을 방문하는 장면이다. 밝게 웃는 천사와 겸양의 미덕을 지닌 마리아, 젊은 마리아와 얼굴에 주름이 가득한 늙은 엘리자벳의 사실적인 모습들은 성경의 인물을 현실적으로 느끼게 하려는 노력의 결과이다. 그림 9의 스트라스부르 대성당의 남쪽 익랑 문의 팀파늄에 조각된 ‘성모의 승천’이나, 나움부르크 대성당 설립자의 조각상인 ‘에케하르트와 우타’도 현실적인 감정의 울림과 실감나는 인체묘사로 고딕 조각의 새로운 경지를 보여준다.
스트라스부르 대성당의 ‘성모의 승천’을 보면 예전 조각과는 달리 부드러운 생명감이 감도는 것을 느낀다. 여전히 인물들의 배치에서 좌우대칭적 구도가 적용되고 있지만 초기의 조각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지는 않다. 누워 있는 성모마리아를 감싸고 있는 천은 섬세하고 유연한 옷주름으로 뒤 덮여 있고, 성모의 신체 굴곡은 옷에 싸여 있으면서도 생생하게 실감이 난다. 임종하는 성모의 얼굴은 평화롭고 온화하다. 이에 비해 성모의 앞에 쭈그리고 앉은 막달라 마리아는 손을 맞잡고 슬픈 표정을 하고 있다. 주위에 둘러선 열두 사도도 애도의 표정을 짓고 있다. 사도들을 감싸고 있는 옷주름들도 섬세하면서 실감나게 신체구조를 드러내 보이고 있다. 이것을 조각한 작가는 고대 그리스, 로마 조각에서 많은 것을 깨달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독일 나움부르크 대성당의 ‘에케하르트와 우타’는 마치 실물을 보고 조각한 것 같은 생명감이 감돈다. 당시 기사의 모습을 실감나게 재현한 이 조각상에서 우리는 조각이 서서히 건축의 예속으로부터 벗어나고 있음을 느낀다. 중세에는 현실에 존재하는 한 인물의 개성이 얼굴표정에 생생히 살아 있게끔 사실적으로 묘사한 초상화는 물론 초상조각 역시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중세 이전 로마 시대에는 초상화와 초상조각이 많이 만들어졌음을 알고 있다. 로마가 멸망한 후, 미술기법은 형편없이 퇴보하여 조악한 수준으로 떨어진데다가 기독교 미술이 사실적인 묘사를 중요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중세 내내 사실적인 표현이 회복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나움부르크 대성당의 ‘에케하르트와 우타’는 13세기 후반에 들어 중세 조각이 서서히 사실적인 표현을 회복해 가고 있음을 알리는 중요한 전조였다. 즉 고딕 시대의 조각가들이 더 이상 그들이 무엇을 표현하느냐 하는 문제에만 관심을 가진게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표현하느 냐 하는 데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런한 사실주의적 경향은 조각 뿐 아니라 회화 부분에서도 볼 수 있다. 고딕 건축 양식에서 회화의 범위는 성당의 벽면이 스테인드 글라스로 장식되어 있었기 때문에 제한적이었다. 당시의 회화작품으로는 사본장식(寫本裝飾)의 삽화인 미니어처miniature가 많이 제작되었는데 로마네스크 회화나 비잔틴 양식의 영향을 받아들여 인간상을 자연의 모습에 가깝게 해서, 인간적 감정의 분명한 모습을 그려낸 것은 13세기 초의 영국과 프랑스의 미니어처였다. 이것은 뒤에 건축의 호화스러운 액자에 끼워졌다가 13세기 후반부터는 왕후의 사치스러운 생활환경을 반영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본장식은 당시의 고딕 미술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이것을 14세기 후반부터 활약하는 네덜란드 출신의 예술가들이 이어받아 사실주의를 착실하게 추진해 나가게 된다.
그러나 유럽과 달리 이탈리아에서는 프레스코의 전통이 남아 있었다. 이탈리아의 고딕회화는 다른 유럽 회화 양식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이탈리아에서의 고딕 건축은 알프스 이북의 건축과는 달리, 창이 적고 벽면이 더 커서 벽화제작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이들은 그리스의 전통을 기억하고 있었으며 교회당에 유리벽을 사용하지 않았다. 프레스코화, 벽면 모자이크, 패널화는 알프스 이남에서 활발하게 발전하였다. 13세기의 비잔틴의 전통이 남아 있었고, 이는 르네상스라는 새로운 시대를 여는 위대한 작가 지오토Giotto(1266~1337)의 출현을 부른다. 프레스코화로 유명한 그는 원근법에 의한 깊은 공간감과 인체에 중량감을 줌으로써 회화에 시각적 실재감을 나타내었다. 지오토 이후 이탈리아 미술가들은 중세의 평면적인 회화에서 벗어나 현실을 실감나게 묘사하는 표현기법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완벽하지는 않지만 고전적 원근법과 훨씬 부드러워진 형태묘사로 생동감이 넘치는 작품들을 만들어냈다.
지오토와 같은 세대의 사람으로 시에나siena의 거장인 두치오Duccio(1255/ 60년경~1315/18년경)는 고대 비잔틴 형식을 완전히 버리지 않고 거기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어 성공을 거두었다. 그림 13은 그의 유파 중에서 그보다 젊은 두 대가인 시모네 마르티니Si mone Martini와 리포 멤미Lippo Memmi가 그린 제단화이다.
수태고지를 묘사한 이 그림은 대천사 가브리엘이 하늘에서 내려와 성모에게 인사를 하는 장면인데 가브리엘이 “은총을 받은 이여(Ave gratia plena)"라는 말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게 그의 입 주위에 그 말을 직접 써 놓았다. 가브리엘이 왼손에 들고 있는 나뭇가지는 평화의 상징인 올리브가지이고 화면의 가운데에 놓인 흰 백합은 순결을 상징하며, 그 뒤 첨두형 아치 밑에 천사들에게 둘러싸여 날고 있는 비둘기는 성신을 뜻한다. 천사는 이제 막 마리아의 앞에 내려앉은 듯, 옷자락이 펄럭이고 날개가 아직 접히지도 않았다. 두 날개는 아치 안에 채워지게 그려져 있으며, 그 옆 아치에 있는 작은 천사들이나 마리아의 머리도 각각 아치 안에 그려 놓았다. 인물들의 비스듬히 째진 눈과 곡선을 이루는 입 등 어색한 부분이 있지만 화병과 의자, 기도서 등에서 현실적 무게감을 느낄 수 있다. 우리는 이 그림에서 당시의 화가들이 흘러내리는 의상의 부드러운 곡선과 가느다란 몸매의 미묘한 우아함을 즐겨 그렸으며, 중세적 패턴과 새로운 표현방법이 어떻게 절충되어 효과적으로 조화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르네상스 회화의 이상이라고 할 수 있는 사실적 생명력의 표현에 있어서 마리티니와 멤미의 그림은 지오토의 그림에 비해 뒤떨어지는 것이 사실이지만, 우아함에 있어서는 상당한 호소력을 지녔음을 보았다. 지오토가 르네상스 회화의 확실한 선구자로서 과감한 변혁을 가져왔다면 마르티니들은 전통을 존중하는 차원에서 온건한 변화를 모색한 것이다. 알프스 이북의 유럽과 이탈리아 미술은 어느 정도 차이는 있으나 이탈리아미술이 유럽의 나머지 지역과 분리된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사회적 분위기는 많이 변하였으나 그때까지 유럽은 종교라는 이름 하에 하나의 큰 단위를 이루고 있었으며 미술가들과 사상가들은 한 중심지에서 다른 중심지로 옮겨 다녔다. 적어도 유럽 내에서는 ‘다른 지방의 것’이라는 이유로 새로운 양식과 그 업적들이 배척 당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지오토의 개념은 알프스 이북의 화가들에게 영향력을 넓혀 갔으며 북쪽의 고딕화가들도 남유럽의 거장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14세기 말에 이처럼 주고받는 가운데서 생겨난 양식을 고딕의 ‘국제양식’이라고 한다. ‘국제양식’은 미술이나 회화를 중심으로 모자이크․태피스트리․칠보세공․자수 및 스테인드 글라스 등에서 공통으로 나타나는 특징적인 양식이며, 지역적인 개성과 함께 선적 표현, 곡선적이고 리드믹한 조형, 평면적인 구성 등 공통적인 양식이 특색으로 나타나 있다. ‘국제양식3)’의 미술가들은 세밀한 관찰력을 토대로 주변세계를 묘사했는데 미술가들은 자연을 직접 관찰하고 그 결과를 그림으로 옮겨 담아내기 시작했으며, 이들은 묘사력 정도에 만족하지 못하고 원근법이나 명암법 등의 다양한 시각법칙을 탐구하기 시작하여 르네상스의 도래를 예고했다. 전에는 성경에 나오는 주요 인물들을 묘사하는 고대의 공식을 배우고 이러한 지식을 새로운 방식으로 활용하는 것으로 충분하였지만 이제 미술가는 자연으로부터 스케치할 수 있어야 했고 , 또 이것을 그의 그림에 옮겨 담을 수 있어야 했다. 이것은 더 이상 미술의 구심점이 교회가 아니라는 것을 뜻한다. 시대가 변한 것이다. 도시들은 번화한 상업의 중심지로 성장했고 시민들은 점차로 교회와 봉건 영주의 권력에서 벗어나기 시작했으며 귀족들도 더 이상 요새와 같은 장원에서 음침하게 격리되어 살기보다는 안락과 유행하는 사치가 있는 도시로 이주해서 권력자의 궁전에서 그들의 부를 과시했다. 국제 고딕 양식은 후기 고딕 궁정의 매우 우아한 장식 취미 가운데 꽃을 피웠던 것이다. 랭부르Limbourg 형제의 공방에서 만들어진 기도서에 붙어 있는 달력은 국제양식의 사물의 세부에 대한 사실주의적 취향을 잘 보여주고 있다. 확대경을 이용하여 그린 것으로 보이는 그림 14는 귀족들의 연례행사인 봄 축제를 보여주고 있다. 이들은 꽃과 나뭇잎을 휘감은 채 당시 유행하던 화려한 옷차림으로 말을 타고 숲을 지나고 있다. 이 그림은 현실에서 따온 장면의 하나처럼 보이지만 나무를 커튼처럼 이용해 배경을 차단하고 멀리 보이는 성의 지붕으로 미루어 보아 이 장면이 실제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달력을 그린 화가는 사실적이고 주의 깊은 세부묘사를 통하여 현실감을 얻어내고 있는 것이다.
|
<http://historia.tistory.com 역사전문블로그 히스토리아>
'퀴즈풀이 > 히스토리아 역사 스토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07. 4월 3주 역사 검색 로그표 : <정사암 회의> (1) | 2007.04.17 |
---|---|
위진남북조의 난세 속에서 등장한 현학과 청담의 달인들 (3) | 2007.04.09 |
중세의 미술 - 3. 로마네스크 양식의 미술 (0) | 2007.04.09 |
중세의 미술 - 2. 게르만과 프랑크 왕국의 미술 (0) | 2007.04.09 |
중세의 미술 - 1. 초기 기독교 미술과 비잔틴 미술 (2) | 2007.04.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