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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풀이/역사 사료와 데이터

고구려 관련 사료 중 핵심 발췌

고구려 관련 사료 중 핵심 발췌

2월, 명령을 내려 “급하지않은 일은 뒤로 미루라”고 명하고, 사자를 군, 읍에 보내어 농사와 누에치기를 권장하였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제7평원왕 25년

(2) 후한 요동 태수 최식이 말하기를 “지금 요동에서는 쟁기로 농사를 짓는데 끌채의 길이가 4척이어서 서로 도는 데 방해가 된다.  두 마리 소를 사용하는 데 두 사람이 끌고 한 사람이 쟁기를 잡고 간다. 그 뒤에 한 사람이 씨를 뿌리고 한 사람이 덮는다. 대개 소 두 마리와 여섯 사람이 함께 일한다.”하였다. 

<제민요술> 경전제일

(2) 그들의 풍습에는 음식은 아껴서 먹으나 궁실은 잘지어 치장한다. 살고 있는 좌우에 큰 집을 세우고 귀신에게 제사 지낸다. 또 영성과 사직에도 제사를 지낸다. 그 나라 사람들은 성질은 포악하고 급하며 노략질하기를 좋아한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고구려

(3) 백성은 모두 토착민으로 산골짜기를 따라 거주하고, 삼베와 비단 그리고 짐승 가죽으로 옷을 해 입었다. 토질이 척박하여 양잠과 농업으로는 자급하기에 부족한 까닭에 사람들은 음식을 절약한다. 

<위서> 열전 고구려

(4) 나라 안의 대가들은 농사를 짓지 않고 앉아서 먹는 자인데 만여 명이나 된다. 하호는 먼 곳에서 양식, 고기, 소금을 운반하여 그들에게 공급한다. 

<삼국지위서> 동이전 고구려

(5) 9월, 왕이 군사 3만 명을 이끌고 현도군에 침입하여 8천 명을 사로잡아 평양으로 옮겼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 제5 미천왕 3년

 (6) 6월, 왕이 군사 4천 명을 내어 마침내 요동과 현도를 함락시키고 남녀 l만명을 사로잡아왔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제6 고국양왕 2년

 (7)  8월, 왕이 백제와 패수에서 싸워 크게 이기고 포로 8천 명을 사로잡았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 제6광개토왕 4년 

  (8) 9월, 왕이 병사 3만 명을 거느리고 백제를 침입해서 수도인 한성을 함락시키고, 백제왕 부여경(개로왕)을 죽였으며 포로로 남녀 8천 명을 사로잡았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제6장수왕 63년

  (9) 감옥이 없으므로 죄있는 사람은 제가들이 의논하여 죽이고 처자는 모두 종으로 삼았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고구려

  (10) 소나 말을 죽인 자는 소나 주인 집의 노비로 삼는다.

<구당서> 동이열전 고구려

  도둑질한 자는 도둑질한 물건의 l0여 배를 징수하였다. 만일 집이 가난해서 이를 갚을 수 없거나 공적 사적으로 빚을 진 자는 모두 그 자녀를 노비로 보내어 보상한다.

                                                        <주서> 이역열전 고구려

  (11) 법률을 보면, 반란을 꾀하는 자가 있으면 많은 사람을 불러모아 놓고, 횃불을 들고 서로 앞다투어 지지게 하여, 온몸이 진무른 뒤에 목을 베고 집의 재산은 몰수한다. 성을 지키다 항복한 자, 전쟁에서 패배한 자, 사람을 죽이거나 겁탈한 자는 목을 벤다. 물건을 도둑질한 자는 그 물건의 l2배를 물어주게 하고, 소나 말을 죽인 자는 노비로 삼는다. 대체로 법을 엄격하게 적용하므로 범하는 자가 적으며, 심지어는 길가에 떨어진 물건도 줍지 않는다.                                

<구당서> 동이열전 고구려

  (12) 세금은 명주, 베 및 곡식을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종류에 따라 빈부의 차등을 헤아려 받아들였다.

<주서> 이역열전 고구려

  (13) 한 사람이 내는 세금이 포목 다섯 필에 곡식 다섯 섬이며, 일정한 일이 없는 떠돌이는 3년에 한 번 세금을 내는데 열 사람이 함께 고운 포 한 필을 낸다. 조는 상호(上戶)는 한 섬이고 그 다음은 7말이고 하호는 5말을 낸다.

<수서> 동이열전 고구려


  (14) 12월, 왕이 질산의 북쪽에서 사냥을 하면서 닷새가 되도록 돌아오지 아니하였다. 대부인 협부가 간하되 ‘왕께서 새로 도읍을 옮기어 백성들이 아직 안심하지 못하고 사니 마땅히 나라 일에 마음을 부지런히 쓰실 때 입니다. 그런데 이는 생각지 아니하고 사냥에만 몰두하시니, 만일 잘못을 고쳐 스스로 새로운 마음을 가지지 않으면 정치가 문란해지고 백성들이 흩어져서 선왕의 업적이 땅에 떨어질까 염려됩니다.’고 하였다. 왕이 크게 노하여 협부의 벼슬을 빼앗고 관아의 장원을 관리하게 하였더니, 협부가 분하게 여겨 남쪽의 한(韓)으로 달아났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제1 유리왕 22년

  (15) 3월 고위 관리인 구도, 일구, 분구 등 3인을 내쫓아 서인(庶人)으로 삼았다. 이 3인은 비류부의 장이었는데, 그 바탕이 탐욕스럽고 깨끗하지 못해 남의 처나 첩, 소나 말, 재물을 빼앗아 제멋대로 하고 혹 주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즉시 매질하여 때리기 때문에 당한 사람들은 모두 분하게 여겨 죽이고자 하였다. 왕이 이를 듣고 그들을 죽이려고 하다가 동명왕의 옛 신하이었으므로 차마 죽이지 못하고 내쫓는 데 그쳤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제2 대무신왕 l5년

  (16) 왕이 날로 포악을 더하여 항상 사람을 깔고 앉으며 누울 때는 사람을 베개삼아 베었다. 만약 움직이든지 하면 죽이고 용서하지 아니하며, 신하로서 간하는 자가 있으면 활을 당겨 쏘아 죽였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제2모본왕 4년

  (17) 9월, 증외대자 패자인 어비유와 평좌인 좌가려는 모두 왕비의 친척으로 권력을 잡았다. 그들의 자식들도 그 세력을 믿고 교만하고 사치스러워 남의 자녀를 약탈하고 전택을 마구 빼앗으니 나라 사람들이 모두 분노하였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제4 고국천왕 12년

  (18) 9월, 서리와 우박으로 곡물이 상하여 백성이 굶주렸다. 10월, 왕이 궁실을 증축하였는데 자못 화려하고 사치스러우니 백성이 주리고 또 피곤하므로 여러 신하들이 자주 간언하였으나 왕은 듣지 않았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제5봉상왕 7년

  (19) 8월에 왕이 국내의 남녀 l5세 이상인 사람을 징발하여 궁실을 수리하니, 백성은 식량의 부족과 노역의 괴로움으로 인해 이리저리 떠돌아다니게 되었다. 창조리가 간하되 ‘자연재해가 잇따라 닥치고 흉년이 들어 백성이 살 곳을 잃어버려 장정들은 사방으로 떠돌고 늙은이, 어린아이는 구렁텅이에 빠질 지경입니다. 이때야말로 하늘을 두려워하고 백성을 근심하며 반성할 때인데도 대왕께서는 이를 생각하지 아니하시고 사람들을 토목공사에 몰아내어 괴롭게 하시니 백성의 부모된 뜻에 너무도 어긋납니다. 더욱이 이웃에는 강적이 있으니 만일 우리의 피폐한 틈을 타서 쳐들어오면 사직과 백성을 어찌 하오리까. 원컨대 대왕은 깊이 생각하소서’ 하였다. 왕이 노하여 말하되 ‘임금이란 백성이 우러러 보는 바이다. 궁실이 응대하고 수려하지 못하면 위엄을 보일 수 없다. 지금 국상(고구려 초기의 최고 관직)이 나를 나무라는 것은 무릇 백성의 칭송만을 구하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창조리는 ‘임금이 백성을 돌보지 아니하면 仁(인)이 아니요. 신하가 임금께 간하지 아니하면 충(忠)이 아닙니다. 신이 이미 국상의 자리에 있는 이상 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은 웃으며 ‘국상이 백성을 위하여 죽으려 하는가? 다시 말이 없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창조리는 왕이 고치지 못할 것을 알고 또 자신에게 해가 미칠까 염려하여 물러 나와, 여러 신하와 꾀를 모아 왕을 자리에서 몰아내고 을불을 맞아 왕(미천왕)을 삼았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제5 봉상왕 9년

  (20) 고구려 연개소문은 막리지가 된 후 정치를 제멋대로 하였으며, 위엄을 나타내기 위하여 매우 힘썼다. 몸에는 다섯 자루의 칼을 차고 다니며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그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게 하였으며, 말을 타고 내릴 때는 귀족이나 장수들을 땅에 엎드리게 하여 발판으로 삼았다. 또한 다닐 때는 반드시 대오를 갖추고 앞에서 인도하는 자가 큰소리로 외치면 사람들을 모두 구렁텅이나 골짜기를 가리지 않고 피하게 하니 나라 사람들이 모두 괴롭게 여겼다.

<삼국사기> 권49 열전 제9개소문

 (21) 토지가 척박하여 곡식이 넉넉하지 못하나 백성들은 근검절약하고 궁실 가꾸기를 즐겨하며. 궁실 좌우에 큰 집을 짓고 귀신과 영성 등에 제사를 지낸다. .....나라에는 큰 창고를 설치하지 않고 대신에 집집마다 작은 창고를 만들도록 하였다. 이 작은 창고를 이름하여 부경이라고 불렀다. 고구려에서는 혼인이 정하여지면 신부집에서는 살림집의 뒤에 따로 작은 집을 짓고 신랑이 들어와 살게 하였다. 그래서 이 작은 집을 서옥(壻屋)이라고 불렀다.

<삼국지> 동이열전30 고구려

 (22) 평양성은 동서의 길이가 6리 가량이며. 남쪽은 패수와 닿았다. 성 안에는 큰 창고가 있어 군수 물자를 비축하여 두었다가 적이 쳐들어오면 성문을 닫고 지켰다. 임금은 왕성 옆에 따로 집을 지어 두었으나 늘 살지는 않았다.

<주서> 열전4l 이성상 고구려

 (23) 7월, 서리가 내려 곡물이 상하니 백성이 굶주리므로 창고를 열어 백성에게 곡식을 나누어 주었다. 겨울 10월에 왕이 질양에서 사냥하실 때 길가에서 어떤 사람이 앉아 우는 것을 보고 어째서 우느냐고 물었다. 대답하되 ‘신은 가난하여 품팔이로 어머니를 봉양하였는데, 올해는 흥년이 들어 품팔이를 할 수 없고 한 되, 한 말의 양식도 얻어 쓸 수 없어 웁니다.’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아내가 백성의 부모가 되어 백성을 이러한 극한 지경에 이르게 하니 나의 죄다.’ 하고 의복과 먹을 것을 주어 살아가게 했다. 그리고 곧 내외 관청에 명하여 홀아비, 과부, 고아, 그리고 늙고 병들었거나 가난하고 궁핍하여 스스로 살아가지 못하는 자들을 조사하여 구제토록 하였다. 또 소속 관리에게 명하여 매년 봄 3월로부터 가을 7월까지 관청의 곡식을 내어 백성의 식구가 많고 적음에 따라 등급을 정하여 꾸어 주고 겨울 l0월에 갚게 하는 상설 규정을 만드니 내외가 크게 기뻐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제4 고국천왕 16년

 (24) (가) 대대로는 제 1품에 해당하는 벼슬로 국사를 총괄하였으나, 3년마다 교체하였다. 만일 마땅한 인물이 없어 서로 숭복치 못할 때에는 각기 사병을 동원하여 싸워 이기는 자가 되었다. 그 때 왕은 겁이 나서 궁을 닫고 자신만을 지키며 이를 막지 못하였다.

                                                              <구당서, 고구려>

(1) 옛날 시조 추모왕(주몽)이 나라를 세웠다. 시조는 북부여에서 나셨는데, 천제의 아들이요, 어머니는 하백의 딸이다. 알을 깨고 태어나셨는데 태어날 때부터 거룩한 덕성을 가지셨다. 왕업을 계승하여 17세손인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약칭:광개토대왕)에 이르렀다. 18세에 왕위에 오르시니, 호를 영락태왕이라 하였다. 39세에 돌아가시니, 비를 세워 그 업적을 기록하여 후세에 남긴다.

(2) 영락 5년 을미년에 왕께서 비려가 도발을 그치지 아니하므로 친히 군사를 이끌고 토벌하시니 부산을 지나 염수가에 이르러 3개 부락 6, 7 백의 영을 깨뜨리고 수많은 소, 말, 양들을 획득하였다.

백잔(백제를 낮추어 부르는 이름)과 신라는 예부터 속민이었기 때문에 조공을 하여 왔었다.  그런데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 백제, □□, 신라를 파하여 신민으로 하였다.  이에 왕께서 친히 수군을 이끌고 백제를 토벌하였다.

  (3) 왕께서 생전에 말하시기를, “선왕들께서는 다만 구민으로 하여금 묘를 지키고 청소케 하였으나, 나는 구민들이 약하게 될까 염려되니 내가 몸소 다니며 약탈한 한, 예에서 새로이 뽑아 이들로 하여금 묘를 지키고 청소하도록 하라”고 하셨다. 이에 한과 예에서 새로 220가(호)를 뽑고 묘지기의 규정을 잘 모를 것이 염려되어 다시 구민 110가를 뽑았다.

<광개토대왕릉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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