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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풀이/히스토리아 역사 스토리

1876년 조일수호조규(강화도 조약)은 어떤 조약인가?

1876년 조일수호조규(강화도 조약)은 어떤 조약인가?

이번 장에서는 우리나라가 드디어 개항을 이룬 강화도 조약(조일수호조규)의 내용과 그 의미를 한 번 포스트 해보겠습니다. 강화도 조약... 모두 알 것 같으면서도 사실 잘 모르고 있었던 내용이 많은 부분입니다.

1. 조약을 맺게 된 배경 중 국내적인 배경을 살펴보자.

조일수호조규를 맺게 된 배경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한마디로는 대답하기 어렵습니다. 조선 내부의 상황과 일본 내부의 상황이 복잡하게 얽히고 꼬여있기 때문이지요. 그래도 뭔가 핵심적인 <키워드>는 있을텐데... 키워드를 찾아봅시다.

먼저, 조약을 맺은 조선 내부적인 키워드는 <통상개화론>입니다. 보통 이 <통상개화론>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강화도 조약이 꼭 일본의 강요라고 보기에는 문제가 있으며, 조선이 스스로 개화하려는 의지가 있다는 점을 강조하곤 합니다.

통상개화론이란, 흥선대원군의 10년간 장기집권(1863-1873)을 겪으면서 쇄국정책을 우려했던 개화파들이 흥선대원군이 물러난 이후 목소리를 높였기 때문에 대두한 이론입니다. 실제, 조선 후기의 박지원, 박제가 계통으로 이어지는 상공업 중심의 실학자들의 계보가 흥선대원군 시기 박규수 등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들은 양반뿐 아니라 기술학에 능통한 중인들도 다수 포함된 신진 개화주의자들이었고, 이들이 개화라는 단어를 알게 된 것은 조선 후기 <북학파> 등의 상공업 중심 실학자들의 노력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통상개화론자들은 개항과 개화라는 것을, 인맥상 또는 학맥상 조선 후기 실학과 연계하려는 시도가 많습니다. 그러나, 1863년 이후 대원군의 집권기에는 감히 개화라는 말을 꺼내지도 못합니다. 대원군의 철저한 쇄국정책 앞에 개화나 개항이라는 말을 꺼내어 들었다가는 바로 <서양 양놈과 마찬가지인 역적> 취급을 당하기 때문이죠.

따라서 통상개화론자들은 대원군이 물러난 1873년 이후 개항, 개화라는 말을 꺼내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특히 청나라의 양무운동 등의 개화운동을 보면서 조선사회도 문호 개방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되었습니다. 물론, 당시 조선이 개방의 준비는 전혀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개화론자들은 중국과의 교류를 통하여 개화가 무엇인지를 점차 알게 됩니다. 개화라는 말의 정의를 내린 다음 글을 한 번 볼까요?

객이 나에게 물었다. <개화는 무엇이며, 어떠한 일을 말하는 것인가?>

내가 답하였다. <만물의 뜻을 깨달아 천하의 일을 이루는 것이며(개물성무 : 開物成務), 백성을 교화하여 풍속을 바로잡는 것(화민성속 : 化民成俗)이 바로 개화이다.>

- 황성신문 논설, 광무 2년(1898) 9월 23일 -

무릇 개화란 인간의 온갖 만물이 가장 아름다운 경지에 이르는 것을 일컫는데, 개화에는 인륜 개화, 학술 개화, 정치 개화, 법률 개화, 기계 개화, 물품 개화가 있다. 인륜 개화는 천하만국을 통하여 그 동일한 규모가 천만년을 지나도 장구함이 변하지 않는 것이다. 정치 이하의 여러 개화란 시대에 따라서 변개하기도 하고 지방에 따라 다르기도 하다. 그러므로 옛날에는 맞았지만 지금은 맞지 않으며, 저쪽에는 좋지만 이쪽에는 좋지 않은 것도 있어, 곧 고금의 형세를 살피고 피차 사정을 비교하여 장점을 취하고 단점을 버리는 것이 곧 개화의 큰 도인 것이다.

- 서유견문 제 14편, 개화의 등급 -

여기서 우리는 개화란 단어를 개항기 사람들이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당시에 말한 개화란, 서양을 단지 보고 베낀다는 것이 아니라 <만물을 알고, 백성을 교화하는 것>이라고 정의된 것입니다. 또, 개화란 서양의 것을 무분별하게 베끼는 것이 아니라, 정신, 물질, 사상 등 여러 개화가 있으며, 그 중 서양과 비교하여 장점만을 취하는 것이 진정한 개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선조들이 생각한 개화란, 서양의 양무운동 등의 개화운동을 보고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선별해서 얻는 것>을 개화로 여겼다는 것을 알수 있네요. 당시 개화론자들은 서양처럼 공화제를 한다던가, 혁명이 필요하다던가 하는 것은 대부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최소한 김옥균의 감신정변 이전의 개화란, 문호개방을 통한 부국자강을 추구한 것이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결국 여기서 다룬 단 1가지의 내용은 강화도 조약에서 우리가 스스로 <개항, 개화>하려는 의지가 있었다는 것이군요. 우리는 개화사상에 있어 내제적이고, 주체적인 발전 과정 속에서 스스로 개항하려는 분위기가 있었다는 점도 알아야 할 것입니다.

2. 조약을 맺게 된 배경 중 일본과의 문제점들을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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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조약에서 가장 핵심적인 배경이 되는 것은 누가 뭐래도 일본과의 <서계>문제입니다. 일본과의 서계문제는 <흥선대원군>을 다룬 지난 장에서 아주 상세히 다루었습니다.

간단히 복습할까요? 1860년대 후반, 우리 나라는 강력한 쇄국정책으로 프랑스, 미국 등을 물리쳤습니다. 반면, 일본은 미국에게 굴복하여 미일수호조약을 맺고 개항한 뒤 <메이지 유신>으로 국가체제를 황제 일원적인 중앙집권체제로 개편합니다. 즉, 우리는 흥선대원군의 강력한 중앙집권체제, 일본은 강력한 황제집권체제가 성립된 것이지요. 이 두가지 체제는 필연적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는데, 이 두 국가의 충돌에서 기분이 나쁜 건 흥선대원군이었습니다.

일본은 조선에 보내는 편지(서계)에다가 <일본 천황, 일본 황실, 일본제국> 등의 언어를 늘어놓습니다. 300년간 통신사를 파견하여 일본 문화를 돕고 있다고 생각한 조선 입장에서는 미칠 노릇이었습니다. 흥선대원군 정권은 서계가 불손하다며 일본과의 통교를 거부하면서, 일본도 미국과 협상한 오랑캐 놈들이라고 말합니다. 일본과 서양은 같다는 것을 흔히 <왜양일체론>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 통상개화론자들은 일본의 서계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 이유는, 일본이 서계를 일부러 버릇없게 쓰는 이유는 침략의 구실을 노리는 것이므로 우리는 서계는 받되 일본에 강경하게 나가야 한다는 논리였지요. 하지만, 흥선대원군은 일본과의 국교를 완전 단절하려고 합니다.

일본에서는 이 서계 문제를 두고 몇 년간 조선과 교섭을 했으나 결렬되자 <정한론>이 대두합니다. 정한론이란, 조선을 바로 정복하자는 논의입니다. 특히,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은 막부가 무너지고 무사계급이 빈곤해졌는데, 이러한 무사계급의 불만을 대외로 돌릴 필요가 있었습니다. 임진왜란 때 도요토미가 쳐들어온 이유중 하나가 국내세력의 불만을 국외로 돌리려는 것이었잖아요? 그것과 같습니다. 일본은 국민들에게 공공연하게 침략의 정당성을 광고하면서 조선 침략을 하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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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침략의 정당성이란, <대동단결의 아시아>라는 광고였습니다. 일본이 서양의 침략에 맞서 아시아를 지켜야  할 의무가 있는데, 서양과의 싸움에서 이기려면 서양처럼 식민지가 필요하고, 그 식민지는 조선이 가장 적합하다는 광고입니다. 이것은 사이고 다카모리가 주장하면서 일본 전역에 퍼졌습니다.

그러나 이 <정한론>은 광고효과로만 활용될 뿐 실제 일본 정부 내에서는 공식화되지 못합니다. 일본 지배층에서는 정한론보다는 이토 히로부미의 <점진론>이 더 효과가 있었습니다. 점진론이란, 당장 조선을 치기보다는 일본의 조금씩 힘을 키워나가면서, 조선을 조금씩 잠식해들어가자는 논의입니다. 실제, 임진왜란의 실패를 경험한 일본으로서는 위험부담이 큰 정한론보다는 점진론이 더 효율적이었던 듯 싶습니다. 점진론을 주장한 이토 히로부미는 이후 조선을 정복한 이후 최고의 <조선 총독부 통감>이 되어 조선 최고의 실세가 됩니다. 물론, 안중근 의사한테 죽게 되지만요. (이토는 우리에게는 역적, 일본으로서는 영웅이라고 할 인물이네요.)

3. 운요호 사건이 터지다.

운요호 사건은 점진론이 대세를 이루던 1875년 경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1875년은 대원군이 물러나고, 명성황후(민씨정권) 집단이 개화정책을 실시하려고 준비하던 시기입니다. 당시 일본의 목적은 조선을 침략하기 위한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었고, 우리의 목적은 개화를 통해 외국의 문물을 받아들이는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하필 우리의 개화 상대가 일본이었고, 일본은 우리에게 개화의 이득을 주는 나라가 아니라, 침략을 통한 우리의 이권침탈을 목적으로 했다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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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 운요호>

1875년의 운요호는 3척의 군함을 끌고 옵니다. 이 운요호는 식량과 먹을 것이 떨어져서 조선에 잠시 왔다간다는 구실로, 불을 지르고 사람을 죽이며 약탈을 자행합니다. 이 운요호가 남의 나라에 와서 미친 짓을 한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미친 짓을 하고 있으니, 너희는 빨랑 와서 우리랑 협상을 하던지, 더 미치는 꼴을 보고 있던지 하라는 것이지요. 마침 개화에 관심이 있었던 우리 민씨정권은 일본과의 협상을 시작합니다. 그럼 아래 사료 내용을 한번 볼까요?

일본의 강화도 침략

(1) 식량이나 음료수 양은 항해 계획과 기항지를 생각해서 전문적인경리 장교가 미리 준비해 두지 않을 수 없다. 식수를 구하려고 강화도에 접근했다는 것은 구실에 불과할 것이다.

- 山邊健太郞 <日本の韓國倂合>, 태평출판사, 1966 -

(2) 구로다 기요다카에게 내린 일본 정부의 비밀 훈령

조선이 그들의 주장을 굽히지 않거나 거짓을 꾸며 도저히 일본 요구에 응하지 않을 때에는, 가령 헌저하게 난폭한 행동이나 능멸하는 따위는 없더라도, 사절은 두 나라의 화호를 단념하고 우리 정부에서 모종의 별도 조치가 있을 것임을 전하고 교섭을 중단하는 문서를 던지고 조속히 귀국하여 다시 명령을 기다려 사절의 체통을 잃지 말 것이다.

- 일본외교문서 8권 -

(3) 우리나라와 일본은 300년 동안 통신사를 교환하고 왜관을 설치하여 무역하여왔다. 비록 수년 이래 서계를 가지고 서로 버티어 왔으나 우호 관계를 존속하려는 처지에서 통상을 굳이 거절할 필요가 없으므로 통상 조약 등의 절차를 잘 협상하여 양국의 편의에 맞춰 조치하라.

- 승정원일기, 고종 13년 1월 24일 -

문서를 보면 양국의 입장이 너무 다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일본은 만약 협상이 결렬되면 바로 돌아가서 전쟁 준비를 할 태세였습니다. 우리는 일본의 속셈도 모른 채 단순히 <개화정책>을 실시할 생각으로 나갔던 거죠. 일본은 이미 여러 나라와 불평등 조약을 맺어보았습니다. 우리는 개방 조약이 뭔지도 모르면서 남의 것을 흉내내서 하려고 했습니다. 그것도 일부 개화세력만이 주도해서 협상을 하려고 했던 것이지요.

4. 조일수호조규의 전문 내용

강화도 조약(조일 수호 조규)

대일본국과 대조선국은 원래부터 우의를 두터이 하여온 지가 여러 해 되었으나 지금 두 나라의 우의가 미흡한 것을 고려하여 다시 옛날의 좋은 관계를 회복하여 친목을 공고히 한다. 이는 일본국 정부가 선발한 특명 전권 변리 대신인 육군 중장 겸 참의 개척 장관 흑전청륭(구로다 기요타카)과 특명 부전권 변리 대신인 의관 정상형(이노우에 가오루)이 조선국 강화부에 와서 조선국 정부가 선발한 판중추부사 신헌과 부총관 윤자승과 함께 각기 지시를 받들고 조항을 토의 결정한 것으로써 아래에 열거한다.

제1조.

조선국은 자주 국가로써 일본국과 동등한 권리를 보유한다. 이제부터 양국은 화친한 사실을 표시하려면 모름지기 서로 동등한 예의로 대우하여야 하고 조금이라도 상대방의 권리를 침범하거나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우선 이전부터 사귀어온 정의를 손상시킬 우려가 있는 여러 가지 규례들을 일체 없애고 되도록 너그러우며 융통성있는 규정을 만들어서 영구히 서로 편안하도록 한다.

제2조.

일본국 정부는 지금부터 15개월 뒤에 수시로 사신을 파견하여 조선국 경성에 가서 직접 예조판서를 만나 교제 사무를 토의하며 해당 사신이 주재하는 기간은 다 그때의 형편에 맞게 정한다. 조선국 정부도 또한 수시로 사신을 파견하여 일본국 동경에 가서 직접 외무경을 만나 교제 사무를 토의하며 해당 조선국 사신이 주재하는 기간도 역시 그 때의 형편에 맞게 정한다.

제3조.

이제부터 두 나라 사이에 오고가는 공문은 일본은 자기 나라 글을 쓰되 지금부터 10년 동안은 따로 한문으로 번역한 것 한 본을 첨부하며 조선은 한문을 쓴다.

제4조.

조선국 부산 초량항에는 이미 오래전부터 일본 공관이 세워져있어 양국 백성들의 통상 지구로 되어왔다. 지금은 응당 종전의 관례와 세견선 등의 일은 없애버리고 새로 만든 조약에 준하여 무역 사무를 처리한다. 조선국 정부는 제5조에 실린 두 곳의 항구를 개항하여 일본국 백성들이 오가면서 통상하게 하며 해당 지방에서 세를 내고 이용하는 땅에 집을 짓거나 혹은 임시로 거주하는 사람들의 집을 짓는 것은 각기 편리대로 하게 한다.

제5조.

경기, 충청, 전라, 경상, 함경 5도 중에서 연해의 통상하기 편리한 항구 두 곳을 골라서 지명을 지정한다. 개항 기간은 일본 역서로는 명치 9년 2월, 조선 역서로서는 병자년 2월부터 계산하여 모두 20개월 안으로 한다.

제6조.

이제부터 일본국의 배가 조선국 연해에서 혹 큰 바람을 만나거나 혹 땔 나무와 식량이 떨어져서 지정된 항구까지 갈 수 없을 때에는 즉시 가닿은 곳의 연안 항구에 들어가서 위험을 피하고 부족되는 것을 보충할 수 있으며 배의 기구를 수리하고 땔나무를 사는 일 등은 그 지방에서 공급하며 그에 대한 비용은 반드시 선주가 배상해야 한다. 이러한 일들에 대해서 지방의 관리와 백성들은 특별히 진심으로 돌보아서 구원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데가 없도록 하며 보충해 주는 데서 아낌이 없어야 한다. 혹시 양국의 배가 바다에서 파괴되어 배에 탔던 사람들이 표류되어 와닿았을 경우에는 그들이 가닿은 곳의 지방 사람들이 즉시 구원하여 생명을 건져주고 지방관에 보고하며 해당 관청에서는 본국으로 호송하거나 가까이에 주재하는 본국 관리에게 넘겨준다.

제7조.

조선국 연해의 섬과 암초를 이전에 자세히 조사한 것이 없어 극히 위험하므로 일본국 항해자들이 수시로 해안을 측량하여 위치와 깊이를 재고 도면을 만들어서 양국의 배와 사람들이 위험한 곳을 피하고 안전한 데로 다닐 수 있도록 한다.

제8조.

이제부터 일본국의 정부는 조선에서 지정한 각 항구에 일본 상인을 관리하는 관청을 수시로 설치하고 양국에 관계되는 안건이 제기되면 소재지의 지방 장관과 만나서 토의처리한다.

제9조.

양국이 우호관계를 맺은 이상 피차 백성들은 각기 마음대로 무역하며 양국관리들은 조금도 간섭할 수 없고 또 제한하거나 금지할 수도 없다. 만일 양국 상인들이 값을 속여서 팔거나 대차료를 물지 않는 등의 일이 있으면 양국 관리들이 빚진 상인들을 엄히 잡아서 빚을 갚게 한다. 단 양국 정부가 대신 갚아줄 수는 없다.

제10조.

일본국 사람들이 조선국의 지정한 항구에서 죄를 저질렀을 경우 만일 조선과 관계되면 모두 일본국에 돌려보내어 조사 판결하게 하며 조선 사람이 죄를 저질렀을 경우 일본과 관계되면 모두 조선 관청에 넘겨서 조사 판결하게 하되 각기 자기 나라의 법조문에 근거하며 조금이라도 감싸주거나 비호함이 없이 되도록 공평하고 정당하게 처리한다.

제11조.

양국이 우호관계를 맺은 이상 따로 통상 규정을 작성하여 양국 상인들의 편리를 도모한다. 그리고 지금 토의하여 작성한 각 조항 중에서 다시 보충해야 할 세칙은 조목에 따라 지금부터 1개월 안에 양국에서 따로 위원을 파견하여 조선국의 경성이나 혹은 강화부에서 만나 토의결정한다.

제12조.

이상의 11개 조항을 조약으로 토의 결정한 이날부터 양국은 성실히 준수시행하며 양국 정부는 다시 조항을 고칠 수 없으며 영구히 성실하게 준수함으로써 우의를 두텁게 할 것이다. 이를 위하여 조약 2본을 작성하여 양국에서 위임된 대신들이 각기 날인하고 서로 교환하여 증거로 삼는다.

대조선국 개국 485년 병자년 2월 2일

대관 판중추부사 신헌

부관 도총부 부총관 윤자승

대일본 기원 2536년 명치 9년 2월 6일

대일본국 특명 전권 변리 대신 육군 중장 겸 참의 개척 장관 흑전청륭(구로다 기요타카)

대일본국 특명 부전권 변리 대신 의관 정상형(이노우에 가오루)

- 국회도서관 입법조사국, 구한말조약휘찬 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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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 조약을 체결할 때 사진>

   5. 이 조약... 뭔가 너무 허전하다.

이 조약 12개의 전문을 보면, 우리가 너무 순진해서 양의 탈을 쓴 늑대에게 간식거리로 몸을 바치려고 한 조약임을 알 수 있습니다.

1조의 <조선은 자주국이다>라는 말... 너무 좋은 말입니다. 우리는 여기에 꽝! 도장 찍습니다. 그런데 이건 무슨 뜻? 사실 이것은 조선이 자주국이니 중국 <청나라>는 조선에 간섭하지 말고 가라는 뜻입니다. 일본이 조선을 차지하겠다는 속셈을 우리에게 들키지 않고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지요.

2조의 수신사 파견은 조선시대 통신사만을 우리가 파견했던 것에 비하면 전세 역전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4조의 조차지 설정과 개항부분은 우리의 항구부터 일본이 잠식하겠다는 점진론의 내용을 보여줍니다. 7조에서는 아예 일본이 우리 영해를 측량하면서 영해권을 침범하고 있으며, 10조에서는 불평등 조약의 대표적 사례인 <치외법권>이 나옵니다.

치외법권이란, 일본인이 조선에서 범죄를 저질러도 일본인에게 재판을 받는 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일본에게 우리의 권리가 심하게 훼손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사실 지금도 한미상호방위조약상 미국군인이 우리 여중생을 죽이면 미국에서 재판받는 불합리한 주권침해는 계속되고 있죠...)

결과적으로 이 조약.... 완전 불평등 조약입니다. 일본은 불평등 조약에 몇 번 당해보고 개항한 나라라 이러한 조약에 대해 잘 알고 있지만, 우리는 너무 순진하게 첫 도장을 어이없게 찍어준 것입니다. 이 조약으로 일본 <점진론>은 크게 힘을 얻게 됩니다. 우리는 뒤늦게 깨닫고 조약에 대한 일부 내용을 수정하려고 하지만 거부당합니다. 거부당한 조약 재조정 내용을 잠깐 볼까요?

수호 조규 체결시 조선의 추가 요구 사항

1. (개항장 체류 일본인) 상평전 사용을 금지할 것.

2. 미곡 교역을 금지할 것

3. 교육연 물물교환만 하고 외상선매(후불)와 산채취식(이자놀이)을 금지할 것

4. 조선은 일본과 수교할 뿐이니 타국인이 섞여 오는 것을 금지할 것

5. 아편과 서교(천주교)는 국법으로 엄금하니, 아편과 서교 관련 서적 수입을 금지할 것

6. 양국의 망명자를 은닉하거나 표류를 가장하여 잠입하는 자는 반드시 적발하여 송환할 것

- 왜사일기, 고종 13년 1월 26일 -

위 내용, 일본이 당연히 승인하지 않습니다. 기껏 속여서 도장 찍었는데, 다시 조약을 재조정할 이유가 없죠. 우리는 이 조약을 시작으로 세계 각국과 아주 불평등한 내용의 조약을 비슷하게 체결합니다. 이유는 대부분의 나라와 조약을 맺을 때 <최혜국 대우>라는 부분이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최혜국 대우란, 조약을 맺는 국가가 다른 국가보다 우선시 되는 내용으로 대우받는다는 조항입니다. 만약, 미국이랑 조약을 맺을 때 <최혜국 대우>라는 말이 들어가면, 일본과 맺었던 조약 중 미국에게 유리한 부분의 조약은 자동 추가되는 것이지요. 미국이 조선의 <최혜국>, 즉 가장 혜택을 받도록 상호 조약을 맺는 국가로 조약을 체결하는 것이니까요.

이 조약은 우리에게 근대 서양문물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주기도 하지만, 제국주의 국가에게 우리가 침탈당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조약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세계 자본주의에 편입되었습니다. 그러나, 제국주의 국가에게 침탈당한 국가인 일본에게 다시 침탈당하는 국가가 되면서 엄청난 시련이 시작됩니다. 이유는 다른 제국주의 국가와는 달리 일본은 산업혁명도 늦고, 산업기반도 약하며, 다른 제국주의 국가와의 최혜국 조약을 맺은 국가이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수탈은 차후 다른 어떤 국가보다도 심한 침탈로 이어집니다. 일본과의 강화도 조약을 서양이 중국과 맺은 난징조약과 비교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듯 합니다. 중국사할 때 한번 시도해 봐야겠네요.

6. 조일수호조규부록(강화도 조약의 속약) - 일본은 더욱 더 침탈하다.

조일 수호 조규 속약

제 1조. 부산, 원산, 인천항의 강행이정을 사방 50리로 하고, 1년 뒤에 양화진을 개시한다.

제 2조. 일본 공사 영사와 수행원이 조선 내지에서 자유롭게 여행을 한다.

- 고종실록 권 19, 고종 19년 7월 17일 -

일본과 맺은 강화도 조약이 상징적으로 우리 개항과 제국주의 침탈을 상징한다면, 다시 일본과 맺은 이 조일수호조규(강화도 조약)의 속약은 실제 우리 경제에 미친 파급효과가 큽니다. 이 조일 수호 조규 속약과 조일통상장정이라는 2건의 문건은 강화도 조약 이후 6년뒤 체결되는데, 이 조약은 일본 점진론의 제 2단계라고 보시면 됩니다.

먼제, 강화도 조약 때 단순히 항구에서 무역하던 것을 개항장 이내로 확장합니다. 즉, 개항장에서의 일본인 통행거리를 설정하고 10-100리 정도의 거리에서 일본인들이 장사를 시작합니다. 이로서 우리 전통의 상인인 객주, 여각 등은 몰락하기 시작합니다.

또 개항정에서 양곡의 수출입을 허용하고, 일본화폐를 사용하는 것도 허락하며, 일본 물품에 대하여 관세를 매기지 않는다는 것도 추가됩니다. 이로서 우리 경제는 차츰 일본 경제에 잡아먹히게 되면서 1880년대 중반, 일본의 경제침투가 심화됩니다. 1880년대 중반에 일본은 조선시대 이래 조선 무역의 주도권을 잡고 있던 청나라에게 도전하는 형세로 발전하게 되고, 조선에서 청과 일본은 경제문제를 두고 심각한 대립을 연출합니다. 이 떄부터 이미 청일전쟁의 분위기는 돌기 시작한 것이죠.

자 이제 조선은 개화를 해 버렸습니다. 그럼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다음 장에서는 민씨 정권의 개화 정책의 방향과 <조선책략>의 활용에 대한 이야기를 전개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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