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6년 조일수호조규(강화도 조약)은 어떤 조약인가?
이번 장에서는 우리나라가 드디어 개항을 이룬 강화도 조약(조일수호조규)의 내용과 그 의미를 한 번 포스트 해보겠습니다. 강화도 조약... 모두 알 것 같으면서도 사실 잘 모르고 있었던 내용이 많은 부분입니다. 1. 조약을 맺게 된 배경 중 국내적인 배경을 살펴보자. 조일수호조규를 맺게 된 배경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한마디로는 대답하기 어렵습니다. 조선 내부의 상황과 일본 내부의 상황이 복잡하게 얽히고 꼬여있기 때문이지요. 그래도 뭔가 핵심적인 <키워드>는 있을텐데... 키워드를 찾아봅시다. 먼저, 조약을 맺은 조선 내부적인 키워드는 <통상개화론>입니다. 보통 이 <통상개화론>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강화도 조약이 꼭 일본의 강요라고 보기에는 문제가 있으며, 조선이 스스로 개화하려는 의지가 있다는 점을 강조하곤 합니다. 통상개화론이란, 흥선대원군의 10년간 장기집권(1863-1873)을 겪으면서 쇄국정책을 우려했던 개화파들이 흥선대원군이 물러난 이후 목소리를 높였기 때문에 대두한 이론입니다. 실제, 조선 후기의 박지원, 박제가 계통으로 이어지는 상공업 중심의 실학자들의 계보가 흥선대원군 시기 박규수 등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들은 양반뿐 아니라 기술학에 능통한 중인들도 다수 포함된 신진 개화주의자들이었고, 이들이 개화라는 단어를 알게 된 것은 조선 후기 <북학파> 등의 상공업 중심 실학자들의 노력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통상개화론자들은 개항과 개화라는 것을, 인맥상 또는 학맥상 조선 후기 실학과 연계하려는 시도가 많습니다. 그러나, 1863년 이후 대원군의 집권기에는 감히 개화라는 말을 꺼내지도 못합니다. 대원군의 철저한 쇄국정책 앞에 개화나 개항이라는 말을 꺼내어 들었다가는 바로 <서양 양놈과 마찬가지인 역적> 취급을 당하기 때문이죠. 따라서 통상개화론자들은 대원군이 물러난 1873년 이후 개항, 개화라는 말을 꺼내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특히 청나라의 양무운동 등의 개화운동을 보면서 조선사회도 문호 개방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되었습니다. 물론, 당시 조선이 개방의 준비는 전혀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개화론자들은 중국과의 교류를 통하여 개화가 무엇인지를 점차 알게 됩니다. 개화라는 말의 정의를 내린 다음 글을 한 번 볼까요?
여기서 우리는 개화란 단어를 개항기 사람들이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당시에 말한 개화란, 서양을 단지 보고 베낀다는 것이 아니라 <만물을 알고, 백성을 교화하는 것>이라고 정의된 것입니다. 또, 개화란 서양의 것을 무분별하게 베끼는 것이 아니라, 정신, 물질, 사상 등 여러 개화가 있으며, 그 중 서양과 비교하여 장점만을 취하는 것이 진정한 개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선조들이 생각한 개화란, 서양의 양무운동 등의 개화운동을 보고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선별해서 얻는 것>을 개화로 여겼다는 것을 알수 있네요. 당시 개화론자들은 서양처럼 공화제를 한다던가, 혁명이 필요하다던가 하는 것은 대부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최소한 김옥균의 감신정변 이전의 개화란, 문호개방을 통한 부국자강을 추구한 것이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결국 여기서 다룬 단 1가지의 내용은 강화도 조약에서 우리가 스스로 <개항, 개화>하려는 의지가 있었다는 것이군요. 우리는 개화사상에 있어 내제적이고, 주체적인 발전 과정 속에서 스스로 개항하려는 분위기가 있었다는 점도 알아야 할 것입니다. 2. 조약을 맺게 된 배경 중 일본과의 문제점들을 살펴보자. 강화도 조약에서 가장 핵심적인 배경이 되는 것은 누가 뭐래도 일본과의 <서계>문제입니다. 일본과의 서계문제는 <흥선대원군>을 다룬 지난 장에서 아주 상세히 다루었습니다. 간단히 복습할까요? 1860년대 후반, 우리 나라는 강력한 쇄국정책으로 프랑스, 미국 등을 물리쳤습니다. 반면, 일본은 미국에게 굴복하여 미일수호조약을 맺고 개항한 뒤 <메이지 유신>으로 국가체제를 황제 일원적인 중앙집권체제로 개편합니다. 즉, 우리는 흥선대원군의 강력한 중앙집권체제, 일본은 강력한 황제집권체제가 성립된 것이지요. 이 두가지 체제는 필연적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는데, 이 두 국가의 충돌에서 기분이 나쁜 건 흥선대원군이었습니다. 일본은 조선에 보내는 편지(서계)에다가 <일본 천황, 일본 황실, 일본제국> 등의 언어를 늘어놓습니다. 300년간 통신사를 파견하여 일본 문화를 돕고 있다고 생각한 조선 입장에서는 미칠 노릇이었습니다. 흥선대원군 정권은 서계가 불손하다며 일본과의 통교를 거부하면서, 일본도 미국과 협상한 오랑캐 놈들이라고 말합니다. 일본과 서양은 같다는 것을 흔히 <왜양일체론>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 통상개화론자들은 일본의 서계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 이유는, 일본이 서계를 일부러 버릇없게 쓰는 이유는 침략의 구실을 노리는 것이므로 우리는 서계는 받되 일본에 강경하게 나가야 한다는 논리였지요. 하지만, 흥선대원군은 일본과의 국교를 완전 단절하려고 합니다. 일본에서는 이 서계 문제를 두고 몇 년간 조선과 교섭을 했으나 결렬되자 <정한론>이 대두합니다. 정한론이란, 조선을 바로 정복하자는 논의입니다. 특히,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은 막부가 무너지고 무사계급이 빈곤해졌는데, 이러한 무사계급의 불만을 대외로 돌릴 필요가 있었습니다. 임진왜란 때 도요토미가 쳐들어온 이유중 하나가 국내세력의 불만을 국외로 돌리려는 것이었잖아요? 그것과 같습니다. 일본은 국민들에게 공공연하게 침략의 정당성을 광고하면서 조선 침략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 침략의 정당성이란, <대동단결의 아시아>라는 광고였습니다. 일본이 서양의 침략에 맞서 아시아를 지켜야 할 의무가 있는데, 서양과의 싸움에서 이기려면 서양처럼 식민지가 필요하고, 그 식민지는 조선이 가장 적합하다는 광고입니다. 이것은 사이고 다카모리가 주장하면서 일본 전역에 퍼졌습니다. 그러나 이 <정한론>은 광고효과로만 활용될 뿐 실제 일본 정부 내에서는 공식화되지 못합니다. 일본 지배층에서는 정한론보다는 이토 히로부미의 <점진론>이 더 효과가 있었습니다. 점진론이란, 당장 조선을 치기보다는 일본의 조금씩 힘을 키워나가면서, 조선을 조금씩 잠식해들어가자는 논의입니다. 실제, 임진왜란의 실패를 경험한 일본으로서는 위험부담이 큰 정한론보다는 점진론이 더 효율적이었던 듯 싶습니다. 점진론을 주장한 이토 히로부미는 이후 조선을 정복한 이후 최고의 <조선 총독부 통감>이 되어 조선 최고의 실세가 됩니다. 물론, 안중근 의사한테 죽게 되지만요. (이토는 우리에게는 역적, 일본으로서는 영웅이라고 할 인물이네요.) 3. 운요호 사건이 터지다. 운요호 사건은 점진론이 대세를 이루던 1875년 경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1875년은 대원군이 물러나고, 명성황후(민씨정권) 집단이 개화정책을 실시하려고 준비하던 시기입니다. 당시 일본의 목적은 조선을 침략하기 위한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었고, 우리의 목적은 개화를 통해 외국의 문물을 받아들이는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하필 우리의 개화 상대가 일본이었고, 일본은 우리에게 개화의 이득을 주는 나라가 아니라, 침략을 통한 우리의 이권침탈을 목적으로 했다는 점입니다. 1875년의 운요호는 3척의 군함을 끌고 옵니다. 이 운요호는 식량과 먹을 것이 떨어져서 조선에 잠시 왔다간다는 구실로, 불을 지르고 사람을 죽이며 약탈을 자행합니다. 이 운요호가 남의 나라에 와서 미친 짓을 한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미친 짓을 하고 있으니, 너희는 빨랑 와서 우리랑 협상을 하던지, 더 미치는 꼴을 보고 있던지 하라는 것이지요. 마침 개화에 관심이 있었던 우리 민씨정권은 일본과의 협상을 시작합니다. 그럼 아래 사료 내용을 한번 볼까요?
문서를 보면 양국의 입장이 너무 다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일본은 만약 협상이 결렬되면 바로 돌아가서 전쟁 준비를 할 태세였습니다. 우리는 일본의 속셈도 모른 채 단순히 <개화정책>을 실시할 생각으로 나갔던 거죠. 일본은 이미 여러 나라와 불평등 조약을 맺어보았습니다. 우리는 개방 조약이 뭔지도 모르면서 남의 것을 흉내내서 하려고 했습니다. 그것도 일부 개화세력만이 주도해서 협상을 하려고 했던 것이지요. 4. 조일수호조규의 전문 내용
<사진 : 조약을 체결할 때 사진> 이 조약 12개의 전문을 보면, 우리가 너무 순진해서 양의 탈을 쓴 늑대에게 간식거리로 몸을 바치려고 한 조약임을 알 수 있습니다. 1조의 <조선은 자주국이다>라는 말... 너무 좋은 말입니다. 우리는 여기에 꽝! 도장 찍습니다. 그런데 이건 무슨 뜻? 사실 이것은 조선이 자주국이니 중국 <청나라>는 조선에 간섭하지 말고 가라는 뜻입니다. 일본이 조선을 차지하겠다는 속셈을 우리에게 들키지 않고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지요. 2조의 수신사 파견은 조선시대 통신사만을 우리가 파견했던 것에 비하면 전세 역전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4조의 조차지 설정과 개항부분은 우리의 항구부터 일본이 잠식하겠다는 점진론의 내용을 보여줍니다. 7조에서는 아예 일본이 우리 영해를 측량하면서 영해권을 침범하고 있으며, 10조에서는 불평등 조약의 대표적 사례인 <치외법권>이 나옵니다. 치외법권이란, 일본인이 조선에서 범죄를 저질러도 일본인에게 재판을 받는 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일본에게 우리의 권리가 심하게 훼손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사실 지금도 한미상호방위조약상 미국군인이 우리 여중생을 죽이면 미국에서 재판받는 불합리한 주권침해는 계속되고 있죠...) 결과적으로 이 조약.... 완전 불평등 조약입니다. 일본은 불평등 조약에 몇 번 당해보고 개항한 나라라 이러한 조약에 대해 잘 알고 있지만, 우리는 너무 순진하게 첫 도장을 어이없게 찍어준 것입니다. 이 조약으로 일본 <점진론>은 크게 힘을 얻게 됩니다. 우리는 뒤늦게 깨닫고 조약에 대한 일부 내용을 수정하려고 하지만 거부당합니다. 거부당한 조약 재조정 내용을 잠깐 볼까요?
위 내용, 일본이 당연히 승인하지 않습니다. 기껏 속여서 도장 찍었는데, 다시 조약을 재조정할 이유가 없죠. 우리는 이 조약을 시작으로 세계 각국과 아주 불평등한 내용의 조약을 비슷하게 체결합니다. 이유는 대부분의 나라와 조약을 맺을 때 <최혜국 대우>라는 부분이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최혜국 대우란, 조약을 맺는 국가가 다른 국가보다 우선시 되는 내용으로 대우받는다는 조항입니다. 만약, 미국이랑 조약을 맺을 때 <최혜국 대우>라는 말이 들어가면, 일본과 맺었던 조약 중 미국에게 유리한 부분의 조약은 자동 추가되는 것이지요. 미국이 조선의 <최혜국>, 즉 가장 혜택을 받도록 상호 조약을 맺는 국가로 조약을 체결하는 것이니까요. 이 조약은 우리에게 근대 서양문물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주기도 하지만, 제국주의 국가에게 우리가 침탈당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조약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세계 자본주의에 편입되었습니다. 그러나, 제국주의 국가에게 침탈당한 국가인 일본에게 다시 침탈당하는 국가가 되면서 엄청난 시련이 시작됩니다. 이유는 다른 제국주의 국가와는 달리 일본은 산업혁명도 늦고, 산업기반도 약하며, 다른 제국주의 국가와의 최혜국 조약을 맺은 국가이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수탈은 차후 다른 어떤 국가보다도 심한 침탈로 이어집니다. 일본과의 강화도 조약을 서양이 중국과 맺은 난징조약과 비교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듯 합니다. 중국사할 때 한번 시도해 봐야겠네요. 6. 조일수호조규부록(강화도 조약의 속약) - 일본은 더욱 더 침탈하다.
일본과 맺은 강화도 조약이 상징적으로 우리 개항과 제국주의 침탈을 상징한다면, 다시 일본과 맺은 이 조일수호조규(강화도 조약)의 속약은 실제 우리 경제에 미친 파급효과가 큽니다. 이 조일 수호 조규 속약과 조일통상장정이라는 2건의 문건은 강화도 조약 이후 6년뒤 체결되는데, 이 조약은 일본 점진론의 제 2단계라고 보시면 됩니다. 먼제, 강화도 조약 때 단순히 항구에서 무역하던 것을 개항장 이내로 확장합니다. 즉, 개항장에서의 일본인 통행거리를 설정하고 10-100리 정도의 거리에서 일본인들이 장사를 시작합니다. 이로서 우리 전통의 상인인 객주, 여각 등은 몰락하기 시작합니다. 또 개항정에서 양곡의 수출입을 허용하고, 일본화폐를 사용하는 것도 허락하며, 일본 물품에 대하여 관세를 매기지 않는다는 것도 추가됩니다. 이로서 우리 경제는 차츰 일본 경제에 잡아먹히게 되면서 1880년대 중반, 일본의 경제침투가 심화됩니다. 1880년대 중반에 일본은 조선시대 이래 조선 무역의 주도권을 잡고 있던 청나라에게 도전하는 형세로 발전하게 되고, 조선에서 청과 일본은 경제문제를 두고 심각한 대립을 연출합니다. 이 떄부터 이미 청일전쟁의 분위기는 돌기 시작한 것이죠. 자 이제 조선은 개화를 해 버렸습니다. 그럼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다음 장에서는 민씨 정권의 개화 정책의 방향과 <조선책략>의 활용에 대한 이야기를 전개해보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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