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토막 역사 4화. 눈 뜨고 있는데 코를 베어간다의 어원 등
- 오늘 이야기는 정사라기 보다는 옛날 민간 이야기 중에서 몇가지를 골라 보았습니다. 역사적으로 따질 부분들은 아닌 이야기들입니다. 이런 이야기도 있구나라고 생각하면서 재미있게 읽으세요. - 1. 눈뜨고 있는데 코를 베어 간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임진왜란 때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군과 매울 치열한 전투를 벌였습니다. 토요토미는 왜군들에게 <조선인을 많이 죽일수록 많은 포상을 약속>하였기 때문에 왜군들은 될 수 있으면 많은 사람을 죽이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을 죽였다는 증거는? 그 증거는 바로 <조선인의 코와 귀를 베어 노력을 증명하라!>였습니다. 따라서 일본군은 자신이 열심히 싸웠다는 증거를 얻기 위해 될 수 있으면 많은 사람들의 코와 귀를 잘라내려고 했답니다. 당시 왜군들은 조선군이든, 백성이든 눈에 보이는 대로 죽이고 코와 귀를 얻으려 하였습니다. 왜군들은 죽은 시체 뿐 아니라 급할 때는 살아있는 사람의 코외 귀를 잘라내었답니다. 노인이든 어린이든 가리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방금 출산을 마친 산모의 코를 베고는, 갓난아기의 코를 베어내기도 했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그래서 당시 전라도 사람들은 일본군을 코와 귀를 떼어가는 사람이라고 불렀습니다. 귀와 코를 한자로 이, 비 라고 합니다. 그래서 왜군을 <이비야>라고 불렀답니다. 임진왜란 이후 남부 사람들은 우는 아이가 있으면, <이비야>가 와서 잡아간다라고 겁을 주어 달래었다고 합니다. 즉, 일본군이 코와 귀를 잘라가니 뚝 그치라는 뜻이지요. 정설인지는 모르지만, 임진왜란 이후 <애비>란 말도 등장한다고 합니다. <애비!>란 친구들에게 겁을 줄 때 등을 치면서 외치는 말인데, 이 애비는 <이비야>에서 나온 말이라고 합니다. 2. 돈가스는 메이지 유신에서 탄생하였다는 일본의 주장은? 일본에서 유행하는 요리 책들 중에서 종종 인용하는 구절이 <돈가스는 언제 등장하였는가?>라고 합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따져보면 일본에서 돈가스가 등장한 것은 아주 최근의 일입니다. 일본은 7세기 다이카 개신 이래 <불교를 수용>하면서 육류 문화보다는 채식류 문화가 주를 이루었다고 합니다. 물론 고기를 먹긴 하였지만, 불교 수용 이래 형식적으로는 1200년간이나 육식을 금기시하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고기를 안 먹지는 않았겠지요. 이 육식 금지라는 항목은 당시 일본의 상황으로 볼 때 고기가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였을까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세계 각국의 전근대 사회가 대부분 그렇듯, 실제 고기를 먹는 계급은 일부 부유한 계급이었을 테니까요. 그럼 돈가스의 유래를 일본측 주장을 통해 알아볼까요? 일본에서 돈가스가 등장한 것은 메이지 유신으로 미국 문화가 일본에 들어오면서 부터라고 합니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으로 근대화를 이루면서 서양의 스테이크 문화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서양식 스테이크 문화는 일본이 따라가기에 부족하였죠. 서양의 문화는 동경하였지만, 일본의 경제 수준은 값비싼 소고기로 맛난 음식을 만들수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일본은 값싼 돼지에 빵가루를 입혀 <돈가스>를 만든 것입니다. 이 때 메이지 천황은 <서구를 따라잡아 서구를 뛰어넘자>라고 말하면서 육식을 장려하였고, 서양을 누르는 방법으로서 서양 음식 중에서 영양가가 많은 음식을 도입하자고 주장하였습니다. 즉, 천황부터 육식을 장려하면서 돈가스가 대중화되었다는 것이죠. 이 것은 2가지 사실을 시사합니다. 첫 번째는 일본이 서양의 제도를 얼마나 동경하였는가를 보여주는 사례라는 것이지요. 두 번째는 돈가스가 대중화될 만큼 일본 백성들의 생활이 막부시대보다 나아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돈가스도 결국 채소류보다 비싼 육류였으니까요. 그러나, 이 돈가스가 동아시아로 보급되면서 동양만의 특이한 색채로 다시 탄생합니다. 조선에서는 돈가스의 가루를 떡으로 입혀 먹었다고도 하고, 중국에서는 빵으로 빚은 큰 만두라고 생각하기도 하였으니까요. 결정적으로 돈가스는 우아하게 썰어 접시에 담은 뒤 나이프나 포크로 썰어 먹는 서양 음식이 아니라, 밥과 함께 젓가락으로 먹는 음식이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돈가스를 먹을 때 숟가락도 사용하죠. 문화란 그 나라의 상황에 맞게 변형되는 모양입니다. 3. 사라진 아즈태크와 잉카 제국을 멸망시킨 진정한 원인은 무엇일까요? 아즈테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선진적인 문명이었다고 합니다. 아메리카 원주민의 문명이 신석기 단계였기 때문에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석기 시대를 연상하면 그들의 문명을 이해조차 할 수 없습니다. 아즈테크 왕국의 수도 테노치티틀란은 석기시대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화려한 문명을 보여줍니다. 30만명의 거대한 인구가 살았고, 그 시장은 5000명 이상이 물건을 팔았는데, 그 규모가 유럽의 도시를 능가하였다고 합니다. 또 안데스 산맥의 잉카 제국은 그 첨성술과 기하학의 발전 수준이 유럽과 인도에 버금가는 선진적인 수준이었다고 합니다. 보통 석기시대에 돌입하지 않은 신석기 시대에 고대 국가가 탄생한 예가 없었기 때문에, 국가 탄생의 기준을 청동기로 보는데, 이 지역의 문명은 청동기, 철기 국가의 수준보다 훨씬 높았습니다. 단지, 우리가 이 문명을 낮게 평가하는 이유는 석기를 사용하였다는 사실 뿐이지요. 이러한 문명이 에스파냐의 소수 군대에게 멸망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1519년 에스파냐의 정복자 코르테스가 이 지역을 정복하기 위해 출동하였을 때 선발대와 후발대를 모두 합쳐도 1000명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코르테스가 아스텍을 멸망시키는 데에는 3년도 걸리지 않았답니다. 왜 이렇게 아즈텍이 쉽게 망했을까요? 역사가들은 첫 번째, 이유로 아스텍 인들이 총포에 대한 공포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코르테스의 군대는 총을 사용하는 보병, 사수, 소총수로 구성된 군대였습니다. 총 소리가 울리면 아스텍인들은 신의 분노라고 생각하여 절대 복종을 하거나 겁을 먹었을 것이라는 견해입니다. 두 번째 견해는, 아즈테크이 에스파냐와 초기에 친선관계를 유지했는데, 에스파냐가 국교로 삼은 <크리스트교 전파문제>로 에스파냐의 기분이 상하여 일시에 에스파냐가 급습하여 아즈테크를 점령하였다는 설입니다. 아즈테크인들은 성경책이 무엇인지 몰랐고, 에스파냐인들이 우호적으로 건네준 성경책의 용도를 몰랐습니다. 먹는 것도 아니고, 입는 것도 아닌 그것이 아즈테크인들에게는 필요없는 것이었겠죠. 성경책을 집어던지거나 땅에 버리는 등 홀대하는 것을 본 에스파냐가 친선관계에 있던 아즈테크인들을 학살하였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제시하려는 새로운 견해는 <천연두 전파설>입니다. 한번 이야기해 볼까요? 에스파냐인들은 생각보다 선진적인 문명인 아즈테크를 점령할 수 있는 방안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 때 코르테스 장군이 생각한 방법은 바로 <전염병의 전파>였습니다. 유럽에서도 과거 흑사병의 유행으로 유럽인구의 1/3이 줄어든 경혐이 있었습니다. 군대보다 더 무서운 것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역병인 것이지요. 에스파냐인들은 아즈테크인들과 초기 친선관계를 유지할 때, 천연두 등 역병에 걸린 이들을 데려가서 아즈테크인들과 신체 접촉을 시켰습니다. 유럽에서 유행한 흑사병이 징기스칸이 유럽원정 때 데려간 갈색쥐 때문이라고 하죠? 갈색쥐는 아시아에서는 많아서 아시아인들은 갈색쥐에 대한 면역력이 강했습니다. 그러나 유럽인들은 항체가 없었기에, 유럽인들이 흑사병에 전멸한 것이지요. 똑같은 방법으로 에스파냐는 아메리카 문명인들에게 천연두 등 유럽에서는 이미 면역 체계가 이루어진 병을 신대륙에 전파한 것입니다. 아즈테크 왕국의 기록에 의하면 에스파냐 인들이 온 이후, 인도오들의 얼굴, 가슴, 배 등에서 종기가 나고 온몽이 곪아가면서 죽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아즈테크 기록에 있는 내용들이 유럽인들의 기록에는 없습니다. 자국의 수치를 숨기기 위해 밀폐한 것이 아닐까요? 그렇기 때문에 아즈테크 등의 멸망 기록이 유럽인의 손에 남아있지 않은 것이라고 말할 수 도 있습니다. 아즈테크의 문명인들은 자연 속에서 살아온 만큼 항체를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아즈테크의 문명은 에스파냐인들의 만행으로 인구가 줄어들었고,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망한 것입니다. 그리고 아메리카의 금과 은, 자원들은 에스파냐로 넘어가게 됩니다. (이 설은 최근에 교과서 참고 자료나 이야기 책에 자주 나오더군요. 그래서 언급해 보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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