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토막 역사 14화) 3가지 이야기 : 일본의 구석기 유적지 조작사건 등
1. 구석기 유적지 조작으로 망신당한 일본의 자존심 한토막 역사 3화에서 연천 전곡리 유적의 발견으로 우리 나라의 구석기 유적지가 세계 구석기 이론을 뒤집는 쾌거를 이룬 적이 있음을 이야기했었습니다. 연천 전곡리의 양면핵석기 발견으로 기존 구석기 이론이 뒤집히며 아시아 구석기가 유럽에 뒤지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하였죠.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항상 우리나라보다 선사시대가 앞선다고 주장한 일본이 다급해진 것이죠. 일본은 조선을 침략한 제국주의 시대부터 조선에서는 석기시대가 아예 없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석기 시대 유적지가 발견되면서 일본의 주장이 바뀌었습니다. 한국의 석기는 일본(남방)으로부터 전파된 것이라는 이론이었죠. 자존심이 상한 일본은 전세계적인 사기극을 시작합니다. 연천 전곡리 유적이 발견된 1970년대 이후 일본에서도 전기 구석기 유적이 출토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후지무라라는 사람의 주도로 시작된 일본 구석기 유적 발굴은 놀라운 성과를 보입니다. 1981년 일본 미야기현 유적에서는 4만년 전 구석기가 발굴되었고, 그 이후 20만년전, 40만년전, 50만년전의 유적지가 계속 발굴된 것입니다. 일본에서는 70만년전 유적지 까지 발굴되었습니다. 일본의 구석기는 중국, 한국의 역사보다 오래되었다는 것이 입증되었고, 일본인들은 세계 역사 속에 일본 역사의 유구함과 우월성을 내보일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전 세계는 계속 일본을 주목하였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치에 맞지 않는 유적지의 계속된 발굴로 일본에 의심을 가지는 사람들도 하나 둘 늘었습니다. 2000년 드디어 20년 이상 계속된 자작극이 탄로나고 말았습니다. 일본 마이니찌 신문은, 후지무라씨가 미야기현에서 가짜 석기를 파묻는 장면을 몰래 카메라로 찍어서 폭로한 것입니다. 결국 20년간 후지무라씨가 발굴한 모든 구석기 유적은 엄청난 조작이었음이 드러났습니다. 일본 구석기 연대가 70만년이라는 것도 거짓이었고, 그 연대를 바탕으로 작성된 모든 논문과 학술 연구도 모두 허사가 되었습니다. 일본 고고학계는 오랜 기간 계속된 이 엄청난 조작 사건의 후유증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고 합니다. 2. 교과서에 나오는 <몽고>는 잘못 표기된 글자 - 몽골이 맞습니다. 교과서에서 <몽고>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명백한 오류입니다. <몽고>가 아니라 몽골이 맞습니다. 몽골이란, <몽> 부족민들이 세운 나라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몽골인들이 스스로 그렇게 부는 말이며, 한자어가 아니기 때문에 한자로 표기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이러한 주변민들의 용어를 한자로 바꿔부를 때 격하시키곤 하였습니다. 예로 <몽고>라는 말은 몽매한 옛날 놈들(蒙古)이라는 한자로 표기합니다. 흉노라는 민족은 원래 선우를 중심으로 하는 훈족이지만, 이를 중국에서는 흉노로 표기합니다. 흉노(匈奴)란, 끔직한 노예들이라는 뜻이지요. 투르크 족인 돌궐도 한자로 좋은 뜻이 아닙니다. 돌궐(突厥)은 까칠한(시끄럽게 날뛰는) 투르크족들이라는 뜻이지요. 중국을 잠시 점령한 적이 있는 선비(鮮卑)족은? 물론 저속하고, 비루하다는 뜻이 풍겨지지요. 동이족도 동쪽에 활을 잘 쏘는 사람이 아니라, 동쪽의 오랑캐로 말하곤 하죠. 중국은 중원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의 모든 민족을 오랑캐로 파악하곤 하였습니다. 그 전통이 지금에 와서는 <세계의 중심국가 중국을 재건>하려는 움직임으로 다시 나타나고 있죠. <몽고>라는 말은 오기입니다. <몽골>이 맞습니다. 과거 우리 국가의 사람들이 <조센징>이 아닌 <조선인>이었듯 말이죠. 3. 신밧드의 모험과 정화의 이야기 신밧드의 모험은 아라비안 나이트(천일야화)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투르크족의 수도 바그다드에 살던 신밧드가 겪은 모험담에 대한 이야기지요. 이 이야기는 당시 중국 - 인도 - 서아시아로 이어지는 바닷길 루트가 유럽의 문명을 훨씬 앞서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서양에서 말하는 <신항로 개척 : 대항해 시대>는 서양의 입장에서 세계사를 기술한 것이고, 아시아에서는 아시아 나름의 무역 구조가 있었습니다. 만약 에스파냐의 무적함대와 이순신의 거북선이 싸운다면? 생각해 보셨나요? 컴퓨터 그래픽으로 재현해보면 조선, 중국 명나라의 선박이 압승을 거둔하고 하는군요. 신밧드의 모험에 나오는 신밧드는 중국 명나라에서 조공무역을 위해 파견한 <정화의 원정>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정화>의 아명은 <싼바오 : 三保>인데, 서양에서는 이 아명을 Sinbao라고 부릅니다. 신밧드(Sinbad)는 Sinboa라는 이름이 아랍권에 전해질 때 유래된 이름이라고 합니다. 중국 정화의 원정은 29년동안 7차례나 이루어졌습니다. 그럼 정화가 유럽에서 말하는 <신항로 개척>과 맞먹는 먼 길을 돌고 돌아 여행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유는 명나라의 해금정책 때문입니다. 중국은 명 영락제 시기에 세계 최고의 해군력을 갖춘 나라였습니다. 주변의 국가들은 명과 친선정책을 유지하였고, 명의 해군력에 대항할 나라는 당시 없었습니다. 그러나, 명나라가 해적 소탕을 철저히 하면서 사무역, 밀무역을 금지하면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공적인 무역 이외의 다른 무역에서 명이 아시아 국가들 사이에서 소위 말하는 왕따를 당하게 된 것입니다. 아시아의 국제 무역은 동남아 - 일본 - 조선- 명 - 인도 - 서아시아를 잇는 해상루트가 활발했는데, 명은 스스로 사무역을 금지함으로서 무역권에서 소외당한 것입니다. 지금 중국은 <동북공정> 등 역사 체계화 작업을 실시하면서 정화의 원정에 대한 관심을 크게 보이고 있습니다. 그 첫 번 째 이유는 정화가 동아시아에서 아프리카 북단까지 여행하는 동안 항성 평화를 추구하였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정화는 에스파냐가 아메리카 원주민을 학살한 것과 같은 전쟁을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정화의 원정은 주변국과의 조공 질서를 확립하고, 평화를 위한 것였습니다. 이것을 강조함으로 중국의 마인드가 세계 평화에 기여한다는 것을 보이는 것이죠. 다음으로 중국이 미국과 맞설 군사 강국이 되기 위해서는 강력한 해군 시설이 필요하고, 모든 해상 시설을 현대화해야 합니다. 정화는 이러한 중국의 코드에 딱 부합하는 역사적 인물입니다. 또 중국이 차기 강국이 되기 위해서는 중동 지역에 에너지를 수송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정화가 다녀간 항로가 중요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중국 입장에서는 정화의 원정이 21세기 중국 강대화에 앞선 선구적인 여행으로 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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