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의 노비
고구려왕 사유(고국원왕)가 보병과 기병 2만을 거느리고 와서 치양(황해도 백주)에 주둔하고 군사를 나누어 민가를 약탈하였다. 왕(근초고왕)이 태자에게 군사를 주니 곧장 치양으로 가서 고구려군을 급히 깨뜨리고 오천명을 사로잡았다. 그 포로를 장사에게 나누어 주었다. - 삼국사기 - 가야가 배반하니 왕(진흥왕)이 이사부에게 토벌하도록 명령하고, 사다함에게 이를 돕게 하였다. 사다함이 기병 오천명을 거느리고 들이닥치니 일시에 모두 항복하였다. 공을 논하였는데 사다함이 으뜸이었다. 왕이 좋은 농토와 포로 이백명을 상으로 주었다. 사다함은 세 번 사양하였으나 왕이 굳이 주자 받은 사람은 놓아주어 영민으로 만들고, 농토는 병사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를 보고 나라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하였다. - 삼국사기 - |
사료해석 : 위의 지문은 삼국 시대 노비와 관련된 자료입니다. 7차 교과서 지문이지요. 전쟁이 빈번하던 삼국 시대에는 전쟁 노비가 많았으나 통일 신라 이후로 정복 전쟁이 사라짐에 따라 전쟁 노비도 소멸되어 갔습니다. 특수 지역에 예속된 사람들도 점차 양국화하여 일부는 양민이 되고, 일부는 노비로 전락하였습니다. 한편 노비 신분은 절대적으로 고정된 것이 아니라 사다함의 예와 같이 노비에서 해방되어 양인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즉, 인도와 같은 엄격한 카스트적 신분질서가 아니였다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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