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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 은, 주, 춘추전국, 진, 한, 위진남북조, 수, 당, 송, 원, 명, 청, 현대 중국
중국사는 현대 중국 영토 내에 있었던 국가들에 대한 역사를 일컫는다. 어느 역사든 공부할 때 항상 각 나라의 범위를 나타낸 지도를 알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특히 세계사는 범위가 방대하기 때문에 교과서나 다른 자료 등에서 제시하는 지도는 꼭 눈에 익혀두도록 하자.

1) 주(周, BC 1100년경 ~ BC 770년경)
 주나라는 호경(현재 시안西安)에 도읍하여 세워졌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덕치주의와 천명사상으로 은(隱, 혹은 상商)을 전복시킨 것을 합리화하였다. 가족 공동체에 기반을 두어 예(禮, 예의범절 등)을 중시하였으며, 그러한 영향으로 적장자(장자, 첫째) 중심으로 가계를 이어가는 종법이 발달하였다. 또한 이를 기반으로 주나라만의 영토분할 통치제도인 ‘혈연적 종법에 의한 봉건제도’가 성립하였다. 당시는 청동기 시대였기 때문에 석기나 목기로 된 농기구를 이용하여 경작했다. 때문에 농산물의 많은 생산을 기대할 수 없었다. 정전제는 이러한 이유로 만들어졌는데, 씨족을 중심으로 공동 생활을 하며, 공동 생산을 하는 토지 공(共)개념의 제도가 나타났다. 주로 농경 생산에는 농민과 노비 계층이 종사하였다.

2) 춘추전국시대(春秋 BC 770 ~ BC 403, 戰國 BC 403 ~ 221)
 ① 춘추시대
  사실 춘추전국시대는 주나라 시대로 분류되어있다(동주東周시대라고도 한다. 은을 멸망시키고 호경에 위치한 시대를 서주西周시대라고 한다). 춘추시대의 시작은 북쪽에서 유목민족인 건융족이 침입하면서, 주 왕실이 낙양(현재 뤄양洛陽)으로 천도하면서 시작되었다. ‘춘추(春秋)’라는 시대 이름은 공자가 쓴 책의 『춘추』에서 유래하였다. 이 때까지만 해도, 주 왕실의 위엄이 어느정도 유지되던 시대로, 궐기한 세력들은 저마다 존왕양이(尊王攘夷)를 명분으로 세웠다. 이 때 유명했던 패자(覇者 : 주 왕실을 능가하는 힘을 가진, 춘추시대의 대표국가)로 등장했던 커다란 세력을 가진 나라들을 춘추 오패(五覇 : 제濟 진秦 초楚 오吳 월月)라고 한다. 춘추시대 중후반기부터 철기가 중국에 전래되었는데, 보편화 되는 것은 전국시대부터였다.

 ② 전국시대
  전국시대의 이름은 한나라 때 유항이 엮은 『전국책(戰國策)』에서 유래하였다. 이 때는 가신과 제후들이 주의 왕실을 완전히 무시하게 되는 때로, 하극상(下極上), 약육강식 등으로 대표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제후들이 봉토로 받았던 토지들은 제후 개인의 국가로써 발전하였으며, 제후들은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 실력 있는 관료를 등용하여, 부국강병을 추구하였다. 이렇게 등용된 사람들을 제자백가(諸子百家)라고 하며, 제자백가들의 출현은 사(士) 계층의 성장을 촉진시켰다. 제자 백가의 대표적인 학파로써 인의(仁義)와 예(禮 : 각자의 역할)을 중시하는 유가와 무차별적인 사랑인 겸애(兼愛)를 주장하는 묵가,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고 법치(法治)를 주장하는 법가가 있다. 제후들은 제자백가를 등용하여 군현제와 관료제 중심의 정책을 꾸렸다. 또한  상업과 공업, 농경 등에 큰 변화가 생겨 각자 개성이 뚜렸해져 사농공상(士農工商)의 계층이 명확해졌다.  
  전국시대 들면서 철기가 더욱 폭넓게 사용되었다. 철기가 활용된 것은 전쟁과 경제 부분인데, 전쟁 부분은 뒤에 진이 통일하는 과정에서 설명하도록 하겠다. 경제부분에서 철기의 활약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일단, 철제 농기구와 우경(牛耕)으로 인해 농업생산력이 비약적으로 증가하였으며, 노동력이 절감되었다. 그로 인해 토지의 사유화가 시작되었고, 공동체 중심의 생활 문화(정전제를 중심으로 하는 공동 노동체제)가 해체되어 갔다. 대토지 소유자가 늘어났고, 남아도는 농작물로는 서로 교환하고 시장에 내다 팔기도 하면서 상공업이 발달하였다. 상공업의 발달은 제철, 제염업의 발달로 이어졌고, 또 동전의 발명으로까지 나아갔다. 우리나라에서도 전국시대 때의 동전이 발굴되는데, 이는 중국과 우리나라와의 무역을 증명하고 있다.

3) 진(秦 BC 221 ~ 206)
 비교적 변두리에 위치했던 진이 중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것은 중국 주변에서 활동을 하던 유목민족으로부터 철기를 제일 먼저 수입해 재빨리 실용화에 이룩하였기 때문이다. 진은 유목민의 기마전술과 철제 무기, 법가 사상을 통해 중국을 통일하였다. 중국을 통일한 진 시황제는 중앙집권의 군현제를 실행하였으며, 법가 사상을 수용하여 엄격한 통치를 하였다. 이에 유(儒)학생들은 반발하였으나, 시황제는 이를 무자비하게 탄압하여 분서갱유(焚書坑儒 : 유교 경전을 불태우고, 유생들을 매장함)를 일으켰다. 사실 시황제의 업적은 분서갱유와 같은 잔혹함 보다 중국을 하나로 만들었던 것에 있다. 그동안 나라마다 달랐던 화폐, 문자, 도량형(추의 무게) 등을 진의 것으로 통일하여 표준으로 삼게 하였다. 또한 지난 전국시대에 나라간의 성벽들을 연결하여 만리장성으로 보완하여 흉노의 침입을 막는 한편, 흉노를 공격하여 나라의 내외를 굳건히 하였다. 현대의 중국에 비하면 턱없이 적은 영토이지만, 진의 통일은 오랜 시간 계속되었던 내란을 종결하고 ‘하나의 중국’을 이룩하였다는 것에 의의가 있다. 이러했던 진나라도 대규모의 장성 건설과 엄격한 법의 적용으로 인해 백성들의 불만을 사게 되고, 진승과 오광의 난으로 결국 2대만에 멸망하게 되었다.

4) 한(전한前漢 BC 206 ~ AD 8, 신新 AD 8 ~ 23, 후한後漢 AD 25 ~ 220)
 진승과 오광의 난으로 진(秦)이 멸망한 이후, 초패왕(楚覇王) 항우와 한왕(漢王) 유방의 싸움 끝에 유방이 항우를 이기고 한을 건국하였다. 유방은 후에 한고조(漢高祖)로 추대되는데, 한고조는 처음 통치 정책으로 주(周)의 봉건제와 진(秦)의 군현제를 조합한 군국제를 시행하였다. 이는 군사적, 행정적으로 중요한 부분은 왕이 직접 다스리고, 변두리 지역을 측근이나 친인척 등에게 하나의 소국을 만들어주어 지배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로써 진(秦) 나라 때 군현제에 불만을 가졌던 지방세력의 불만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을 거꾸로 생각해보면, 지방 곳곳까지 황제의 권위가 닿을 수 있을 만큼 강성한 황제권이 형성되었다고 보기 힘들 것이다. 
  한 고조 이후 한나라를 획기적으로 변화시킨 것은 한무제(漢武帝)였다. ‘무제’라는 시호에서 알 수 있듯이, 무제의 업적은 거의 모든 것이 전쟁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우선 무제는 예전부터 중국을 괴롭혀오던 주변에 흉노를 견제하기 위해 장건을 통해 비단길을 개척하였으며 한반도 남부에 위치한 진(辰)과의 중계무역을 통해 이득을 보고 있던 고조선을 함락하였다. 하지만 무리한 대외원정은 국가 재정에 심각한 무리를 초래하였고, 한무제는 재정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소금과 철을 나라에서 독점해서 판매하였으며(염철 전매제), 균수법과 평준법을 통해 유통과 물가를 조절하였다. 국가의 경제 개입은 전쟁 수행에 효율적인 재정확보를 꾀할 수 있었으나, 오히려 물가가 상승하는 등 사회의 불안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또한 진에서 탄압을 받았던, 유가 사상을 국교로 삼아 유교가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한은 외척과 환관들에 의해 정치가 좌우되었으며 끝내 외척이었던 왕망에 의해 멸망하고 새로운 왕조인 신(新)이 들어섰다. 왕망은 토지를 국유화하여 주(周)나라의 토지제도였던 정전제를 부활하고자 하였으며(왕전제王田制), 노비 매매를 금지하는 등 평민을 위한 정책을 펼치려 했다. 하지만 이러한 개혁은 이미 향거리 선제로 굳건한 지배층으로 성장한 호족(豪族)의 반발을 샀으며, 파격적이라고까지 할 수 있는 경제개혁은 오히려 농민들에게 부담을 안겨주어 신(新)은 단명할 수밖에 없었다. 신이 무너지고, 호족이 광무제(光武帝)를 추대하면서 후한(後漢)이 만들어졌다. 후한은 전한과 달리 호족의 연합정권으로, 전한에 비해 황제권이 빈약하였다. 반초의 서역 원정으로 다시 비단길을 회복하였으나, 외척, 환관, 관료의 대립으로 점점 나라가 쇠약해졌다. 그래서 태평도나 오두미교와 같은 도교를 기반으로 한 민간 신앙이 널리 퍼졌고, 끝내 태평도가 중심이 된 농민 봉기인 황건적(黃巾賊)의 난으로 인해 후한 역시 문을 닫게 되었다.
  한은 관료를 뽑을 때 향촌에 있는 유능하고 청렴한 인재를 추천받는 방식으로 관리를 등용하였다. 이를 ‘향거리선제(鄕擧里選制)’라고 하는데, 기본적인 개념은 위와 같은 것이었으나, 현실에 적용되었을 때는 관료의 친인척을 등용하는 등의 문제가 생겨났다. 그래서 지방에 어느 유력한 집안을 중심으로 관료가 배출되었으며, 이러한 지방 세력가를 호족(豪族)이라고 한다.
 한의 문화에 대한 이해는 기본적으로 중국 고전 문화의 완성이라고 볼 수 있겠다. 한문이 정비된 것도, 채륜이 최초로 종이를 만든 것(한지)도, 또한 유교 사회가 성립된 것도 이 때이다. 유교와 사학이 접목된 사마천의 『사기(史記)』는 기전체(紀傳體) 역사서의 시초로, 이후 역사서들의 근본이 되었다. 반고의 『한서(漢書)』도 한나라 때 나왔다.
 종교도 많이 발전하였다. 도교의 기초한 태평도나, 오두미교의 민간신앙이나, 후한 초기에 비단길을 통해 전해진 대승불교도 있었다.
 한대의 유교는 진(秦)나라 때 분서갱유를 당한 관계로 예전에 불타 없어진 경전을 정리하기 위한 훈고학(訓詁學)이 발달하였다.

Tip. 기전체(紀傳體)
 본기(本紀), 지(志), 연표(年表), 열전(列傳)으로 구성되어있다. 그 중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본기(本紀)와 열전(列傳)의 이름을 따서 기전체(紀傳體)라고 하였다. 각각 기록한 것이 다른데, 본기는 왕의 업적이나 행동을, 지는 제례나 천문, 문화를, 연표는 역대 왕조의 변천을 연대순으로 정리한 것이다. 열전은 위인의 기록을 전한 것이다.
ex.1) 삼국지(三國志)는 삼국(위魏 촉蜀 오吳)의 문화를 서술한 것
ex.2) 관우전(關羽傳)은 관우의 행동과 업적을 기록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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