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위 진 남북조(魏晉南北朝 220 ~ 589)
황건적의 난으로 멸망한 후한이 여러 제후들로 인해 분열되었다가, 적벽대전 이후로 크게 삼국(위魏 촉蜀 오吳)으로 나뉘었다. 이후 소설로 유명한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와 같은 100년간의 전쟁이 있었고, 사마의의 손자였던 사마염이 통일하여 진(晉)을 건국하였다(AD 280, 이를 서진西晉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진의 통일도 그리 오래가지 못하였으며, 한족(漢族)은 북방민족이었던 흉노에게 멸망한 뒤, 양쯔강 이남으로 쫓겨 내려가게 되었다. 남북조는 북방의 유목민의 왕조와 강남으로 쫓겨간 한족이 세운 왕조가 대치하고 있는 상황을 일컫는다.
유목민이 차지한 화북지역은 흉노 이외에도 5가지 민족(흉노, 선비, 갈, 저, 강)에 의해 16개의 국가가 생겨났는데, 다섯 개의 이민족이 16개의 국가를 세웠다고 하여 5호 16국이라고 한다. 5호 16국을 통일한 것은 선비의 북위(北魏)였다(AD 439). 화북을 통일한 북위는 효문제 때 호족의 토지 비대를 막기 위한 균전제와 적극적인 한화정책(漢化政策)을 폈다. 그 결과 북위의 유목민족은 한족 문화에 동화되어 거의 한족화(漢族化)가 이루어졌다. 훗날 수(隋)와 당(唐)을 건국한 사람들도 이곳의 군벌 세력 중 하나였다.
강남으로 쫓겨간 한족(漢族) 또한 동진, 송, 제, 양, 진의 네 왕조를 거쳤다. 원래 강남은 늪지로 이루어진 곳이 많았기 때문에 불모지와 같았으나, 남북조 시대 이후로는 남하한 한족들에 의해 개발되어 산업이 발달하고 벼농사를 짓기 시작해 인구도 증가하였다.
남조의 인재 등용은 한의 향거리선제를 보완한 9품 중정제를 시행하였다. 9품 중정제는 지방에 중정관을 파견하여 참신한 인재를 선발하고, 호족을 견제하고자 한 것이었으나, 의도와는 반대로 호족이 문벌귀족(門閥貴族)이 되어 오히려 9품 중정제를 통해 관직을 세습하기에 이르렀다. 이와 함께 호족은 빈곤한 농민의 토지를 고리대를 이용해 빼앗거나, 불법으로 겸병하여 대토지를 소유하여 권위를 더해갔다. 위진남북조 시대의 여러 왕조들은 귀족의 대토지 소유를 막고 농민을 구제하려는 정책을 내놓았으나 매번 실패하였다.
Tip. 호족의 대토지 소유 억제 및 농민 구제책
위: 둔전법 / 서진 : 점전제, 과전법 / 북위 : 균전제 / 서위 : 균전제
위진남북조 시대에는 과거 한나라 때 수입되었던, 불교문화가 크게 발전하였다. 유목민족과 한족 모두 불교를 보호하고 발전시켰다. 비단길 부근(둔황, 원강, 룽먼)에 석굴사원이 세워진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이 시대에 등장한 문벌귀족으로 인해 지극히 귀족적인 문화가 발달하였는데, 도연명의 시 ‘귀거래사(歸去來辭)’나 4.6 변려체는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도교 역시 북위의 구겸지나 진의 죽림 7현의 청담사상(淸淡思想)을 통해 맥을 이어갔다.
* Tip(추가사항).
귀족적인 문화가 발전하면 발전할수록 ~체, ~ 형식의 문화가 발전기 마련이다. 훗날 서민문화, 대중문화가 발전하는 경우를 생각해보면 형식에 구애를 받지 않고 꺼리김 없는 친근한 표현이 특징이지 않은가?
6) 수, 당(隨 AD 589 ~ 618, 唐 AD 618 ~ 907)
긴 분열의 시대는 북위의 군벌 출신이었던 양씨 가문에 의해 수나라로 통일이 되면서 끝났다. 중국을 통일한 문제(文帝)는 중국 최초로 선거제(選擧制)라는 최초의 과거제도를 시행하였다.
문제의 뒤를 이은 양제(煬帝)는 대운하와 같은 무리한 토목사업과 무리한 대외원정 등으로 대규모의 인력을 동원하였고, 이것이 농민의 원성을 사서 2대 만에 단명한 왕조가 되었다.
수의 뒤를 이은 것은 양씨 가문의 외척이었던 군벌 이연(李淵)이였다. 그러므로 당의 전체적인 제도와 관료 등용제도인 과거제와 같은 정책들은 거의 모두 수를 따랐다. 중국의 최고 명군(名君)으로 추앙받고 있는 당 태종(太宗)의 치적(治積)은 ‘정관의 치’라고 불린다. 그 외에도 주변의 유목민족이었던 토번, 돌궐, 위구르를 복속(?)시켜 내외의 안정을 꾀했다. 또한 현종도 ‘개원의 치’라고 불리는 위대한 치적을 가지고 있었으나, 훗날 양귀비와의 관계로 인해 정치가 소홀해지고, 절도사를 파견하여 지방 세력의 힘을 실어주는 등의 실정(失政)을 행해 현종 말년의 혼란을 피할 수 없었다.
그래서 현종 말에 터진 것이 ‘안사의 난(755)’이다. 안사의 난으로 인해서, 그동안 당나라를 떠받쳐왔던 율령, 균전제 등이 붕괴하였다. 안사의 난이 몰고 온 여파는 상당한 것이어서, 안사의 난 이전의 당나라와 이후의 당나라는 큰 차이가 나게 된다. 그것에 대해선 뒤에서 자세하게 설명하겠다. 하여튼 당은 안사의 난으로 생기게 된 사회적 혼란은 황소의 난과 같은 농민 반란에 의해 몰락하게 되었다.
당의 사회는 기본적으로 문벌귀족이 지배하는 귀족적인 사회였다. 과거를 봐서 인재를 등용했기 때문에 능력이 존중되는 사회였다고는 하지만, 오히려 과거는 문벌 귀족 출신의 자제가 더 높은 관직에 올라가는 등용문이 되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또한 당이 탈라스 전투(751)로 비단길을 상실하기 전까지는 비단길을 통한 육상 무역이 발달하였으나, 탈라스 전투 이후로는 바닷길을 통한 해상무역을 주로 하게 되었다. 주 교역품 역시 비단에서 도자기로 바뀐 것도 해상무역의 발달을 촉진하였다. 이로 인해 많은 동서양 문물이 오가게 되었으며, 당나라에서 조로아스터교, 마니교, 이슬람, 네스토리우스교와 같은 외래종교가 정착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외국풍이 유행하는 국제적인 분위기의 사회가 만들어져갔다. 대운하의 이득을 본 것은 수가 아니라 오히려 당이었는데, 당은 대운하를 통해 강남과 강북 지방의 물자가 이동하였기 때문에, 상업과 도시가 발달하였다.
당나라는 기본적으로 수나라에서 처음 만들어졌던, 균전제와 그것을 기반으로 한 조용조(租庸調), 부병제(府兵制 : 군을 징집하는 방식, 현재 우리나라가 이를 채택하고 있다.)를 채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안사의 난’ 이후로 당의 경제 기반이었던 균전제가 붕괴되고, 귀족들이 소농의 토지를 겸병하여 대토지인 장원(莊園)을 경영하게 되면서, 세금제도였던 조용조는 재산 소유정도에 따라 세금을 내는 양세법으로 바뀌었다. 또한 의무병제였던 부병제 역시 지원해서 군대를 가게 되는 모병제(募兵制)로 달라졌다.
당에 문화는 앞서 말한 것처럼 기본적이고 귀족적이며 국제적인 성격을 띠었다. 그 외에도 당은 여러 가지 중국의 고전문화를 완성하였는데, 3성 6부와 같은 정치제도를 포함해서, 그동안 유교의 학파를 계승하고 있었던 훈고학이 완성되어, 공영달은 『오경정의(五經正義)』를 편찬하였다. 당나라의 문학은 귀족적인 취향만큼 세련되었는데, 이백, 두보, 백거의 같은 당시(唐詩) 작가와 한유, 유종원 등의 고전을 부흥시키고자 한 문자가도 있었다. 당삼채의 등장은 이후 등장할 도자기의 종주국으로서의 중국을 증명해준다. 도교는 왕실의 보호로 발전하였으며, 불교는 선종이 유행(소림사도 이 때 만들어진 것이다ㅎ)하고, 서역으로 여행을 떠나는 승려들이 늘어났다. 『서유기』도 삼장 법사가 이 때 법(法)을 구하기 위해 서역으로 떠난 것이 모티브가 되었다.
당의 문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동아시아 문화의 근본이 되었다는 것이다. 한자, 유고, 불교, 율령은 통일신라, 베트남, 일본, 발해 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는데, 이를 ‘동아시아 문화권’이라고 한다.
Tip. 당은 시험에서도 많이 다뤄지는 주제이다.
안사의 난 이전과 이후의 구별, 당의 문화에 대해 숙지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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