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대 지중해 세계
① 에게 문명
에게 문명은 에게 해를 중심으로 발전했던 문명들을 말한다. 크레타, 미케네, 트로이 등이 있었는데, 트로이는 고등학교 세계사에서 크게 다루지 않는다. 기원전 2000년 전에 크레타 문명은 크레타 섬에 있었던 문명을 말하는데, 크노소스 궁전과 궁전 안에 거대한 미궁으로 된 구조를 볼 때 그만큼 강력한 권력을 가진 국왕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섬에 위치한 만큼, 개방적인 태도를 가졌을 것이다. 그래서 크레타 문명은 그리스나 유럽에 청동기와 오리엔트의 문명의 유산을 전해주는 중간 매체가 되었다. 반면 기원전 14세기에 등장한 미케네는 대륙에 위치한 문명으로, 대륙적인 호방한 성격과 상무적인 문화가 발달하였다. 미케네는 철기를 사용하는 도리아인의 이주에 의해 멸망하게 되는데, 도리아인은 훗날 스파르타를 건국하는 민족이다.
② 폴리스의 형성
폴리스가 형성된 것은 기원전 약 8세기였다. 도시국가인 폴리스는 산이 많고 평야가 적은 그리스의 지형에 따라 그리스 주민들이 모여 살면서(集住) 형성되었다. 보통 폴리스의 형태를 크게 아테네형과 스파르타형으로 나누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폴리스에 대한 사료가 많지 않아 아테네와 스파르타 외의 것은 구체적으로 구상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폴리스는 크게 산 둔턱에서 신전과 요새의 기능을 하는 아크로폴리스와 중앙광장인 아고라로 구성되어있다. 아고라에선 연극, 음악회, 향연 등이 열렸다. 그리스인들은 강한 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있었는데, ‘헬렌의 자손’이라는 뜻에서 자신들을 ‘헬레네스’라고 하고, 변방의 외국인들을 ‘바르바로이’라고 하였다. 또한 이들은 4년에 한 번씩 현재의 올림픽과 같은 올림피아를 열어 운동시합을 겨뤘다.
③ 스파르타
스파르타는 앞서 말한 것처럼 미케네를 멸망시켰던 도리아 인에 의해 건설된 나라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의 원주민이었던 아리아인과의 마찰인 피할 수 없는 것이었으며, 스파르타가 확장하는 과정에서 그러한 마찰은 더더욱 확대되었다. 도리아인은 이러한 현상을 막기 위해 군국주의적인 정책을 펴게 되었다. 통계에 의하면 스파르타 전체인구에서 도리아인이 차지하는 비율은 고작 20% 전후로, 모든 도리아인은 군인이 되어야만 했다. 이들은 ‘아고게’라고 하는 공동 학습의 장에서 군사, 글쓰기, 문화 등을 수료해서 보다 완벽하고 이상적인 전사로 거듭나기를 희망했다. 반면 스파르타의 아리아인은 대부분 헬로트(헤일로타이)라는 노예였으며, 농업에 종사하였다. 도리아인들은 노예들을 감시하고 지배하였다. 무역은 페리오이코이라는 반자유인들에 의해 행하여졌는데, 아테네에 비해 활발하지 못했다.
④ 아테네
아테네는 정복 국가의 성격을 띠는 스파르타와 달리, 해상무역을 중심으로 성장한 폴리스이다. 처음엔 왕정이었다가 귀족들의 기병을 중심으로 한 귀족정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해상무역으로 상공인 계층이 경제적으로 성장하면서, 아테네는 점점 보다 민주적으로 변해갔다. 아테네가 가장 크게 변화하게 된 동기는 전술상의 변화였다. 상공인들은 축적된 부를 통해 중무장을 하여 보병으로 전투에 참여하게 되는데, 이를 중장보병이라 한다. 중장보병은 기병을 밀어내고 아테네의 주력이 되었다. 이를 통해 상공인 계층은 정치적인 발언권을 갖게 되었다.
⑤ 아테네의 민주주의 발달과정
솔론은 아테네의 주력이었던 상공인 계층에게도 정치적인 권한을 주어야한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솔론의 ‘금권정’이다. 비로소 상공인 계층인 부를 통해 정치에 참여를 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부의 정도에 따른 평등을 기하학적 평등이라고 하며, 솔론의 금권정은 기하학적 평등에 의한 민중의 참여정치인 것이다.
솔론의 개혁은 그 당시 상당히 진보적이고 혁신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이미 기득권을 잡고 있던 귀족들은 솔론의 개혁에 상당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으며, 상공인 층 역시 자신들의 정치 참여도에 대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결국 귀족과 상공인들은 서로 대립하게 되었는데, 이를 군사로 제압하고 권력을 잡은 것이 페이시스트라토스였다. 그는 군대를 통해 권력을 유지하고, 시민을 다독여 지지를 돈독히 하였다. 이러한 페이시스트라토스의 독재를 참주정이라고 한다.
참주정은 참주였던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죽음과 거의 동시에 폐지되었다.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아들들의 정책은 시민들에게 시원치 않았고, 시민들은 그들을 결국 추방하게 된다. 이후 클레이스테네스는 앞서 나타났던 참주의 등장을 저지하기 위해 도편 추방제를 실시하였으며, 500인회를 구성하고 여기에 성인 남자를 참여시켜 민주주의의 기틀을 다져갔다.
페르시아 전쟁은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비롯한 지중해 폴리스들에게 크나큰 위험이었다. 오리엔트에 위치해 그동안 많은 문화를 그리스 지역에 전파한 바 있는 페르시아는, 이젠 무력을 가지고 그리스 세계의 발을 들여놓게 된 것이다. 3차에 이른 페르시아 완정은 마라톤 전투나 살라미스 해전을 통해 그리스의 폴리스들이 힘을 합쳐 막아내었다. 페르시아 전쟁 이후, 그리스는 훗날 있을 페르시아의 침략에 대비하여 서로 동맹을 맺게 되는데, 아테네를 중심으로 한 델로스 동맹도 그러한 동맹 중에 하나였다.
페르시아 전쟁이 끝나고 아테네를 맹주로 하는 델로스 동맹의 완성은 아테네의 생활수준에 큰 변화를 주게 된다. 거기에는 민주주의도 포함되는데 페리클레스는 델로스 동맹의 전쟁자금을 끌어들여 민주주의 발전의 발판으로 삼았다. 페리클레스는 민회에 참여한 시민들에게 수당을 지급하고, 특수직이 아닌 일반 행정직 같은 경우에는 추천으로 임명하였다. 하지만 이런 아테네의 영광은 페리클레스 사후에 선동정치가들에 의해 중우(衆愚)정치로 변질되었고,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패배로 아테네인들은 오히려 민주주의에 좋지 않은 감정마저 갖게 된다.
Tip. 아테네 민주주의 발달 과정
솔론의 금권정 -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참주정 - 클레이스테네스 - 페리클레스 - 중우정치
* 주의
아테네 사회가 다소 불완전하지만 민주주의 그 자체는 아니라고 보는 것이 좋다.
그 때의 민주주의의 개념과, 지금의 민주주의의 개념은 너무나 다르다. 별도의 것이라고 봐도 좋다.
⑥ 폴리스의 쇠퇴
아테네의 델로스 동맹과 같이 스파르타를 맹주로 하고 있던 펠로폰네소스 동맹은, 아테네와 델로스 동맹을 탐탁케 여기지 않았다. 결국 델로스 동맹과 펠로폰네소스 동맹이 격돌하여 전쟁이 일어나게 되는데, 전쟁은 육군이 발달한 스파르타에게 아테네가 패배하면서 끝났다. 이를 펠로폰네소스 전쟁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폴리스들의 전쟁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던 도시국가에겐 큰 부담을 줄 수밖에 없었다. 아테네는 스파르타에 의해 식민지로 전락하였으며, 플라톤은 민주주의를 중우정치(衆愚政治)라고 비난했다. 폴리스 후반기에 주도권을 잡은 것은 아테네도 스파르타도 아닌 테베였으며, 테베 역시 오랜시간을 버티지 못하고 결국 마케도니아에게 멸망하였다.
⑦ 그리스의 문화
그리스의 문화는 기본적으로 인간 중심적, 현세 긍정적, 합리적인 성격을 띤다. 그러한 성격은 바로 미술에서 나타나는데 페르테논 신전과 아테네 여신상에서 볼 수 있는 조화와 균형적인 미가 바로 그것이다. 아테네에선 특히 철학이 발달하였는데 탈레스, 데모크리토스와 같은 자연 철학자부터 소피스트,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이 있다. 역사서로는 최초의 역사서라고 일컫는 헤로도토스의 『역사(페르시아 전쟁사)』와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가 있다.
* 생각해볼 문제
그리스의 문화가 저러하다면, 과연 페르시아나 이집트는 동물 중심적이고, 현세 부정적이며, 불합리적인 문화를 이루었을까? 당연히 아니다. 이는 서구 학자들에 의해 미화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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