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국내의 민족 운동(비밀결사)
일제의 남한 대토벌(1907)로 인해 국내에선 실질적인 의병활동 및 항일 운동의 전개가 곤란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국내에서의 항일 활동은 비밀 결사의 형태로 전개된다. 1912년 임병찬이 고종의 밀지를 받고 국내에서 활동하고 있던 의병을 규합하여 만든 독립 의군부는 국권 반환을 위해 편지 등을 통하여 국제 사회 및 일본을 향해 요구하였다. 또한 의병 투쟁을 계획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고종의 명령을 받아 결합된 비밀 결사였으므로 주된 목표는 황실의 부활, 즉 복벽적인 것이었다(왕실부활, 복벽주의).
또한 대한 광복회는 군대식 조직을 가진 비밀 결사로 독립운동, 무관학교 설립비 등을 모금하였다. 공화정을 주장하였으며, 그 유명한 김좌진 장군이 속해있었던 단체이기도 하다. 독립운동, 무관학교, 김좌진 등의 키워드에서 읽을 수 있듯이 독립 전쟁을 통한 국권 회복을 주장하였다.
여성 비밀 결사 조직인 송죽회와 조선 국권 회복단, 자립단 등이 있다.
2) 해외 독립 운동 기지 건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국내에선 실질적인 항일 운동이 불가능 하였다. 때문에 해외에서의 독립 운동이야 말로 진정한 무장 독립 투쟁의 대안이었다. 해외의 독립 운동 기지는 크게 만주, 연해주, 상하이, 미주, 네 곳으로 나눠볼 수 있다.
만주 역시 서간도 북간도 북만주로 나눌 수 있는데, 서간도에는 삼학사의 경학사(후에 부민단으로 개칭), 신흥 무관학교, 대한 독립군, 서로 군정서 등이 대표적이다. 북간도에는 중광단(후에 북로 군정서으로 개칭, 김좌진 장군), 서진서숙(후에 명동학교로 개칭) 등이 있었고, 북만주에는 1921년 대한독립군단이 결성하게 되는 한흥동(韓興洞 : 한족이 흥하는 동네)가 있다.
연해주 지방에서는 성명회, 권업회와 같은 항일 결사를 비롯하여 유인석의 13도 창의군(정미 의병의 이인영의 13도 창의군과 다름, 주의), 대한 광복군 정부(1914, 이상설), 대한 국민 의회(1919, 손병희, 무장독립론) 등이 있었다.
상하이에는 신한 청년당(1918, 안창호, 외교독립론)이 후에 상하이 임시정부의 모태가 되었으며 미주에는 대한인 국민회(1909, 안창호, 이승만), 하와이에서 박용만이 조직한 군대인 조선 구민군단(1914)이 있다.
18.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1) 3.1 운동
1차 세계대전 이후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와 1918년 만주 길림에서 발표된 무오독립 선언서, 1919년 도쿄에서 발표된 2.8 독립 선언이 촉매가 되어 이윽고 1919년 3월 1일. 역사에 길이 남을 3.1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본래 민족 대표 33인이 주도하기로 하였으나, 그들이 중국집에서 임의로 선언서를 낭독하고 자수해버리는 바람에 계획된 일정에 차질이 생기기도 하였다. 기다리던 학생들과 종교인 등은 계획되로 진행이 되지 않자, 스스로 기미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고 시위를 시작하였다. 처음 운동이 시작했을 때는 참가자들은 학생, 종교인, 지식층으로 구성되어 비폭력주의를 표방하고 힘차게 태극기만 휘날렸지만, 점점 3.1운동이 지방으로 확산되는 과정에서 사회주의의 영향으로 상인, 노동자, 교사, 학생, 농민 등이 참여하였다. 일제는 무자비한 탄압을 했고, 견디지 못한 사람들은 무력으로 투쟁하기도 하였다.(* 추가사항 : 특히 농민들 같은 경우 전에 실시되었던 토지조사사업 등으로 많은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그들의 일본에 대한 불만은 높을 수 밖에 없었다.) 운동이 점점 진행함에 따라, 상대적으로 농민 등의 참여가 두드러지게 증가한 다는 것도 알 수 있다.
3.1운동은 운동은 3.1운동 그 자체보다 3.1운동이 가져온 결과가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일단, 일제의 통치 방식이 무단통치에서 소위 '문화통치'라고 불리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이번 3.1운동을 통해 하나의 통일된 독립운동 관리조직이 필요함을 절감하였고, 이로 인해 임시정부 수립에 영향을 주게 되었다. 국내에선 실력양성운동이, 국외에선 무장독립투쟁이 활성화하게 되었으며, 사회주의의 영향으로 독립 운동이 대중화 되기도 하였다.
2) 대한민국 임시정부
3.1운동의 영향으로 몇몇 개의 임시정부가 생겨났다. 무장독립투쟁 노선을 걷고 있던 대한 국민 의회는 연해주에 있었고,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한성 정부는 국내에, 안창호가 외교활동을 위해 만든 훗나 임시정부가 되는 신한청년단은 상하이에 있었다. 이러한 3개의 임시정부를 안창호가 '임시 정부 통합안'을 발표함으로써 이들 임시정부가 합쳐져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상하이에 자리잡게 되었다.
▷ 한성 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
-> 한성 정부의 조직과 인선을 계승한다는 것은 한성 정부가 한성에 있었다는 것을 특별히 인정한다는 것이다. 이승만이 임시정부의 대통령이 된 것도 이 때문이다.(물론 노인네라서, 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 위치는 상하이로 한다. -> 외교독립론(외교 > 무장) / cf. 만주, 연해주는 무장 투쟁론
임시정부는 비밀 행정 조직이었던 연통제와 통신을 담당했던 교통국을 통해 활동하였다(행정). 만주에 이륭 양행, 부산에 백산 상회 등과 함께 애국 공채 발행으로 군자금을 조달하였으며, 군대조직으로는 육군 주만(住滿 ; 만주에 있는) 참의부와 훗날 만들어지는 광복군 사령부, 광복군 종영, 한국 광복군이 있다(군사). 파리 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하였고, 미주엔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구미 위원부를 설치하여 외교 분야에서도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다. 독립 신문(독립 협회의 독립 신문과 이름만 같지 내용은 다르다)과 사료 편찬소 등을 설립하는 등 문화적인 면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일제의 탄압은 계속되었으며 연통제와 교통국이 일제에게 파괴되기에 이른다. 또한 실리 없는 독립운동이라며 외교독립론이 비판받기도 하였다. 이러한 험학한 분위기 가운데, 우리의 이승만은 또라이짓을 잊지 않았다. 이승만이 국제연맹과 미국에 위임 통치 청원을 한 사실이 독립운동가 사이에 알려지자, 독립운동가들은 국민 대표 회의를 긴급소집하고 과연 독립운동은 이대로 괜찮은가, 라는 명제로 머리를 맞댄다. 이에 임시정부를 개편하자는 외교독립론, 실력양성론자들(개조파)과 아예 새로 뜯어 고쳐야 된다는 무장독립투쟁론자(창조파)들이 대립하기에 이른다. 끝내 창초파는 임시정부를 탈퇴하게 되고 이승만 역시 대통령 자리에서 탄핵되었다. 임시정부는 이러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지도 체제를 개편하고, 김구가 사(私)조직인 한인 애국단을 조직(1926)하였다. 하지만 오히려 이러한 노력은 임시정부의 내부분열이 얼마나 심했는지, 임시정부의 상황이 얼마나 안좋았는지 새삼 깨닫게 하는 바이다.
Tip. 독립 운동론
1. 무장 투쟁론 : 일제와의 독립 전쟁을 통해 독립을 얻어내자는 노선
-> 신채호, 이동휘, 손병희 등
2. 실력 양성론(준비론) : 힘을 길러 독립 전쟁을 준비하자는 노선
-> 안창호
3. 자치론 : 일제 지배하에서 자치를 얻자는 노선 -> (삐꾸) 이광수, (찐따) 최린
4. 외교독립론 : 국제 연맹이나 미국 등 강대국의 도움으로 독립을 얻자는 노선
-> (또라이) 이승만
5. 계급 투쟁론 : 계급 투쟁을 통한 일제의 지배 계급 타도(사회주의계) -> 박헌영
19. 의열 투쟁
1) 의열단
3.1운동 이후 무장투쟁의 필요성이 대두되자, 김원봉과 윤세주 등이 만주 길림에서 비밀 결사인 테러조직을 조직하게 된다(1909).
신채호의 「조선 혁명 선언(외교론, 자치론, 준비론 등을 비판하며 민중의 직접 혁명을 촉구)」을 행동 지침으로 삼아 김익상(총독부에 폭탄 투척), 김상옥(종로 경찰서에 폭탄 투척), 나석주(동척에 폭탄 투척) 등이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하지만 비밀 결사의 한계를 인식하고 독립 운동에 중추적인 역할을 할 정당(政黨)과 군사조직으로 거듭나기 위해 의열단원 전체가 중국의 황포 군관학교에 입학하여 훈련을 받았으며 조선 혁명 간부 학교를 설립(1932)하기도 하였다. 후에 김원봉은 조선 민족 혁명단을 결성(1935)하고, 조선 의용대를 창설(1937)하여 항일 운동의 최전방에 나섰다.
2) 한인 애국단
국민 대표회의 이후로 침체된 임시정부의 재활을 꿈꾸며 김구가 조직한 사조직이다. 이봉창(일왕의 마차에 폭탄 투척), 윤봉길(훈커우 공원에서 폭탄 투척) 등이 대표적이며, 특히 윤봉길의 의거는 중국인들의 의식을 바꾸는 기폭제 역할을 하여 중국 국민당는 그들의 영토 내에서 무장 독립 투쟁을 하도록 허락해 주었다. 또한 국민당은 임시정부에 대한 지원도 적극적으로 하게 되었다.
Tip. 의열단과 한인 애국단의 비교
의열단 : 국내에서 활동
한인 애국단 : 외국에서 활동
20. 무장독립투쟁의 전개
순서, 장소, 전투를 승리로 이끈 대장, 혹은 대표자 등은 꼭 알아두자. 요즘 많이 나오는 추세다(거의 2문제 정도).
1920년, 포수 출신의 의병장이었던 홍범도의 대한 독립군이 일본군을 북간도 지방의 봉오동에서 대파하였다. 분노한 일본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일본은 간도 훈춘에 있던 군벌에게 자국 공사관에 불을 지르고 난리를 부리도록 자작극을 의탁하였다. 이것을 '훈춘 사건'이라 하는데 이로 인해 일본은 간도로 대규모의 병력을 옮길 수 있는 구실을 얻게 되었다. 김좌진의 북로군정서는 일본의 이러한 움직임을 간파하고 홍범도의 대한 독립군과 연계하여 청산리에서 큰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이번에도 참패를 겪게된 일본은 간도참변을 일으켜 보복(1920)하였고, 간도에서의 독립운동은 좌절되어 독립군들은 북만주에 있는 한흥동에서 전열을 가다듬고 대한 독립군단을 조직하게 된다.
대한 독립군단을 조직한 독립군은 소련령으로 들어가 독립전쟁을 전개하고자 하였으나 소련의 내란에 휘말려 변을 당하게 된다(자유시 참변, 1921). 수많은 독립군이 죽어갔으며, 살아남은 독립군들은 다시 만주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만주에 돌아온 독립운동가들은 참의부(대한민국 임시정부 직속부대, 1923), 정의부(1924), 신민부(1925), 소위 3부를 성립하게 되며 민정(民政)과 군정(軍政)을 아우르는 자치 정부가 생겨나게 되었다.
일제는 이것 마저 만주 군벌과의 미쓰야 협정(1927)을 통해 독립군에게 현상금을 걸고 만주 군벌에게 경제적인 지원을 하였다. 이에 독립군들은 3부를 지역중심으로 통합하여 남만주에는 국민부를 북만주에는 혁신의회를 세웠다. 후에 국민부와 혁신의회는 각각 조선 혁명당과, 한국 독립당으로 발전하여 휘하에 양세봉 장군이 이끄는 조선 혁명군과 지청천 장군의 한국 독립군을 두었다. 단체의 이름으로 봐선 다분히 사상을 중심으로 통합한 듯 하나, 실은 사상과 관련없이 지역 중심으로 통합되었다는 걸 간과해선 안된다. 그렇기 때문에 3부의 통합은 민족 유일당 운동의 하나로 손꼽는다.
1931년 일제가 드디어 대륙 침략의 야욕을 노골화하여 만주를 침략하고 괴례국인 만주국을 세웠다(만주사변). 만보산 사건(한중 물꼬 싸움) 이후로 민족 감정이 좋지 않았던 중국과 한국인 사이가 만주 사변 이후 상호 협력적인 형태로 바뀌어가며 윤봉길 의사의 서거 또한 한 몫하여 한중 연합작전을 가능하게 하였다. 한중 연합작전에선 앞에서 만들어진 조선 혁명군과 한국 독립군의 활약을 하게 되는데, 조선 혁명군은 중국 의용군과 연합하여 영릉가, 흥경성 등에서, 한국 독립군은 중국 호로군과 연합하여 쌍성보, 대전자령 등에서 연합하여 일제에 대항하였다.
1935년 의열 투쟁의 한계를 절실하게 느끼고 있던 김원봉은 의열단, 한국 독립당, 조선 혁명당 등을 통합하여 조선 민족 혁명당을 조직하였다(1935). 이후 조선 민족 혁명당의 산하 부대인 조선 의용대를 창설(1937)하여 활발한 항일 활동을 보인다. 하지만, 중국 국민당 의 하수인 노릇(찌라시 뿌리기, 항복 권고 등의 잡일)만 하게 되자, 분노한 대다수의 조선 의용대는 화북지방으로 월북하여 중국 국민당 등지고 중국 공산당과 손을 잡게 된다. 자세한 이야기는 뒤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한편, 동북 지방에 중국 사회주의자들과 조선인 사회주의자들로 구성된 동북 항일 연군(東北抗日連軍, 동북쪽에서 일본에게 대항하는 군대)은 국내의 민족 유일당 조직 중 하나였던 조국 광복회의 도움을 받아 보천보 전투를 성공적으로 끝냈다. 후에 동북항일연군에 있던 조선인 사회주의자들은 소련군에 편입되어 해방후에 국내에 들어오게 되는데, 이들을 '갑산파(김일성 포함)'라 한다.
앞서 말한 것과 같이 국민당의 처우에 불만을 품은 조선 의용대의 몇몇 사람들은 공산당이 있는 화북지방으로 이동하여 중국 공산당과 연안 지방에서 손을 잡게 된다. 조선 의용대는 화북 지방에 있는 사회주의 단체인 조선 청년 연합회와 연계하여 조선 독립 동맹을 결성하고 조선 의용군을 창설하여 활동하였다. 해방후에도 중국의 공산혁명에 참가하여 맨 마지막으로 해방된 조국에 들어온 독립운동가들이기도 하다. 그들은 '연안파'라 불리며 해방 북한의 주력부대가 되었다.
1940년 임시 정부의 단결을 강화하기 위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한국 독립당(3부가 통합된 한국 독립당과 다름, 주의.)을 중추로하여 한국 광복군을 창설하였다. 창시될 당시만 하여도 30명 남짓의 소규모 조직이었지만, 1942년 김원봉을 비롯한 남아 있는 조선 민족 혁명당이 힘을 보탬으로써 조직다운 면을 갖추게 되었다. 그들은 대독, 대일 선전포고를 하고, 연합군의 일원으로 인도, 미얀마 작전에 참가하여 한 나라의 국군(國軍)적인 면모를 보였다. 처음에는 국민당 산하에서 독자적인 지휘권 없이 활동하였으나, 후에 독자적인 지휘권을 얻게 되어 미국의 도움으로 국내 진공 작전을 계획하였으나 일본이 1945년 8월 15일 항복하면서 무산되고 말았다.
Tip. 무장 독립투쟁 전개도
1920년 봉오동 전투(홍범도), (훈춘사건), 청산리 전투(김좌진) - 승리
간도참변(경신참변) - 시련
대한독립군단 - 극복 의지
1921년 자유시 참변 - 시련
1923~1925년 3부 성립 - 극복 의지
1927년 미쓰야 협정 - 시련
1928년 3부 통합 - 극복 의지, 민족 유일당
1931년 만주 사변 - 시련
1930년대 한중 연합 작전 - 극복 의지
1935년 조선 민족 혁명당 결성 - 극복 의지, 민족 유일당
1936년 동북 항일 연군 조직 - 극복 의지
1937년 중일전쟁 발발 - 시련
동북 항일 연군 + 조국광복회 -> 보천보 전투 - 민족 유일당, 극복 의지
조선 의용대 창설(조선 의용대의 이동 경로 주의) - 민족 유일당, 극복 의지
1940년 한국 광복군 창설 - 극복 의지
1942년 한국 광복군 + 조선 의용대 - 민족 유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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