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로마 공화정의 발전
로마는 기원전 8세기경에 이탈리아 반도에서 건국되었다. 즉, 로마는 아테네와 스파르타, 알렉산드로스 제국과 같은 시대에 있었으며, 왕정을 거쳐 공화정으로 발전하게 된 국가이다. 로마의 공화정은 기본적으로 귀족들에 의해 운영되었는데, 이는 관직에는 따로 급료가 없었기 때문에 귀족이 아닌 이상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였다. 하지만, 아테네와 같이 평민들이 부를 축적하고 중장보병으로 전쟁의 주역이 되면서 평민들은 다시금 귀족에게 참정에 대한 요구를 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로마 근교에 있는 성산(聖山)에 모여 시위를 했는데, 이를 성산사건(BC 494)이라고 한다. 성산사건을 통해 평민회와 ‘호민관(護民官)’이 설치되어 평민들의 권리를 보장하였으며, 호민관은 원로원의 부당한 입법과 행정을 거부할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 이후에도 로마 최초의 성문법인 12표법은 귀족의 자의적인 법 해석을 방지하였으며, 리키니우스법을 통해 최고 권력자였던 2명의 집정관 중에 1명을 평민에서 선출하게 되었다. 또한 호르텐시우스법은 평민회의 권위를 더욱 높여 결국 입법기관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명시하고 있다. 평민의 권리 향상은 그만큼 그들의 전쟁적인 활약을 엿볼 수 있으며, 이러한 과정들을 통해 결국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할 수 있었다(BC 3세기 초).
Tip. 로마 공화정의 발전
귀족 공화정 - 성산사건 - 평민회, 호민관 설치 - 12표법 - 리키니우스법 - 호르텐시우스법
② 로마 공화정의 위기
내정이 안정된 로마는 점점 외부로 팽창하였다. 카르타고와 지중해 해상권을 놓고 카르타고와 전쟁을 하였으며(포에니 전쟁 BC 264 ~ 146), 동부로는 마케도니아, 시리아, 이집트 등을 정복하고 속주로 편입했다. 그런데 문제는 포에니 전쟁이 끝나고 나서 자영농들에게 생겼다. 포에니 전쟁은 너무 오랜 기간의 전쟁이었고, 이집트 등의 속주에서 싼 값에 곡물이 들어오면서, 자영농은 몰락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몰락하여 귀족의 소작농이 되거나, 귀족의 고리대에 걸려들어 땅을 헐값에 팔게 되었다. 자영농들은 몰락하여 일자리를 찾기 위해 로마와 같은 대도시에 모여들기 시작했으며, 귀족들은 병합한 땅을 노예를 통해 대농장(라티푼디움)을 경영하였다. 평민회를 근본으로 하던 로마 공화정의 위기는 이렇게 찾아왔다.
공화정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그라쿠스 형제와 같이 평민의 편인 평민파는 귀족의 토지 소유 제한과 토지 재분배를 추진하는 등의 개혁을 시도하였으나, 키케로 같은 귀족을 지지하는 벌족파에 의해 실패하면서 평민파와 벌족파의 대립은 격화되었고, 스파르타쿠스의 난과 같은 노예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결국 반란들은 군인 세력가에 의해 평정되었으며 이러한 군인 세력가들은 평민파와 벌족파 등의 정치인에 대한 대안으로 떠올랐다. 군인 세력가들은 이제 권력을 잡고 정치에 뛰어들었으며, 그 중 3명에 의해 좌우되었던 시기를 삼두정치기라고 한다.
③ 로마 제국
삼두정치는 두 차례에 걸쳐 나타나게 되는데, 1차에는 카이사르가, 2차에는 옥타비아누스가 권력을 홀로 장악하면서 끝마치게 되었다. 카이사르와 옥타비아누스는 양부모와 양자 사이로, 한 가족이 권력을 가지게 된 것이다. 더욱이 원로원은 옥타비아누스에게 ‘존엄한 자(아우구스투스)’의 칭호를 내려주고, 권력을 강화시켜주었다. 옥타비아누스 스스로도 자신을 ‘제1시민(프린켑스)’라고 불렀으며, 과거 카이사르가 남겨주었던 막대한 유산과 군사 지휘권을 독점하면서 제정의 기틀을 갖추어갔다. 이러한 과도기적 정치형태를 ‘원수정(프린키파투스)’이라고 하며, 원로원과 공화정은 실질적으로 껍데기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아우구스투스와 그 자손들은 대대로 권력을 승계하였으며, 로마는 영토를 확장해 지중해를 아우르게 되었다. 또한 5현제 시대에는 로마 제국의 전성기였는데, 이를 로마의 평화(Pax Romana)라고 한다.
④ 로마 제국의 쇠망
5현제 시대가 끝나고 로마에는 다시 한 번 혼란의 시대가 왔다. 이젠 군인들마저 황제의 자리에 앉을 수 있게 되었고, 다른 군인들 역시 황제의 자리를 노리는데, 이러한 혼란기를 군인황제 시대(235 ~ 285)라고 한다. 50년간 26명의 황제가 교체될 만큼 정치적으로 혼란했으며, 도시와 농촌 또한 피폐해지고 상공업도 쇠퇴하여 시민들이 몰락하였다. 또한 게르만, 사산 왕조 페르시아 등의 외부의 침입이 많았으며, 속주의 내란도 끊이질 않았다. 결국 노예의 공급도 자연스럽게 줄어들었으며, 이에 부자유 소작인(콜로누스)에 의한 콜로나투스가 유행하였다.
그 와중에도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군대를 장악하여 정치를 안정시키고 오리엔트식 전제 군주제를 도입하여 황제권을 굳건히 하고자 했다. 또한 통치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제국을 4등분하여 통치하게 하였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로마를 다시 일으키기 위해 관료제를 정비하고, 황제권을 강화했으며 밀라노 칙령으로 크리스트교를 공인했다. 그는 제국의 중심을 콘스탄티노플로 옮겨 새로운 시작을 위해 노력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정치적인 혼란은 계속 되었으며 중산층 시민의 몰락으로 로마는 점점 쇠약해져갔다. 끝내 로마제국은 2개로 분열되었으며, 서로마는 게르만의 침입으로 멸망(476)하였고, 동로마는 이후 천년정도 더 지속되었다. 서로마의 멸망은 주로 고대의 종지부를 찍는 사건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이 많다.
⑤ 로마의 문화
로마의 문화는 그리스문화와 헬레니즘, 그리고 오리엔트의 문화를 아우르는 것이다. 이를 로마 문화의 모방적인 성격이라고 하며, 법률, 토목/건설 분야에서 보여준 실용적인 문화 또한 로마 문화의 중요한 특징이다. 종교는 다신교로 시작하여 황제 숭배, 크리스트교 공인 등으로 압축할 수 있다. 철학은 스토아학파의 금욕주의를 따랐다. 법률은 처음에는 귀족들이 관습법으로 다스렸다가, 성문화되었고 평민들에 의해 시민법이 발달하였다. 스토아학파의 영향을 받아 만민법이 발달하였으며, 로마법의 총집합이라고 할 수 있는 로마법대전이 훗날 동로마제국에서 만들어졌다. 로마인들은 건축에서 유별난 재주를 보였는데 도로, 수로, 개선문, 목욕탕, 원형 경기장인 콜로세움 등이 대표적이다. 과학에선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이 등장해 중세사회까지 영향을 끼쳤다. 역사서로는 리비우스의 『로마사』, 타키투스의 『게르마니아』, 카이사르의 『갈리아전기』, 플루타르크의 『영웅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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