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예를 통한 교훈
궁예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우리는 흔히 패주 혹은 혹세무민의 무능한 군주 혹은 광기의 왕, 미친 종교 지도자라는 단어를 떠올린다. 대부분 궁예에 대한 기록은 삼국 유사와 삼국사기의 기록을 인용하기 때문이다. 그 외 다른 기록은 없기에 궁예에 대한 우리의 선입관은 고정 되어있는 것이다. 이것이 진실일까? 역사가라면 언제나 문제제기를 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 부분에 대한 문제제기를 해 왔다. 필자 역시 궁예의 실권에 대한 이유를 다른 시각에서 보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기록에 대한 의심으로부터 접근하려고 한다. 그러다보니 먼저 제시되는 문제가 위 두 저서의 신뢰성이다. 새 나라가 세워지면 역사편찬 작업을 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매우 보편적인 현상이다. 그리고 그 편찬에 있어 패국에 대한 내용은 새 나라의 정당성을 위해서 많은 부분이 조작 되기 마련이다. 대부분의 패국의 패주들의 공통점을 문란한 생활과 흉폭한 정치에서 찾는다. 하지만 모든 현실이 그렇지만은 않다. 단지 역량의 부족이라든가 일치되지 못했던 국론으로 인해 지속되는 주변국의 공격을 이기지 못해 멸망하곤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로 세워지는 나라에서는 역사를 편찬할 때 이부분을 진실하게 기록하지 않는다. 궁예를 보자면 국가를 세우기 전과 국가를 세운 후로 그 평가를 구분지을 수 있다. 개국에는 공이 있고 치국에는 죄가 있는 경우다. 마치 모택동의 평가와 흡사하다. 이런 것은 새로운 지배 세력 혹은 혁명 세력들이 자신들의 지배의 정당성 혹은 민족 통합의 천명성을 위해 망국 혹은 패주에 대한 정확한 기록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망국이 문제가 없을 수는 없다. 통일되지 못하는 국론, 신하의 마음을 모으지 못하는 무능하거나 귀를 닫고 있는 군주, 귀족들의 분열로 인한 국론의 분열 이런 것은 망국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궁예에 입장에서 보면 궁예는 개국 후에 부하 혹은 백성들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 그가 제시했던 꿈과 비전이 개국과 치국에 있어 변해야 했던 것이다. 많은 지도자들이 이것에 실패한다. 개국에 필요한 영웅과 치국에 필요한 영웅이 따로 있는 것처럼 리더십과 제시되는 비전의 변화를 제시하지 못했을 때 국론은 분열되고 개국의 영웅이 치국의 죄인이 되는 것이다. 궁예는 이부분을 놓쳤다. 그것은 궁예의 리더십에 문제가 있었다고 볼 수 있겠다. 왜 이런 문제가 생겼는가? 문제는 그가 종교인이었다는 것이다. 그의 직업은 스님이다. 이것은 궁예에게 양날의 칼로 다가온다.
궁예는 사실일지 아닐 지는 모르지만 실권한 왕족이었다. 태어나자마자 왕위 다툼의 희생물로써 한쪽 눈을 잃게 된다. 이 이야기는 궁예에게 두가지 힘을 가져다 주었다. 궁예의 신체적 결함을 보완해 주는 동시에 궁예로 하여금 왕족으로써 반란의 명분을 가져다 주었다. 그리고 그의 직업은 스님이었다. 이것은 그가 당시 신라의 폭정 혹은 백성을 배제한 정치에 환멸을 느끼던 백성들의 정신을 만져주었다. 신라의 모든 백성의 대부분이 불교신자였기 때문이다. 궁예는 현세의 미륵이라 불리웠고 백성의 구원자로써 다가 왔다. 궁예는 백성들에게 불국토의 극락과 같은 세상을 약속했고 백성들은 믿고 따랐다. 왕족이라는 명분과 종교적인 카리스마 이것이 궁예가 갖고 있던 리더십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것은 다른 어떤 군주도 갖기 힘든 장점이었다. 많은 호족들과 군벌들 역시 당시 필요한 것이 민심이라는 것을 알고 궁예를 따랐다. 이쪽이나 저쪽이나 궁예의 개국을 위한 비전이 맞아떨어졌던 것이다. 같은 꿈을 꾸는 수 만명의 사람들은 그 꿈을 현실로 만들어 냈고 후 고구려 혹 태봉국은 그렇게 탄생했다. 후 삼국 중 가장 넓은 영토와 통일에 가장 유력한 장점을 갖고 출발하게 된 것이다. 이제 궁예는 선택을 해야 했다. 왕족으로써의 길인가? 종교인으로써의 길인가?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두가지를 모두 가지고 갈 수는 없다. 국가란 체제와 조직에 의해 이루어지고 그 체제와 조직은 지배질서와 구조를 통해 정리되는 것이다. 이러한 정리는 왕으로써의 색깔이 분명해야 한다. 그러나 궁예는 왕이자 종교지도자였다. 국가를 다스리는데 필요한 것은 치국의 도였지 불가의 도가 아니었던 것이다. 궁예가 국가 건설 후 왕을 세우고 종교지도자로 물러갔다면 궁예는 만고의 영웅이 되었을 지도 모른다. 정말 당시의 살아있는 미륵이라는 말처럼 새나라의 구원자로써 이름을 남겼으리라. 하지만 궁예는 그러지 않았다. 그는 불가의 도로 치국을 하려고 했다. 이것은 백성들과 호족 혹은 군벌들에게 있어서 매우 당황스러우면서도 불편한 일이었다. 결국 같은 꿈을 꾸던 궁예와 백성들이 이제 다른 꿈을 꾸게 되었다. 그렇다면 불가의 도로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왜 문제였는가?
궁예는 매우 불심이 깊은 사람이었던 것으로 사료된다. 물론 그 불심이 올바른 것이었는지는 알수 없다. 궁예가 앞장세웠던 미륵신앙은 정통이 아닌 구원적 이단 민간신앙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부분에 있어 궁예는 나름대로 경륜과 지식체계를 세웠고 종교적으로 매우 엄격했으며 원칙이 분명했기에 백성들의 마음을 샀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믿고 따를때는 문제가 없지만 모든 백성들에게 강요했을 때는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선악과 율령의 기준이 불가의 도라는 것은 스스로 깨우쳤을 때는 가능하겠으나 대부분의 백성들과 신하들은 종교인이 아니었고 또한 종교적 거룩함과는 거리가 먼 평화를 생각했다. 백성들은 궁예가 생각했던 불심과 불가의 도로 이뤄지는 극락이 아닌 삶의 안정과 부국강병의 극락을 꿈꾸었던 것이다. 궁예는 자신의 불가의 잣대를 가지고 나라를 통치했고 그 잣대는 매우 좁았을 것으로 보인다. 궁예로써는 그것이 당연한 것이었고 백성들로써는 매우 혹독한 것이었으리라. 특히 지방의 호족들과 군벌들에게는 말도 안 되는 일이었을 것이다. 서로 다른 꿈을 꾸기 시작하자 자신이 따르던 미륵은 이제 미륵이 아닌 마군이 된 것이다. 궁예가 미친 것이 아니라 신하와 궁예가 서로 다른 꿈을 꾸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자 그들은 백성의 마음을 모을 수 있고 같은 꿈을 꿀 수 있는 영웅을 찾기 시작했고 이것에 부합한 자가 바로 왕건이었다.
왕건은 어떤 인물인가? 왕건은 궁예의 심복이자 궁예 밑에 가장 큰 세력이었다. 송악의 해상세력을 손에 쥐고 있었고 개국에 있어 가장 큰 공신이기도 했다. 백성들은 왕건을 영웅시했고 당시 종교적 새 바람이었던 풍수지리까지 들먹이며 왕건이 왕이 될 운명이었다는 것을 내세웠다. 이것은 왕건이 왕위를 얻은 이후에 생긴 이야기일 공산이 크다. 하여간 왕건은 전쟁을 수행하는 능력이 있었고 당시 불가 이외에 새로운 정신 이었던 풍수지리를 등에 없어 백성의 마음을 얻었다. 궁예는 결국 왕건의 반란으로 죽게 되고 왕건은 새나라 새왕조의 역사를 열었다. 궁예는 자신이 원하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원칙을 너무나 강조한 나머지 치국에 실패했다. 결국 패주로써 그 결과가 비참해 진 것이다.
궁예가 정말 미쳤는지 패주였는지 시대를 잘못만난 영웅이었는지 영험한 승려였는지 우리는 보지 않았음으로 알수가 없다. 하지만 한가지 교훈은 얻을 수 있다. 여기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인가? 바로 리더십에 대한 교훈이다. 리더십이란 팔로워들로 하여금 항상 꿈꾸게 하는 것이다. 리더는 언제나 모두가 같은 꿈을 꿀 수 있도록 세심하게 팔로워 들의 변화를 살피고 그들이 원하는 것에 대해 민감해 져야 한다는 것이다. 원리원칙도 중요하지만 상황과 시대의 변화와 흐름에 맞지 않는 원리원칙은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항상 같은 꿈을 꾸게하고 그 꿈에서 깨지 않게 하는 것이 리더의 역할 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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