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노사의 굴욕을 조종한 한 여인의 이야기
NO. 005 |
역사를 뒤흔든 마틸다의 복수 이야기 |
*** 배경 : 11세기 중세 서유럽(1077년 : 카노사의 굴욕) ***
이 이야기는 종교적 영향력이 강했던 11세기를 살아가면서 <카노사의 굴욕>을 기획한 마틸다라는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세계사 교과서에서 황제 하인리히 4세와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의 이야기만을 배웁니다. 그리고, 교황이 강했는지, 황제가 강했는지를 생각하보는 정도에서 이야기를 끝내곤 하죠. 하지만, <카노사의 굴욕>을 이끈 또 한명의 영웅은 따로 있답니다. 카노사의 굴욕 : 하인리히와 마틸데 우리가 교과서에서 보아서 알고 있는 카노사의 굴욕 사진의 의문점. 흔히 중세 서유럽은 봉건제도, 기사도, 기독교적 위계질서와 같은 단어로 설명하곤 합니다. 11세기에도 서유럽은 그런 분위기였습니다. 신성로마제국(현재 독일 지역)이라는 국가의 황제가 서유럽을 대표하였지만, 각 지역의 영주들은 황제권이 세지면 간섭이 많아질까봐 황제권을 견제하기 위해 교회세력과 교황을 끌어들이는 일이 많았답니다. 그러다보니, 교회가 국가일에 간섭하는 경우가 많아졌고, 교회가 타락했다는 소식도 많았답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3세는 이것을 이용하여 교회의 교황과 국가의 황제가 연합해서 큰 세력을 이룬 뒤 각 지역의 영주들을 토벌하고, 마지막에는 교회까지 점령하려는 야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희생양이 된 가문이 바로 카노사를 근거지로 하는 토스카나 가문이었습니다. 토스카나 가문은 타락한 교회를 개혁하기 위해 청렴한 개혁파 교황을 적극적으로 지지한 가문이었습니다. 그러자 보수 세력들은 토스카나 가문의 대영주인 보니파치오를 암살해 버린답니다. 미망인이 되어버린 토스카나 가문의 베아트리체 부인은 가문의 영광을 위해 고트프리트라는 힘있는 공작과 재혼을 합니다. 그러자 교황과 황제 연합군이 토스카나 지역을 공격했답니다. 고트프리트는 도망가고, 토스카나 가문은 모두 살육당했으며, 처참하게 멸망하게 됩니다. 미망인 베아트리체는 살려달라고 굴욕적으로 애원해서 그녀와 그녀의 어린 딸 마틸다만이 간신히 살아남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쁘장한 여인 계집아이라고 생각해서 살려놓은 영특한 마틸다가 신성로마제국을 위협할 철의 여인이 될 것이라는 것은 현명한 어머니인 베아트리체 외에는 아무도 몰랐지요. 베아트리체는 마틸다에게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3세를 죽이는 <복수>가 중요하다는 것을 끊임없이 강조했답니다. 얼마 후, 하인리히 3세가 죽고 나이 어린 황태자가 하인리히 4세로 즉위했습니다. 그러자 전에 도망쳤던 베아트리체의 재혼남편인 고트프리트가 베아트리체와 마틸다를 구출합니다. 고트프리트는 영약하게도 어린 황제를 이용하여 권력을 잡고, 자신의 동생을 교황 스테파누스 9세로 임명하였습니다. 그런 뒤 고트프리트가 죽자 권력은 뜻밖에도 멸망한 가문의 여인인 <베아트리체>에게 넘어간 것이죠. 그리고 베아트리체는 교황청의 청렴한 개혁파 수도사인 <힐데브란트>를 교황으로 밀기 시작했습니다. 토스카나 가문이 추구했던 청렴한 개혁파 교황의 꿈은 힐데브란트가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로 즉위하면서 마침내 이루어졌습니다. 베아트리체는 교회의 힘을 강화시키고,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에게 지난 날 복수를 하기 위해 교회 개혁운동을 시작합니다. 교황은 그것을 당연하다고 따르게 되었고, 옛 토스카나 가문의 전략적 요충지인 카노사를 마틸다에게 넘김으로서 토스카나 가문은 화려하게 부활하였습니다. 그리고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는 아주 강력한 교회 개혁운동을 시작합니다. 먼저, 성직자의 결혼제도를 없애고 성직매매자를 강력하게 처벌하였습니다. 아예 모든 성직자와 전쟁을 벌일 각오로 결혼한 모든 신부들을 강제 이혼시켜 버립니다. 또 마틸다의 계획을 받아들여 예루살렘을 탈환할 성지 탈환 십자군을 모집할 계획을 세우는데,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아서 준비작업만 시작하였습니다. 문제는 황제와 관련된 개혁이었습니다. 교황은 황제의 성직자 임명권을 철폐하고, 모든 교회는 교황을 수장으로 하여 통일한다고 발표해 버린 것입니다. 황제 하인리히 4세는 열받기 시작했겠죠. 하지만, 토스카나의 마틸다는 한술 더 뜨기 시작합니다. 교황에게 주교 회의를 열어 황제를 자극할 수 있는 대단한 문구를 발표하자고 말했으니까요. 그 내용의 핵심은 이런 거랍니다. <돈으로 성직자를 산 황제의 고문 주교들을 모두 파문하며, 교황은 황제까지 폐위시킬 권한이 있다.> 이 말을 들은 황제는 어이가 없어서 교황에게 맞 포고문을 발표합니다. <교황은 악한 자이며, 토스카나의 마틸다에게 흑심을 품어 둘이 부정한 관계이기 때문에 가짜 수도자인 교황을 폐위한다> 라고 발표한 것이죠. 이 말을 들은 마틸다는 기뻐했습니다. 황제가 이런 반응으로 나올 것을 예상했기 때문이죠. 교황은 이 말을 들은 즉시 <불경한 황제를 폐위하고, 황제에게 충성한 신하들의 서약은 모두 무효이다>라는 선언을 합니다. 교황의 선언문을 들은 영주들은 바로 교황의 편으로 돌아서게 됩니다. 왜냐면, 황제의 힘이 세질수록 지방의 영주들은 간섭을 많이 받을테니까요. 열받은 황제는 영주들의 군대를 모아 교황을 공격하려고 했지만, 동조하는 영주의 숫자가 적어서 도저히 전쟁에 이길 방법이 없었습니다. 한마디로 교황과 마틸다의 계략에 완전히 넘어간 것이지요. 황제는 자신이 뭔가 잘못했다는 판단을 내리고 토스카나 가문의 카노사까지 찾아갑니다. 그는 눈오는 성문 앞에서 3일간 무릎꿇고 빌면서 교황의 용서를 빌었답니다. 토스카나 가문의 마틸다는 드디어 가문의 원수를 갚았다는 생각에 너무나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리고 황제를 죽이려고 했죠. 그러나 자비로운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는 이 정도면 된 듯 하다면서 하인리히 4세를 용서해 줍니다. 하지만, 마틸다의 말을 듣지 않은 교황은 이 일을 곧 후회하게 된답니다. 하인리히 4세는 카노사의 굴욕을 새로운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비록 육체적인 고통은 있었지만, 황제권은 유지되었고, 한번 비굴해짐으로서 파문당한 것도 회복되었으니까요. 더 중요한 것은 교황이 황제를 용서했기 때문에 영주들도 황제를 적대할 명문을 잃었다는 점입니다. 독일 영주들은 이미 황제에게 반기를 들었는데, 교황이 황제를 용서해 버렸습니다. 이것은 황제에게 반기를 든 영주가 누구누구인지 황제에게 확실히 알려주는 결과만 되어 버린거죠. 결국, 독일과 북부 이탈리아의 영주들은 우왕좌왕하면서 서로 내전에 빠졌고, 하인리히 4세는 이 내전을 진압하면서 황제권을 강화했습니다. 이제 황제는 반대파 영주들을 숙청한 뒤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의 파문을 선언합니다. 뒤늦게 후회한 교황은 노르만의 장군을 불러들여 황제의 군대를 간신히 막았습니다. 하지만, 이민족에게 반감을 갖고 있던 로마 시민들이 노르만과 연합한 교황을 추방해 버려서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는 홀로 방랑하다가 죽게 된답니다. 이를 본 마틸다는 다시 한번 복수의 칼을 갈게 됩니다. 마침, 새 교황 선출 문제로 황제와 교회 모두 혼란한 가운데, 마틸다는 가장 청렴하고 개혁적인 주교를 우르바누스 2세로 선출합니다. 로마 시민들도 이 청렴한 교황을 적극지지했고, 마틸다는 황제 하인리히 4세의 세력을 막아내었습니다. 이제 마틸다는 하인리히 4세를 비참하게 파멸시킬 계획에 돌입합니다. 먼저 황제의 아들인 <콘라드>를 유혹한 거죠. 콘라드에게 이탈리아 지방의 왕의 자리까지 준다고 유혹한 뒤, 황제의 측근들도 돈과 권력으로 유혹하여 자신의 편으로 만들었답니다. 마침내, 하인리히 4세의 부인인 프락세디스 마저 아들의 영광을 위해 남편을 배신하고 마틸다의 근거지인 카노사로 망명하였습니다. 하인리히 4세는 부인과 아들을 저주하면서 아무도 없는 외로운 황제 자리를 살아야 했답니다. 하인리히 4세는 차남을 하인리히 5세로 지목하여 복수를 부탁하지만, 그 마저도 마틸다의 공작에 넘어가 아버지를 배신하고 교황에게 가 버린답니다. 마틸다는 황제의 첫째 아들 콘라드를 신성로마제국과 이탈리아의 통합왕이라고 불러주었지만, 아무던 영지도 신하도 없는 황제자리였답니다. 콘라드는 마침내 울화통이 터져서 마틸다를 원망하면서 후회하다가 27살의 나이로 죽고 맙니다. 황제의 둘째 아들인 하인리히 5세는 아예 황제인 하인리히 4세를 납치해서 스스로 황제가 됩니다. 이후 하인리히 4세는 백성들의 도움으로 다시 황제가 되지만 홀로 비통해 하면서 쓸쓸히 죽어간답니다. 그리고 마틸다와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황제와 싸우느라 실행하지 못한 <십자군> 원정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한답니다. 마틸다는 십자군 원정이 실제로 실행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자신의 영지 카노사에서 삶을 마감합니다. 그리고, 그녀가 생각한 1차 십자군은 전 그리스도를 묶어줄 만큼 가장 열정적인 십자군이었고, 유일하게 성지인 예루살렘을 탈환한 성공적인 십자군이었습니다. 기독교 중심이었던 중세, 근대 서구 역사는 기록합니다. 그레고리우스는 교회 개혁을 위해 헌신한 성자라고... 그리고 하인리히 4세는 교권과 투쟁했던 유명한 황제라고 말이죠. 그러나 기독교와 근대 서구역사는 또 한명의 여인을 기록해두었습니다. 그녀와 그녀의 가문이 없었어도 과연 우리가 알고 있는 카노사의 굴욕과 1차 십자군 원정이라는 사건이 역사에서 똑같이 일어났을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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