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그럼 대체 뭘 먹고 산거야?
자 그럼, 신석기인들의 식생활을 한번 팍팍~ 파헤쳐보자. 근데 솔직히 서아시아나 유럽의 신석기인들이 뭘 먹었는지까지는 알기도 힘들고 관심도 없지? 일단 우리 동아시아의 신석기인들이 농사를 지으며 먹었던 주식이 뭔지 한번 알아볼까?
동아시아에서 나는 잡곡류의 종류와 유적들을 보면 신석기인들이 좋아했던 기호식품은 도토리와 밤이었을거야. 특히 도토리는 영양분이 골고루 내포된 완전식품에 가까웠기 때문에 요즘으로 따지면 빕스나 베니건스에 가야 먹을 수 있는 특산품인거지.
뭐, 하지만 당시 농사 기술이 워낙 낮은 수준이었잖아? 그래서 계절에
따라 다른 음식을 먹으면서 버텨야만 했어. 예로 봄에는 나물류를 채집해서 먹고 상하지 않는 건 잠시 보관도 했겠지. 여름에는 강이나 바닷가 근처에 나가서 어류를 많이 먹었을 거야. 여름은 사냥의 계절이지. 가을에는 별미인 도토리와 밤
등의 수확물을 먹을 수 있는 최고의 계절이었지. 겨울은 좀 먹고 살기 힘든데, 버섯류와 칡, 마, 겨울 생선 등을 먹으면서 봄이 올때까지 버텨야 했어.
즉, 결론을 말하자면 이런 거야. 신석기 때 토지 이용이 시작되었다고 하지만, 그것은 가을 정도에 수확되는 일부 견과류 정도였어. 사실, 주생활은 사냥과 채집이었지. 농경이란 시작했다는 거에 의미를 둘 수 있는 수준이었거든.
2장. 우리 그냥 농사짓고 살게 해주세요~~
이렇게 농경 수준이 초보적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식량을 구할 때 가족들의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했어. 몇몇 가족들이 함께 모여 경력이 있는 사냥꾼을 지도자로 모시고 몇몇은 농사에도 신경쓰면서 주로 몰이 사냥을 했던거야. 이런 사회을 <씨족 공동체 사회>라고 하지. 씨족들의 지도자는 왕이나 군장이 아니라 가족들 모임의 대표였을 거고, 사냥이 잘 되도록 부족을 대표해서 기도를 하기도 했겠지.
여기서 특이한 건 중국 학자들인데, 당시에는 아이를 낳고 기르면서 유능한 사냥꾼을 양성할 수 있도록 힘을 쓰는게 여성이기 때문에, 신석기 시대는 여성이 사회 주도권을 갖는 모계제 사회라고 주장하고 있어. 여인이 주도권을 잡으면 여러 남자를 거느리고 살았기 때문에 일부다처제 사회라는 주장도 있구... . 증거는? 당연히 긍정증거도 부정증거도 없는 심증들 뿐이지만....
하지만 우리나라와 일본의 학자들은 아니라고 말하지. 남자가 사냥이나 농사에서 힘든 일을 맡아 하니깐 경제권도 남자쪽에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거든. 누가 경제권을 가지고 있었던지는 열심히 싸우라고 냅두고 토지이야기를 해보자.
신석기 시대에 정착생활을 했다면 토지 주인이 있었다는 건데, 그럼 땅 주인은 누구일까?
물론 당시엔 토지 소유권을 놓고 일어난 분쟁 자체가 거의 없었을 거야. 설령 있었다고 해도 지금까지 밝혀진
바가 없구.... 아마도 마을 공동체 전체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같이 농사짓고, 같이 사냥해야 했으니깐 <토지 공동 점유>가 아니였을까?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토지를 <점유>하다는 개념이 토지를 <소유>한다는 개념으로 바뀌면서 개개인이 토지를 갖게 된 것은 정복전쟁이 활발해지는 <철기
시대>라고 말하고 있어.
3장. 점점 먹을 게 늘어나는데 행복한 일일까요?
약 5천년전, 즉 세계최초의 문명인 수메르 문명이 탄생하고, 중국에서 국가가 등장하며, 단군할아버지가 나라를 세웠다는 기원전 2000년전.... 드디어 세계 곳곳에서 금속 문명이 등장했어.
이 때 중국에서는 공동체를 장악해서 세력을 갖게된 종교 제사장이 등장했고, 4백년 뒤 최초의 왕국인 상(은나라)를 만들었다고 해. 상나라의 특징은 바로 종교 제사장이 나라를 다스렸다는 점인데, 이건 각지 최초의 문명들이 가진 공통점이야. 서아시아 수메르에서는 도시의 수호신들이, 이집트에서는 태양신의 아들 파라오가, 인도에서는 제 1계급인 브라만이 등장하는 시기거든.
또 하나.... 이 시기에는 세계 4대문명이 만나는 접경지인 중앙아시아와 북방에서 스키타이인들이 정복사업을 했는데, 이 때 각지에 청동기가 전파되었지.
상트페테르부르크시 에레미타지 박물관 <스키타이인의 모습>
우리나라는 백년정도, 일본은 5백년정도 늦게 청동기가 전파되었어. 청동기가 전파된 각 지역에는 벼농사가 급증했고 문명이 비약적으로 발전했어. 하지만, 청동기와 벼농사는 직접 관련이 있진 않지. 왜냐구?
청동기는 요즘으로 따지면 <보석>과 같이 귀한 거야. 구리와 주석, 아연 등을 합금해야
제조가 가능하거든. 너무 귀해서 보통 지배층의 무기나 제사용품으로 주로 사용하였지. 그럼 농기구는? 여전히 농기구는 돌을 쓴거야.
굳이 연결시켜보자면, 청동기를 만드는 기술이 전파되면서 농사를 짓는 기술도 같이 전해져 들어왔다고 보는 것이 맞을 거야. 벼농사의 전파경로는 청동기 전파 경로와 매우 유사하거든. 만주 계통에서 한반도로, 그리고 일본으로 전래된 청동기의 경로와 벼농사 전파 경로가 일치하기 때문이야.
그럼 창동기와 함께 보급된 농사 기술은 어떤 것이었을까?
동아시아 사람들이 처음 시도한 농사는 견과류 등을 수확하는 것이었어. 밤을 많이 수확하였고, 깨,
도토리, 박 등도 영양분을 보충하는 별미였지.
하지만, 조금 시기가 지나면서 사람들은 비옥한 땅과 비료를 사용하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었어. 그것이 바로
<화경농법>이란 거야. 화경은 말 그대로 그 자리를 불태워서 비옥한 땅과 비료를 만든 후에 농사짓는 초보적인 방식이거든. 화전 농법으로
보리, 수수, 조, 팥 등을 효율적으로 재배할 수 있었어.
신석기 후기가 되면서 농사 기술은 더욱 발전했지. 그 때 등장한 방법이 바로 <수경농법>이란 거야. 말 그대로 물을 이용한 진화된 농사법이지. 물을 이용했기 때문에 물이 많이 필요한
<벼농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벼가 동아시아인들의 주식으로 자리잡게 된거야.
처음 수경농법을 써본 사람들은 북부 중국인들이야. 중국인들은 강가와 저습지 근처에서 벼농사를 지어본거지. 하지만 이게 한반도, 일본 등으로 넘어가면서 획기적으로 바뀌게 되지. 즉, 저습지를 찾아다닐 필요없이 직접 <관개시설>을 만들어 버린 거야. 동아시아 각지에 관개 시설이 등장하고,
이 때부터 인류는 먹고사는 고통에서 조금씩 해방되게 되는 거지.
철기시대에 등장한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관개시설 - 김제 벽골제 기념지
하지만 먹고사는 걱정에서 벗어났다는 것이 또 하나의 비극으로 다가오게 돼. 즉, 생산물과 관개시설을 놓고 다툼이 시작된거야. 청동기와 철기
시대는 서로 많은 생산력과 생산물을 차지하려고 부족간 전쟁을 벌이게 되거든. 이 전쟁으로 왕과 귀족이 생기고 노예가 생겼어. 인류 최초의 계급이란 게 생긴거지.
따라서 청동기 시대 이후엔 직접적인 생산력보다도,
생산력을 획득하려는 싸움으로 사회가 발전하게 된다는 점이 매우 중요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일정 지역을 확보한 지배자, 즉 군장이나 족장의 출현은 생산 영역을 놓고 벌이는 전쟁에서 시작된거야.
자, 이 정도로 신석기와 청동기, 철기 시대를 정리하고 이제 역사 시대로 넘어가보자. 먼저 세계 최초의 문명이라고 불리는 메소포타미아로 떠나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