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양 적성비
년 월에 왕이 대중등(大衆等)인 탁부(喙部) 출신의 이사부지(伊史夫智) 이간지(伊干支), [사탁부(沙喙部) 출신의] 두미지, 피진간지, 탁부(喙部) 출신의 서부질지(西夫叱智) 대아간지(大阿干支), 부지(夫智) 대아간지(大阿干支), 내례부지(內__夫智) 대아간지(大阿干支), 고두림성(高頭林城)에 있는 軍主들인 喙部 출신의 比次夫智 阿干支, 沙喙部 출신의 武力智 阿干支, 추문촌(鄒文村) 당주(幢主)인 사탁부(沙喙部) 출신의 도설지 급간지(及干支), 물사벌(勿思伐)[성(城) 당주(幢主)]인 탁부(喙部) 출신의 조흑부지(助黑夫智) 급간지(及干支)에게 교(敎)하시었다. 이 때에 적성(赤城) 출신의 야이차에게 교(敎)하시기를 중에 옳은 일을 하는 데 힘을 쓰다가 죽게 되었으므로 이 까닭으로 이후 그의 처(妻)인 삼(三) 에게는 이(利)를 허(許)하였다. 사년(四年) 소녀(小女), 사문(思文) 공형(公兄)인 추문촌(鄒文村) 출신의 파진루 하간지(下干支) [전(前)]자(者)는 다시 적성연(赤城烟)으로 가게 하고 후자(後者) 공형(公兄)은 이엽(異葉)이건 국법(國法)에는 분여(分與)하지만 비록 그러하나 이(伊) 자(子), 도지(刀只) 소녀(小女) 오례혜 찬간지(撰干支) 법(法)을 적성전사법(赤城佃舍法)으로 만들었다. 별도로 관(官)은 불혜(弗兮) 여(女), 도두지우열리파(道豆只又悅利巴) 소자(小子), 도나혜(刀羅兮) 합하여 5인에게 내렸다. 별도로 교(敎)하기를 이후로부터 나라 가운데에 야이차와 같이 옳은 일을 하여 힘을 쓰고 남으로 하여금 일하게 한다면 만약 그가 아들을 낳건 딸을 낳건 나이가 적건 [많건] 형제이건 이와 같이 아뢰는 자가 대인(大人)인가 소인(小人)인가 부(部) 출신의 나불탐사실리(奈弗耽 失利) 대사(大舍), 추문(鄒文)[촌(村)] 물사벌성당주사인(勿思伐城幢主使人)은 니리촌(那利村) 인(人)은 물지차(勿支次) 아척(阿尺), 서인(書人)은 탁부(喙部) 출신의 인(人), 석서립인(石書立人)은 비금개리촌(非今皆里村) 지(智) 대오(大烏)이다. |
사료해석 : 1978년 발견되었으며, 건립 시기는 대략 진흥왕 6년(545) 이전으로 추정되는 비서입니다. 진흥왕대(540-575) 신라가 赤城 지방을 점령하여 이를 어떻게 통치하였나 하는 것을 살피는데 도움이 됩니다.
이 비석은 단단한 화강암을 물갈이한 뒤 글자를 아로새긴 비석인데, 이사부를비롯한 여러 신라 장군이 왕명을 받고 전투에 나가 고구려 지역인 적성을 공략한 뒤, 자기들을도와 공을 세운 적성출신 야이차와 가족 등 주변 인물을 포상하고 적성 지역 백성들을 위로하고자 비를 세운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 비석이 중요한 또 하나의 이유는 진흥왕의 단독하교를 보여준다는 점입니다. 위 사료를 보면 탁부, 사탁부 등 여러 부가 아직도 왕 밑에 존재하는 것이 보입니다. 진흥왕 이전의 봉평비나 영일 냉수리비 등을 오면 이왕(2명의 왕)이 공동으로 하교를 내린다 등의 내용이 보이나, 단양적성비는 왕(진흥왕)의 단독하교로 처리되어 있다는 점에서 주목되는 비석입니다.
이 비석에는 전사법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전사법은 고구려의 공동노동력 활용에 관련된 제도로서 단양적성비가 전사법의 증거를 제시한다는 점에서도 중요합니다. 야이차가 성을 쌓다 죽었다는 것 자체도 노동력의 활용 증거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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