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증왕대 사회변화
왕검은 요(堯) 임금이 왕위에 오른 지 50년인 경인년에 평양성에 도읍을 정하고 지증 마립간(智證麻立干) 4년(503) 10월에 여러 신하들이 아뢰기를, <시조가 창업한 이래로 나라 이름이 일정치 않아 혹은 사라(斯羅)라 하고 혹은 사로(斯盧)라 하고 혹은 신라(新羅)라 하였으나, 신들은 생각컨대 '新'은 덕업이 날로 새롭다는 뜻이요('德業日新'), '羅'는 사방을 망라한다는 뜻이니('網羅四方'), 그것으로 국호를 삼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또 생각컨대 옛부터 국가를 가진 이는 모두 제(帝)나 왕(王)을 칭하였는데 우리 시조가 건국한 지 지금 23대가 되었으나 단지 방언으로 칭하여 존호를 정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여러 신하들은 한뜻으로 삼가 신라국왕(新羅國王)이란 존호를 올립니다>라 하였다. 왕이 이에 따랐다. 5년(504) 9월에 역부를 징발하여 팔리(波里)*미실(彌實)*진덕(珍德)*골화(骨火) 등 12성을 쌓았다. 6년(505) 2월에 왕이 친히 국내에 주군현(州郡縣)의 제도를 정하고 실직주(悉直州)를 두어 이사부(異斯夫)를 군주(軍主)로 삼으니 군주란 이름이 여기서 시작되었다. - 삼국사기 신라본기, 지증왕 - |
사료해석 : 신라 역사상 큰 변혁기인 지증왕 대 사회변화에 대한 내용입니다. 지증왕대의 사회변화를 약술하면,
1. 국호를 신라로 바꾸고 왕의 칭호를 사용하였다.
2. 순장을 금지하였는데, 최근 이 순장 금지의 내용이 신라시대를 중세로 보는 시대구분의 논쟁이 되고 있다.
3. 행정구역을 정비하여 주군현 제도, 실직주를 두고 군주를 파견하였다.
4. 수리시설을 확충하고 우경을 시작하였는데, 우경의 시작이란 곧 농업생산력에 있어 지배층의 생산력 강화를 암시한다고 한다.
5. 지방제도를 정비하면서 군사제도와 연계하여 군주가 군사권을 같이 장악하도록 하였다. (후에 명칭이 바뀌며 군사권이 아닌 행정권만을 가진 존재로 바뀐다.)
6. 우산국을 정벌하여 울릉도를 신라 영토로 복속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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