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불교 전파
(1) 신라본기 4권에 이런 말이 있다. 제 19대 눌지왕 때 사문 묵호자가 고구려로부터 일선군에 이르니, 고을 사람 모례는 자기 집 안에 굴을 파서 방을 만들고 묵호자를 머물도록 하였다. 이 때 양나라에서 사신을 시켜 옷가지와 향물을 보내왔는데, 신라 임금과 신하는 그 이름과 쓰임새를 알지 못하였다. 그래서 사람을 시켜 향을 싸서 널리 나라안을 다니면서 묻게 하였다. 묵호자가 이를 보고 말하였다. <이것은 향이라는 것인데, 불에 태우면 향기가 매우 강렬한 것입니다. 정성을 신성에게 통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신성은 삼보만한 것이 없으니, 만약 이 향을 불에 태워 소원을 빌면 반드시 영험이 있을 것입니다.> 이 때 왕녀가 병이 위급해서 묵호자를 불러다가 향을 피우고 소원을 말하니 병이 즉시 나았다. 왕이 기뻐하며 예물을 후히 주었는데, 잠시 뒤 묵호자가 간 곳을 알지 못하였다. (2) 또 21대 비처왕(소지왕) 때 아도 화상이란 이가 시종을 데리고 역시 모례의 집으로 왔는데 모습이 묵호자와 비슷했다. 몇 해동안 이곳에 머물다가 아무런 병도 없이 죽었다. 그의 시종 세사람은 남아서 경률을 가르치니, 가끔 믿는 자들이 있었다. (3) 아도본비를 살펴보면 다음 같은 말이 있다. 아도는 고구려 사람이요, 어머니는 고도령이다. 정시 연간에 조위 사람 아굴마가 사신으로 고구려에 왔다가 고도령과 관계하고 돌아갔는데, 그 때문에 아기를 가졌다. 아도는 다섯 살에 어머니 말에 따라 출가했다. 나이 열여섯 살에 위나라에 가서 굴마를 뵙고 현창 화상의 강론을 듣고 배웠다. 알아홉에는 돌아와서 어머니를 뵈었다. 아도는 어머니에게 가르침을 받아 신라에 가서 서울 서쪽 마을에 살았다. 그곳은 오늘날 엄장사이며, 그 때는 미추왕 즉위 계미(263)해였다. 아도가 대궐에 나아가서 불교 전하기를 청하니, 세상에서 일찍이 보지 못했다하여 꺼리고 심지어는죽이려는 사람까지 있었다. 그래서 속림 모록의 집으로 도망가 숨어 버렸다. 미추왕 3년 성국공주가 병들었는데, 무당과 의원이 치료해도 효험이 없었으므로 사방으로 칙명을 보내 의원을 구하였다. 법사는 급히 대궐로 들어가 치료하니 병이 드디어 나았다. 왕은 크게 기뻐하여 소원을 물으니 법사는 말하였다. <제게는 아무런 청도 없습니다. 그러나 다만 천경림에 절을 세워 불교를 크게 일으켜서 국가의 복을 비는 일만을 바랍니다.> 왕은 이를 허럭하고 공사에 착수하도록 명령했는데, 그 때 풍속이 질박 검소해서 초가집을지어 살면서 불법을 강연하니 이따금 천화가 땅에 내렸는데, 절 이름을 흥륜사라고 하였다. 모록의 누이동생은 이름이 사씨인데 법사에게 귀의하여 여승이 되어 또한 삼천기에 절을 짓고 살았고, 그 절 이름은 영흥사라고 하였다. 얼마 위에 미추왕이 세상을 떠나니 나라 사람들이 법사를 해치려 하였다. 법사는 모록의 집으로 돌아가서 스스로 무덤을 만들고 문을 닫고 세상을 떠났으므로 마침내 다시 세상에 나타나지 않았다. 이리하여 불교도 또한 폐지되었다. - 삼국유사 권 3, 아도기라 - |
'퀴즈풀이 > 역사 사료와 데이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대 불교를 통한 정보전 - 소지왕과 승려 간첩 (1) | 2007.01.14 |
---|---|
이차돈의 순교 (1) | 2007.01.14 |
효녀 지은전에 보이는 신라 사회상 (1) | 2007.01.14 |
김흠운 (1) | 2007.01.14 |
관창 이야기 (1) | 2007.01.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