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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풀이/역사 사료와 데이터

통일 후 나당전쟁 - 신라와 당과의 갈등 고조

 

통일 후 당과의 갈등

급찬(級瑗) 기진산(祇珍山) 등을 당에 보내어 자석 두 상자를 바치고, 또 각간(角干) 흠순(欽純)과 양도(良圖)를 당에 보내어 사죄하였다.

- 삼국사기 6, 신라본기 6, 문무왕 9년 5월 -

문무왕이 고구려의 반란 무리들을 받아들이고, 또 백제의 옛 땅을 점거하여 관인을 보내 지키게 하니, 당 고종이 크게 노하여 왕의 관작을 박탈하고, 당시에 당의 경사(京師)에 있던 왕의 아우 우요위원외대장군임해군공(右饒衛員外大將軍臨海郡公) 인문(仁問)을 세워 신라왕으로 삼아 귀국하게 하고, 좌서자동중서문하삼품(左庶子同中書門下三品) 유인궤(劉仁軌)로 계림도대총관(鷄林道大摠管)을 삼고, 위위경(衛尉卿) 이필(李弼)과 우령군대장군(右領軍大將軍) 이근행(李謹行)으로 부관을 삼아 군사를 발하여 신라를 토벌하게 하였다.

- 삼국사기 7, 신라본기 7, 문무왕 14년 -

당의 중종이 신라에 사신을 보내어 구두로 조칙을 전하기를, "우리의 태종문황제(太宗文皇帝)는 그 신성한 공덕이 천고에 뛰어났으므로 그 붕어하던 날 묘호(廟號)를 태종(太宗)이라 한 것이다. 너희 나라의 선왕(先王)인 김춘추(金春秋)가 이와 호를 같이 한 것은 매우 참람한 일이니 급히 고치라"라고 하였다.

- 삼국사기 8, 신라본기 8, 신문왕 12년 -

참고글 : 삼국통일에 동지였던 당과 신라도 미묘한 갈등이 많았고, 신경전이 상당했습니다. 삼국통일의 2단계는 외세를 물리치는 나당전쟁이었습니다. 사료는 급변하는 당과 신라와의 관계를 보여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