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파식적
제31대 신문대왕(神文大王)의 이름은 정명(政明)이요 성은 김씨다. 개요(開耀) 원년 신사(辛巳) 7월 7일에 왕위에 올랐다. 아버지를 위하여 동햇가에 감은사(感恩寺)를 세웠다. 절의 기록에 이런 말이 있다. "문무왕(文武王)이 왜병을 진압하려 하여 이 절을 지었으나, 역사를 마치지 못하고 돌아가 바다의 용이 되었다. 그 아들 신문왕이 왕위에 올라 개요 2년(682)에 역사를 마쳤는데, 금당 계단 아래에 동쪽을 향해 구멍 하나를 뚫어 두었다. 이것은 용이 절에 들어와서 돌아다니게 하기 위한 것이다. 대개 유언으로 유골을 간직한 곳은 대왕암(大王巖)이라 하고 절은 감은사(感恩寺)라 이름했으며 후에 용이 나타난 곳을 이현대(利見臺)라 한 것 같다. 이듬해 임오(壬午) 5월 초하루에 해관(海官) 파진찬(波珍찬(瑗)) 박숙청(朴夙淸)이 아뢰었다. "동해 안에 있는 작은 산이 떠서 감은사로 향해 오는데 물결을 따라 왔다 갔다 합니다." 왕은 이를 이상히 여겨 일관(日官) 김춘질(金春質)에게 점치게 하니 아뢰었다. "대왕의 아버님께서 지금 바다의 용이 되시어 삼한(三韓)을 진호하시고 또 김유신(金庾信) 공도 33천의 한 아들로서 지금 인간으로 내려와서 대신(大臣)이 되었습니다. 두 성인이 덕을 같이 하여 성 지키는 보물을 내려 주시려 하니, 만약 폐하께서 해변에 행차하시면 반드시 값을 칠 수 없는 큰 보물을 얻을 것입니다." 왕은 기뻐하여 그 달 7일에 이현대로 가시어 그 산을 바라보고 사자를 보내어 살펴 보게 하였다. 산의 형상은 거북의머리와 같은데 위에는 한 줄기의 대나무가 있어, 낮에는 둘이 되고 밤에는 합하여 하나가 되는 것이었다. 사자가 돌아와서 사실대로 아뢰니 왕은 감은사로 가시어 유숙하시었다. 이튿날 오시에 대나무가 합해져 하나가 되자 천지가 진동하고 비바람이 일어나 어둑컴컴해지더니 7일 동안 계속되었다. 그 달 16일에 이르러서야 바람이 자고 물결이 평온해졌다. 왕은 배를 타고 바다에 떠 그 산에 들어가니 용이 검은 옥대(玉帶)를 받들어 왕에게 바치었다. 왕은 이를 맞아 같이 앉으면서 물으셨다. "이 산과 대나무가 혹은 갈라지기도 하고 혹은 합해지기도 하니 무슨 까닭이냐?" "비유해 말씀드리면 한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지 않고, 두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는 것과 같습니다. 이 대나무란 물건은 합쳐야만 소리가 나게 되므로 성왕께서 소리로써 천하를 다스리게 될 상서로운 징조입니다. 왕께서는 대나무를 가지고 피리를 만들어 불면 천하가 화평해질 것입니다. 지금 왕의 아버님께서는 바닷속의 큰 용이 되셨고, 김유신은 다시 천신이 되셔서 두 성인이 마음을 같이 하여 이 같은 값을 칠 수 없는 큰 보물을 저에게 주시어 저로 하여금 그것을 왕께 바치게 한 것입니다." 왕은 몹시 놀라고 기뻐하여 오색 비단과 금과 옥을 용에게 주고, 사자를 시켜 대나무를 베어 가지고 바다에서 나았다. 그 때 산과 용은 문득 없어지고 보이지 않았다. 왕은 돌아와서 그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월성의 천존고(天尊庫)에 간직해 두었다. 이 피리를 불면 적병이 물러가고 질명이 낫고, 가물 때는 비가 오고, 비올 때는 비가 개고 바람이 가라앉고, 물결은 평온해지므로, 이 피리를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 부르고 국보로 삼았다. - 삼국유사 2, 기이편, 만파식적 - |
참고글 : 통일신라의 전제 왕권기 왕권의 안정을 보여줌과 동시에, 호국불교의 성격을 보여주는 만파식적에 대한 유명한 사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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