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의 역사와 문학
1. 고대 역사학의 시조 - 투키디네스 그리스의 역사학의 사관을 말하자면, 보통 고대 순환론적인 사관이라고 말합니다.<순환론적인 사관>이라는 것은 역사를 볼 때, 역사적 사건이라는 것은 유사한 사건이 반복된다고 보는 것이지요. 즉, 역사라는 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또 다른 사건이 발생하지만, 그 사건은 과거 있었던 어떤 사건과 유사한 사건이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에 <과거>를 잘 알면 현재에 대한 교훈을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따라서 역사가가 할 일은 과거의 모든 가능한 자료를 모아서 수집하고, 검토하고, 정확한 줄거리를 서술하는 것이 되겠지요. 이러한 고대 사관을 완성한 사람이 바로 <투키디네스>입니다. 보통 그를 <과학적, 비판적 역사서술의 시조>라고 부릅니다. 그 이유는 정확한 과거를 객관적인 관점에서 있는 그대로 서술하기 때문이죠. 그런 기록을 남겨놓아야 후대 사람들은 교훈을 얻을 수 있거든요. 그는 고대 사관인 <순환사관>을 완성하였는데, 그가 말하는 순환사관이란 비슷한 일들이 반복되는 역사속에서 실용적인 교훈을 얻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쓴 저서가 유명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입니다. 그가 남긴 한마디는 너무나 유명하죠. <정확한 사건을 아는 것은 유사한 사건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래서 나는 앎을 위해 기록한다.> 이 순환사관은 중세에 가서 깨집니다. 중세에는 하느님을 믿는 <신학>이 발달하면서 부터인데, 순환사관을 대신할 사관을 제시한 자는 바로 <아우구스티누스>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역사라는 것이 절대 반복되는 것이 아니며, 역사가 아무 의미없이 순환된다는 것에 반대합니다. 그는 역사란 <하느님의 세계>로 간다는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진 것이라고 말하며, <목표론적 사관>또는 <발전론적 사관>을 주장합니다. 즉, 역사는 순환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내일과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나아가는 과정이라고 파악한 것이죠. 2. 역사학의 아버지 - 헤로도토스 헤로도토스는 역사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헤로도토스는 투키니네스와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이 다릅니다. 투키디네스가 역사란 가장 과학적이고 객관적으로 서술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앞선 사람인 헤로도토스는 역사는 그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의 주관이 들어가도 된다는 입장입니다. 헤로도토스가 적은 페르시아 전쟁사를 보면 그 차이가 확연합니다. 헤로도토스는 페르시아 전쟁사를 적으면서, 그 전쟁의 성격을 스스로 규명하려고 합니다. 그는 페르시아 전쟁의 성격을 <문명간의 투쟁>이라고 파악합니다. 즉, 자유주의를 수호하려는 그리스 폴리스와 동방전제군주제를 추구하는 페르시아 문명간의 충돌이 그에게는 페르시아 전쟁으로 보인거죠. 투키디네스였다면 그 전쟁을 있는 그대로 서술하고, 그 전쟁과 각 사건에서 교훈을 찾으려 했을 것입니다. 3. 고대 그리스 문학 고대 그리스 문학은 유명한 것들이 많지만 다 다루면 역사를 벗어나게 되므로, 중요한 것들만 소개합니다. 일단, 호메로스가 가장 유명하겠죠? 보통 그리스 시대에 기록이 없던 시기의 일들은 호메로스의 문학 작품내용에서 그 시대상을 파악하므로, <호메로스 시대>라는 용어도 있습니다. 그는 토로이 전쟁에 대한 거대한 서사시인 일리아드, 오딧세이를 서술하였고, 그 책은 아직도 최고의 고전으로 추앙 받습니다. 다음으로 유명한 작품은 헤시오토트의 <신통기>,<노동의 세월> 등이 있습니다. 신통기는 신의 계보를 체계적으로 정리해 놓은 자료이고, 노동의 세월은 아테네 농민들(특히 팔랑크스를 받은 자영농민들)의 일상을 정리한 책입니다. 당시 생활상을 알기에 적합한 책이지요. 또, 소포클레스의 <오디푸스의 왕>이야기도 유명합니다. 고대 그리스 문학은 대부분이 그리스 신화와 연결되어 있어서 그리스 신화를 읽다보면 가끔씩 이들의 작품내용이 나올 경우가 많습니다. 마지막으로 <히포크라테스의 선서>라는 것도 유명합니다. 대부분 아시죠? 사람의 병을 고치거나, 의술과 관련된 일을 할 때는 그 윤리성이 강조된다는 것을 선서한 내용이지요. 그래서 그는 의학의 아버지라고 보통 불립니다. |
참고자료 - 페르시아 전쟁사(헤로도토스)
헤로도토스 (Herodotos)와 페르시아 전쟁사
헤로도토스 (Herodotos)
BC 484(?) 소아시아 할리카르나소스(지금의 터키 보드룸)~BC 430(~420). 그리스의 역사가.
고대에 창작된 최초의 위대한 이야기체 역사인 그리스와 페르시아 전쟁의 〈역사 Historiae〉(〈페르시아 전쟁사〉라고도 함)를 썼다. 헤로도토스는 당시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고 있던 소아시아 남서부의 그리스 도시인 할리카르나소스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가 태어난 해와 죽은 해는 모두 확실하지 않다. 그는 아테네에 살았고, 거기서 소포클레스를 만났으며, 그후 아테네가 중심이 되어 이탈리아 남부에 건설한 식민지 투리로 떠난 것으로 여겨진다. 그의 〈역사〉에 언급된 마지막 사건은 BC 430년에 일어난 사건이지만, 그후 언제 어디서 그가 죽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한창이던 BC 431년부터 몇 년 동안은 아테네가 그리스 중부 지방에 있었고, BC 425년 이전에 아테네에서 그의 저서가 출판되어 널리 알려졌다고 믿을 만한 이유는 충분하다.
헤로도토스는 널리 여행을 다녔다. 그는 페르시아 제국의 대부분 지역을 방랑했고, 이집트로 가서 남쪽의 엘레판티네(아스완)까지 내려갔으며, 리비아, 시리아, 바빌로니아, 엘란 왕국의 수사, 리디아 및 프리지아도 방문했다. 또한 헬레스폰토스 해협(지금의 다르다넬스 해협)을 따라 비잔티움까지 올라갔고,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로 가서 북쪽으로는 도나우 강 너머까지, 동쪽으로는 흑해의 북해안을 따라 스키티아까지 여행했으며, 돈 강 유역을 지나 좀더 내륙으로 들어갔다. 이런 여행에는 오랜 세월이 걸렸을 것이다.
〈역사〉의 구성과 범위
〈역사〉에서 헤로도토스가 다룬 주제는 페르시아 전쟁과 그 전쟁의 예비단계였다. 오늘날 남아 있는 〈역사〉는 9권(이것은 헤로도토스 자신이 구분한 것이 아님)으로 나뉘어 있다. 제1~5권은 페르시아 전쟁의 배경을 설명하고 있고, 제6~9권은 전쟁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데, 페르시아의 왕 크세르크세스의 그리스 침공(제7권)과 그리스가 BC 480~479년에 살라미스·프라타이아·미칼레에서 거둔 대승을 묘사하는 장면에서 절정에 이른다. 〈역사〉는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반부는 BC 499년부터 시작된 예비 단계(제6권에 묘사된 이오니아의 반란과 마라톤 전투를 포함)와 함께 BC 480~479년의 전쟁을 체계적으로 서술한 부분이고, 후반부는 페르시아 제국의 성장과 조직, 지리와 사회 구조 및 역사를 기록한 부분이다.
오늘날 학자들 사이에는 헤로도토스가 애초부터 전·후반부의 배열을 염두에 두고 책을 쓰기 시작했는지, 아니면 처음에는 페르시아나 전쟁의 역사 가운데 하나만 묘사할 계획으로 책을 쓰기 시작했는지, 만약 그랬다면 두 부분 가운데 어느 부분을 기술할 계획이었는지에 대해서 많은 토론이 이루어졌다. 그럴 듯한 견해 가운데 하나는, 헤로도토스가 처음에는 전쟁의 역사를 쓸 계획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지만 나중에 페르시아 제국 자체를 기술에 포함하기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헤로도토스의 입장에서는 페르시아가 주도하는 침략군이 어떤 의미를 갖는가를 스스로에게 물어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헤로도토스는 페르시아 제국의 방대한 크기뿐만 아니라 여러 언어를 사용하는 병사들로 이루어진 다양한 성격의 군대이면서도 단일 지휘체계를 갖춘 페르시아군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리스군은 공통된 언어, 종교, 사고방식, 전쟁목적에 대해 똑같은 의견을 갖고 있는데도 정치적으로 분열되어 있었고, 사령관들은 걸핏하면 논쟁을 벌였다. 이런 점에서 페르시아군과 그리스군은 완전히 대조적이었다. 그는 이 차이점을 독자들에게 설명해야 할 필요가 있었고, 그때문에 페르시아 제국 자체를 기술하고 있다. 전후반을 잇는 논리적 연결점은 제7권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여기서 헤로도토스는 크세르크세스의 대군이 사르디스에서 헬레스폰토스 해협까지 서쪽으로 행군한 다음, 배다리를 이용하여 그리스 본토로 건너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처음에는 크세르크세스의 오만함과 성급함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며, 이어서 행군하는 페르시아군의 여러 부대가 마치 열병식을 벌이듯 장황하게 묘사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거대한 침략군 집단을 이루고 있는 모든 민족과 인종이 하나씩 자세히 열거되어 있다.
제1~4권은 페르시아 제국의 역사와 구성 요소들을 설명하고 있다. 페르시아 제국을 설명할 때 헤로도토스는 제국의 각 측면을 지리적인 순서에 따라 기술하지 않고, 페르시아의 역대 왕들(키로스·캄비세스·다리우스)이 정복한 순서에 따라 기술하는 방법을 채택했다(이 배열법에서 한 가지 예외는 리디아이다. 리디아는 맨 처음에 다루어져 있는데, 그것은 리디아가 맨 먼저 페르시아에게 정복당했기 때문이 아니라 소아시아의 그리스 도시들을 공격하여 정복한 첫번째 나라였기 때문임). 제1권의 서두에서는 리디아 왕국에 대한 설명과 페르시아의 리디아 정복을 다루고 있다. 이어서 키로스 왕이 메디아인을 무찌른 이야기와 페르시아에 대한 설명, 키로스의 마사게타이(카스피 해를 향해 북동쪽) 공격, 키로스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제2권에서는 왕위를 계승한 캄비세스의 이집트 원정 계획을 다룬 뒤, 이집트의 국토와 정복, 남부(에티오피아)와 서부 침략 실패, 캄비세스의 광기와 죽음, 페르시아의 권력 투쟁과 내분, 왕위를 차지한 다리우스의 거대한 제국 건설, 그리고 다리우스가 진압한 국내의 반란들을 다루고 있다. 제4권의 서두에서는 유목 민족인 스키타이인에 대한 설명과 그들의 역사, 도나우 강에서 돈 강에 이르는 그들의 활동 지역(스키티아)과 흑해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다리우스는 보스포루스 해협을 건너 이들을 원정하려고 했다. 다음에는 페르시아의 스키티아 침략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 침략과정에서 비잔티움을 비롯한 몇몇 그리스 도시들이 페르시아에 항복했다. 페르시아는 스키티아를 공격하는 동시에, 이집트를 기점으로 하여 그리스인들이 식민지를 건설한 리비아를 공격했다. 제4권 마지막에는 리비아와 그 식민지 건설에 대한 기술이 나온다. 제5권에서는 페르시아가 헬레스폰토스 해협을 건너 그리스 본토로 깊숙이 진격하는 과정,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 및 많은 그리스 도시들이 페르시아에 굴복하는 과정이 기술되고, 이어서 BC 499년에 이오니아의 그리스 도시들이 페르시아에 맞서서 반란을 일으킨 이야기가 나온다. 이리하여 이야기는 작품 전체의 주요주제로 넘어간다.
서술방법
지금까지 헤로도토스의 〈역사〉 전반부를 간단히 설명했지만, 이런 간단한 설명은 이 책의 무한한 다양성을 드러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이 책이 페르시아라는 다양한 제국의 지리·사회·역사를 직접 설명하고 있다는 명백한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역사〉의 구조는 그보다 훨씬 복잡하고 헤로도토스의 서술 방법 역시 복잡하다. 예를 들어 헤로도토스는 그리스의 지리나 관습, 또는 정치체제를 그리스 독자들에게 구태여 설명할 필요는 없었지만, 나중에 전쟁에 개입한 수많은 그리스 도시들의 정치적 상황을 적절한 시기에 기술하고자 했다. 그는 관련된 도시들의 정치적 상황을 서술의 줄거리 속에 여담처럼 교묘하게 끼워넣는 방법으로 이 목적을 달성했다. 그는 이런 방법으로 리디아의 왕 크로이소스의 행동을 묘사하고 있다. 크로이소스는 이오니아 본토의 그리스인들을 정복했지만 그 자신도 페르시아에 정복되었다. 헤로도토스는 여기서 다시 옆길로 빗나가, 이오니아인과 도리아인의 지난 역사와 그리스에서 가장 강력한 두 도시, 즉 이오니아인이 세운 아테네와 도리아인이 세운 스파르타의 분열에 대해 이야기한다. BC 6세기 아테네의 복잡한 정치적 전개 상황이 간단히 언급되고, 스파르타인들의 보수적인 성격도 잠깐 언급된다. 이 모든 설명과 그밖의 많은 이야기(그중 일부는 오로지 헤로도토스의 개인적인 흥미 때문에 포함되었음)는 마라톤 전투가 벌어진 BC 490년과 크세르크세스가 그리스를 침략한 BC 480년에 이 그리스 도시 국가들이 놓여 있던 입장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헤로도토스의 〈역사〉에서 중요하고 참으로 주목할 만한 한 가지 특징은 호메로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야기체 역사에 대한 그의 집착과 타고난 재능이다. 이 점에서 그는 재미있는 짤막한 이야기만이 아니라 중요한 역사적 인물의 대화나 연설까지도 서술 속에 삽입했는데, 그가 시작한 이런 방법은 그후 고대의 역사 기술 과정 전체를 통해 지속되었다.
인생관
제1권에 나오는 크로이소스의 이야기는, 솔론과의 대화에서 예를 볼 수 있듯이 페르시아 전쟁에 대한 이야기가 지니고 있는 전체적 의미, 즉 〈역사〉 전체가 지닌 의미를 암시한다. 그 의미는 큰 번영은 '불안정한 것'이고 몰락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 특히 그 번영이 크세르크세스의 경우처럼 오만함과 어리석음을 수반한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는 것이다. 여기서 크세르크세스의 그리스 침략에 대한 이야기는 그의 도덕적 관점을 분명히 보여준다. 크세르크세스는 인간의 모든 이성적 판단으로 미루어볼 때 당연히 승리할 수 있는 전쟁에서 패배했다. 헤로도토스가 생각하기에 '화무십일홍'(花無十一紅)이라는 교훈은 보편적인 것이고, 그 당시의 가장 큰 역사적 사건으로 사실임이 입증되었다. 헤로도토스는 인간의 불신앙과 오만함 및 잔인성에 벌하기 위한 신의 징벌이 존재한다고 믿었지만, 역사적 사건을 기술할 때는 항상 신들의 개입보다는 인간의 행동과 성격을 강조했다. 근본적으로 합리주의적인 이런 접근방식은 서양의 역사학에서 획기적인 혁신이었다.
역사가로서의 자질
헤로도토스는 자세한 것을 빠뜨리지 않는 뛰어난 관찰력을 가진 위대한 여행가였고, 훌륭한 지리학자였다. 또한 그는 인간의 관습과 과거 역사에 지칠줄 모르는 관심을 가진 사람이었고, 그리스인과 이방인에 대해 편견을 갖지 않은 도량이 넓은 인물이었다. 그는 순진하지도 않았고 쉽게 남을 믿지도 않았다. 바로 이 점이 그의 작품 전반부를 읽기 쉽고 재미있게 만들어줄 뿐만 아니라 역사적 중요성을 갖게 해준다. 후반부에서 그는 주로 전쟁사를 다루고 있지만 결코 전쟁 이야기만 쓴 것은 아니었다. 그가 군사 문제에 대해 문외한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적어도 크세르크세스의 그리스 침공 전략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 즉 페르시아군은 육로로 침입했지만 함대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을 이해했다. 따라서 헤로도토스는 살라미스 해전의 결정적인 중요성을 이해했다. 이와 같이 그는 정치적 상황을 개괄할 경우에는 대체로 사소한 개인적 동기를 근거로 하여 사건을 설명하는 것으로 만족하지만, 여기서도 몇 가지 중요한 본질적 요소를 이해하고 있다. 큰 영토를 가진 페르시아 제국과 작은 그리스 도시국가들 사이의 전쟁이 갖는 정치적 의미는 그리스의 독립성만이 아니었다. 그리스인들이 생각하는 법의 지배가 그 전쟁 결과에 달려 있었다. 마라톤 전투가 그리스 세계에 대해 갖는 정치적 중요성은 이 전투를 계기로 아테네가 스파르타와 동등하고 경쟁적인 지위로 올라섰고(이 지위는 살라미스 해전으로 더욱 확고해졌음), 스파르타는 오랫동안 인정받아온 우위를 잃어버렸다는 점이다. 그리스의 승리는 물론 영광스러웠지만, 이 전쟁은 단순한 승패의 문제만이 아니라 그리스의 지도적인 도시 국가들 사이의 내분과 경쟁을 비롯한 몇 가지 문제를 초래했다. 이 내분이 결국 나중에 펠로폰네소스 전쟁(BC 431~404)이라는 상호 파괴적인 싸움에서 절정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헤로도토스는 알고 있었다.
결론
헤로도토스에게는 선배 산문작가들이 있었다. 특히 위대한 여행자인 밀레토스의 헤카타이오스는 헤로도토스의 책에 여러 번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이 선배 작가들은 그 매력에도 불구하고, 어느 한 도시에서 오랜 세월에 걸쳐 일어난 국지적인 사건에 대해 연대기를 쓰거나 이미 알려진 세계의 대부분을 여행한 이야기를 포괄적으로 썼을 뿐이다. 그들 가운데 유기적 구조를 가진 완전한 통일체, 즉 전체적 일관성을 가진 하나의 단일체를 창조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유기적인 통일체를 창조했다는 의미에서, 헤로도토스는 그리스 최초의 역사가이며 유럽 최초의 역사가이다. 헤로도토스의 작품은 예술적 걸작이다. 그 모든 실수(그리고 그 모든 환상과 부정확성)에도 불구하고, 그는 매우 중요한 시기인 BC 550~479년의 그리스 역사만이 아니라 당시의 서아시아 및 이집트 역사의 대부분을 알려주는 최초의 중요한 정보원(情報源)으로 남아 있다.
출처 : "헤로도토스" 한국 브리태니커 온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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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사전)
1만 5693행, 24권. 각권마다 그리스 문자의 24 알파벳순(順)으로 이름이 붙어 있다. 옛날에는 각권마다 그 내용에 부합되는 이름이 붙어 있었고, 알파벳순으로 이름을 붙이는 방법은 BC 3세기에 처음으로 쓰인 권별법(卷別法)이었다. 《일리아스》는 트로이의 별명 일리오스(Ilios)에서 유래한 것이며, ‘일리오스 이야기’라는 뜻이다. 10년간에 걸친 그리스군의 트로이 공격 중 마지막 해에 일어난 사건들을 노래한 것이다. 스파르타왕 메넬라오스의 왕비로 절세의 미인인 헬레네를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가 유혹해 간다. 이에, 그리스인들은 총사령관 아가멤논의 지휘로 1,000척의 배를 거느리고 트로이를 공격하지만 트로이성(城)은 함락되지 않는다. 자신을 섬기는 사제 크라이세스의 딸 크라이세이스가 아가멤논에게 잡혀가자 격노한 아폴론신(神)이 벌로 액병(厄病)을 내린다.
이 수습책 때문에 벌어진 말다툼에서 아가멤논에게 모욕을 당한 그리스 최고 영웅 아킬레우스가 노하여 싸움에서 손을 뗀다. 이 아킬레우스의 이탈이 바로 《일리아스》의 주제이다. 아킬레우스의 어머니인 바다의 여신 테티스의 간청으로 주신(主神) 제우스는 신(神)들에게 양군을 원조하지 말도록 명하여 그리스군을 패배케 한다.
패배한 그리스군의 참상을 좌시할 수 없어 아킬레우스의 친구 파트로클로스는 아킬레우스의 무구(武具)와 전차를 빌려 그의 군대를 이끌고 출전하여 적을 패주(敗走)시켰으나 그는 트로이의 장수 헥토르에게 살해된다. 이 소식에 접한 아킬레우스는 복수하기 위하여 헤파이스토스가 특별히 만들어준 갑주를 입고 출전하여 헥토르를 살해하고 그 시체를 욕보인다. 헥토르의 아버지 프리아모스왕은 신들의 비호(庇護)로 야음(夜陰)을 틈타 아킬레우스의 막사를 찾아가 헥토르의 시체를 받아 가지고 돌아오는 것으로 끝맺는다.
《일리아스》는 비극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사건에 집중하여, 트로이 공방 50일 동안의 이야기 속에 10년의 전망을 담았으며, 과거를 뒤돌아보고 미래를 암시함으로써 비극성을 강조하였고, 여러 가지 비유로 자연계와 인간계의 관계를 특색 있게 묘사하였다. 무용(武勇)을 노래하고 그리스 기사도를 찬양한 이 시는 BC 900년경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이 시는 마침내 그리스의 국민적 서사시가 되었고 교육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으며, 유럽 서사시의 모범으로서 라틴 문학을 거쳐 유럽 문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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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 오딧세이의 노래(오디세이아)(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사전)
‘오디세우스의 노래’라는 뜻으로 1만 2110행으로 되어 있으며, 《일리아스》와 같이 24 그리스 문자를 딴 24권으로 나뉘어 있다. 지리적인 지식, 시 속에서 묘사한 생활상태, 기타 여러 가지 내적인 증거로 미루어 보아 이 작품은 《일리아스》보다 약간 뒤늦게 나온 것으로 추측된다.주제는 그리스 신화에서 유명한 이야기로 그리스군의 트로이 공략 후의 오디세우스의 10년간에 걸친 해상표류의 모험과 귀국에 관한 이야기이며, 이 이야기를 40일간의 사건으로 처리하였다. 최초의 4권은 주인공이 없는 동안의 오디세우스의 저택의 모습을 그렸다. 그의 아내 페넬로페의 구혼자들이 궁전에 모여들어 밤낮으로 연회를 열어 그의 재산을 축내면서 방약무인하게 행동하지만, 아직 나이 어린 그의 아들 텔레마코스에게는 이를 막을 만한 힘이 없다. 텔레마코스는 오디세우스의 친구 멘토르로 변신한 아테네 여신에게 인도되어 아버지의 소식을 알고자 아버지의 전우(戰友) 네스토르와 메넬라오스를 찾아간다. 제5권에서 비로소 절해(絶海)의 고도에 님프인 칼립소에게 붙잡혀 있는 주인공 오디세우스가 등장한다. 신(神)들의 명령으로 그는 겨우 뗏목을 만들어 섬을 떠나지만 그를 미워하는 해신(海神) 포세이돈이 일으키는 폭풍으로 난파(難破), 파이아케스인들의 섬에 상륙한다. 여기서 그곳의 왕녀에게 구원되어 왕의 궁전에서 환대를 받는다. 연회석에서 그는 자신의 모험을 이야기한다. 그 후 13∼24권은 그의 귀국과 그의 아내에게 구혼한 자들을 응징하는 이야기이다. 아테네 여신의 인도로 거지의 행색으로 변장하고 그의 아들과 그의 충실한 두 명의 옛 부하의 도움을 받아 구혼자들을 처치하고, 부부가 다시 만난 후 여신의 중개로 구혼자의 혈족과도 화해한다.
이 서사시의 줄거리는 《일리아스》보다 복잡하며 기교적이다. 그를 중심으로 한 5∼12권은 메르헨의 세계, 13권에서는 돌연 주인공이 현실 세계에 복귀한다. 이 시도 《일리아스》와 함께 그리스 국민서사시가 되었으며, 그 후 서유럽 문학에 큰 영향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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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 헤시오토스의 신통기(출처 : 브리테니커)
BC 8세기 무렵에 활동한 헤시오도스가 천지창조에서 신들의 탄생 및 계보 그리고 인간의 탄생에 이르는 과정을 계통적으로 서술한 작품이다. 독자에게 지식과 교훈을 전달한다는 점에서 교훈시로 분류되기도 한다. 제목이 의미하는 바와 같이 300명이 넘는 신들의 복잡한 관계를 간결하게 표현하고, 예로부터 전해오는 신화와 전설을 하나의 세계관 및 우주관에 비추어 체계를 세운 것으로 평가된다.BC 2000년대에 고대 오리엔트에서 살았던 후르리인들의 언어로 씌어진 같은 제목의 《신통기》와 비슷한 부분이 있는 것으로 보아 헤시오도스가 이 작품을 지을 때 중동(中東)의 신화를 참조하였다고 여겨지며, 후세의 시인들이 덧붙인 내용도 엿보인다.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에 의해 신들의 계보가 만들어지고 신들의 이름과 역할이 부여되었다고 역사가 헤로도토스가 말한 것처럼, 이 작품에는 그리스신화에 관한 가장 오래 된 자료가 담겨 있으며, 오늘날 알려진 그리스신화의 일부 내용이 실려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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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 소포클레스
아테네 교외의 콜로노스 출생. 아버지가 부유한 무기 상인이었으므로 최고의 교육을 받았다. 아름다운 용모와 재능을 타고났고, 집안이 기사(騎士)신분에 속하였으므로 작가로서, 그리고 시민으로서 명예로운 일생을 보냈다. 음악을 란푸로스에게, 비극을 아이스킬로스에게서 각각 사사하였다. BC 480년 살라미스 해전의 승리 축제 때는 하프를 연주하면서 무용단을 선도하였다고 한다. 정치가로서도 탁월한 식견을 지녔으며, BC 443∼BC 442년 델로스 동맹 재무장관에 임명되어 페리클레스와 더불어 10인의 지휘관직에 선출되었다. 또한 BC 413∼BC 411년의 아테네 내정의 동요기에는 국가의 최고위원 10인의 한 사람으로 선출되어 국가에 공헌하였다. 신앙심도 두터워 아스클레오피스의 신전을 자기 저택 내에 세웠다고도 전해진다. BC 468년, 28세 때 비극 경연대회에 응모하여 스승인 아이스킬로스를 꺾고 첫 우승한 이후로, 123편의 작품을 씀으로써 18회(일설에는 24회)나 우승하였다. 자기 후배인 에우리피데스가 사망하였다는 통지를 받았을 때는 배우와 합창대의 관(冠)을 벗게 하고 자기 자신도 상복으로 갈아입어, 참석자들은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외국의 초청도 거절하고 평생을 아테네에 살았는데, 이러한 애국심과 진지한 인품은 온 시민의 경애의 대상이 되었다. 그의 비극 작법은 3기로 나눌 수 있는데, 초기는 아이스킬로스풍의 장중 화려한 작풍이고, 중기는 엄밀한 기교주의이며, 후기는 원숙기로서 등장 인물의 성격과 일치하는 문체로 씌어 있다. 현존하는 7편을 연대 순으로 보면 《아이아스 Aias》 《안티고네 Antigone》 《오이디푸스왕 Oidipous Tyrannos》 《엘렉트라 Elektrai》 《트라키스의 여인 Trāchiniai》 《필로크테테스 Philoktetes》 《콜로노이의 오이디푸스 Oidipous epi Kolōnōi》인데, 《콜로노이의 오이디푸스》는 원숙기에 속하는 것이지만, 《아이아스》와 《안티고네》만은 중기의 특징을 남기고 있다.
이 밖에 사티로스극(劇) 《추적자》 외에 많은 단편이 남아 있다. 한편 배경화를 고안하기도 하고 소도구를 채용하는 등 상연 형식도 연구하였으며, 합창단을 종전의 12명에서 15명으로 늘리고, 또 배우도 종전의 2명에서 3명으로 늘렸다. 그리고 이 3명의 배우의 대화를 통하여 각자의 성격을 생생하게 부각시키고 그들의 성격이 서로 충돌하고, 보복하고, 파멸로 치닫는 과정을 복선(伏線)을 교묘하게 배치해 가면서 비극적인 긴박감으로 끌어올려 기막히게 묘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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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 오이디푸스 이야기(출처 : 네이버 지식인 검색)
제작·상연 연대는 알 수 없다. 아이스킬로스와 에우리피데스에게도 같은 제재의 비극 작품이 있으나, 소포클레스의 것이 특히 유명하다. 테베의 왕 오이디푸스는 나라 안에 악역(惡疫)이 유행할 때, 선왕(先王)을 살해한 범인을 추방해야 된다는 신탁(神託)에 따라 그 범인 색출에 전력을 기울인다. 왕은 한때, 집정(執政)인 크레온을 의심하지만, 예언자 테이레시아스의 예언과 선왕의 왕비이며 자신의 아내인 이오카스테의 설명을 들은 뒤로는 점차 자기 자신에 대한 의혹이 깊어져 간다. 코린토스의 사자(使者)의 말, 자신이 테베에 들어오기 직전에 저지른 살인, 자신에게 내려진 저주스런 예언, 그리고 선왕의 아들을 버린 양치기의 증언으로 마침내 자신이, 바로 운명의 손길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다가 운명의 그물에 사로잡힌 존재로서, 아버지인 선왕을 살해하고 어머니를 아내로 맞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극도의 절망상태에 빠진 오이디푸스왕은 스스로 자신의 눈알을 뽑아내고, 왕비 이오카스테는 자살한다.
소포클레스는 오이디푸스왕의 만년(晩年)을 다시 《클로노스의 오이디푸스》(BC 402)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소경이 된 늙은 오이디푸스는 딸 안티고네에게 이끌려서 여러 나라를 방랑한 끝에 아테네에 온다. 오이디푸스에게 있어서 죄란 무엇인가. 그는 신이 만들어 놓은 올가미에 걸려들었을 뿐, 자신에게는 아무런 죄과(罪過)도 없다고 끝끝내 주장한다. 이와 같은 자부(自負)를 가지고, 아직도 자기를 이용하려고 드는 자식이나 크레온을 뿌리치며 저주하는가 하면, 정의와 인간성이 넘치는 아테네의 왕 테세우스에게 축복을 준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신과의 위대한 화해가 이루어지고 불가사의한 방법으로 세상을 떠난다. 오이디푸스왕의 비극은 중세의 그레고리우스 전설에도 되살아나, 토마스 만은 이것을 주제로 다룬 《선택받은 인간》(1951)을 발표하였다. 또한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도 비극 《오이디푸스왕》을 썼지만, 그것은 소포클레스의 작품을 모방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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