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타비아누스의 제정 시작과 5현제 시대
1. 옥타비아누스의 원수정 악티온 해전에서 승리한 이후 옥타비아누스는 실제적으로 로마의 모든 지배권을 갖고, 로마를 지배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옥타비아누스는 과거 다른 군인지배자들이 로마를 지배한 방식인 <군사독재관>이라는 형식을 버리고, 새로운 방식으로 로마를 다스립니다. 그것이 앞서 설명한 <원수정>의 형태입니다. <원수정>이란, 집정관, 호민관 등이 존재하는 공화정 형태를 유지하면서 새로운 정치형태를 만들어가는 과도기의 체제를 말합니다. 실제 옥타비아누스가 <원수정>이라는 정치체제에서 자신의 위치를 어떻게 설정했는지 볼까요? 일단 옥타비아누스는 대외적으로는 속주의 모든 통제권을 장악한 <총독>의 위치에 있었습니다. 대내적으로는 호민관이면서, 집정관이였습니다. 옥타비아누스의 군사력을 두려워한 원로원 의원들은 옥타비아누스를 원로원 명부의 1번째에 기록해 두었는데, 이 것은 옥타비아누스가 공화정이라는 정치체제에서 <제 1의 시민>임을 의미합니다. 제 1의 시민이라는 의미로 옥타비아누스를 <프린캡스>라고 부릅니다. 로마가 공화정이기 때문에 왕이 아니라 <시민>으로 부른 것이지요. 그러나 실제 왕과 다를 바 없는 독재권력입니다. 이렇게 총독, 호민관, 집정관이라는 3가지 통치권력을 독점한 공화정은 이미 공화정이 아닙니다. 공화정처럼 보일 뿐이지요. 이러한 독재적인 옥타비아누스의 공화정을 <원수정>이라고 합니다. 2. 로마 제정이 시작되다. <원수정>을 완성한 옥타비아누스 앞에 원로원은 무력했습니다. 원로원은 최후 권한인 <국가 비상시 원로원의 총책임권 ; 비상대권>마저 옥타비아누스에게 바칩니다. 원로원은 군사지휘권, 속주관리권을 모두 옥타비아누스에게 넘기면서, 그에게 존엄자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내립니다. 옥타비아누스가 아우구스투스라고 불리게 되면서 이제 로마는 황제가 다스리는 <제정>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즉, 공화정을 유지한 채 군사권, 재정권 등 통치실권을 장악한 <원수정>의 단계가 있었기 때문에 피를 흘리거나, 혁명이 일어나지 않고 바로 평화로운 <제정>단계가 시작된 것이지요. 제 1의 황제 옥타비아누스는 황제 즉위 후 바로 군사, 재정권을 황제 직속으로 장악합니다. 로마와 속주의 로마시민은 정규군으로 편제하고, 속주의 원주민은 보조군으로 편제합니다. 이들은 각각 재산정도에 따라 기병, 보병으로 편제되었습니다. 특히 속주원주민들도 황제에게 충성을 다하는데, 그 이유는 제대 후에 시민권을 보장하거나, 노후보장을 완벽하게 처리해주는 과거 마리우스나 카이사르의 <사병화>를 추구했기 때문입니다. 고급지휘관은 원로원 계급에서 황제가 직접 임명하되, 임기는 1년으로 딱 제한해버리고, 실제 군권은 황제의 친위대나 황제의 친속에게 두었습니다. 상설해군을 창설하여 군대를 강하게 만들어, 해외 개척의 기반도 만들죠. 이러한 모든 군권은 로마 황제에게 집중되어 있습니다. 원로원은 군권에 있어 아무런 힘이 없죠. 그럼 이렇게 모든 군권에 로마국가가 아닌 황제권에 속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옥타비아누스가 군권 장악과 함께 재정권 장악을 동시에 시도했기 때문입니다. 옥타비아누스는 속주의 재정을 철저하게 감시합니다. 징세청부업자를 확실하게 감독하여, 국가가 속주의 모든 징세제도를 통제하였습니다. 속주의 인구조사, 호적정리, 재산평가 등이 확실하게 이루어진 것이죠. 그 바탕에서 로마의 재정 대부분은 황제의 재정이 된 것입니다. 또 클레오파트라를 물리친 악티온 해전 이후 이집트는 옥타비아누스의 사적 재산이였습니다. 그 방대한 아프리카 대륙의 재산만 가지고도 황제는 군권을 쉽게 장악할 수 있었고, 원로원을 제압할 수 있었습니다. 군사 재정은 황제의 사적 재정이 투입되는 형식이였습니다. 이로서 황제는 모든 군권을 장악하게 되어 200년간의 로마 평화 시대(Pax Romana)의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이 무렵 모라의 북방 한계선인 라인강-다뉴브강 경계가 완성됩니다. 3. 아우구스투스 사후의 양자제도와 혼란 로마의 평화 시대는 5현재로 대표되는 로마 제국의 강성기를 말합니다. 이 시기의 가장 큰 특징은 황제가 자신의 후계자를 가장 적합한 인물 중에서 선별했다는 것입니다. 특히 양자상속제도가 확립되었다는 점이 가장 큰 특징입니다. 그럼 아우구스투스 사후부터 로마의 평화 시대까지를 간략하게 볼까요? 아우구스투스는 자식복이 없어서 양자인 티베리우스에게 제국을 물려주었습니다. 티베리우스는 55세에 황제에 올랐으나, 곧 조카 아들인 가이우스에게 왕위를 양보합니다. 그러나 가이우스는 친위대장에게 살해되고, 숙부인 클라우디우스가 황제가 됩니다. 클라우디우스는 황제의 행정권을 독식하기 위하여 자신의 노예들을 해방시켜 정치에 참여시키는 <해방노예>정치를 합니다. 이 해방노예들은 황제직속의 관리로서 유능한자는 부자가 될 수 있었으며, 일부는 에퀴테스 계급으로 신분 상승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클라우디우스 황제도 자식복이 없었습니다. 당시 황제들이 자식복이 없는 건 특이한 일이지요. 클라우디우스는 3번이나 결혼 경력이 있는 부인 아그리피나에게 암살당합니다. 아그리피나가 클라우디우스를 암살한 것은 전 남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네로>를 황제에 올리기 위해서죠. 네로가 16세에 황제가 되자, 아그리피나의 섭정시대가 시작됩니다. 당시, 로마에는 큰 화재가 발생했는데, 네로는 그 화제의 원인을 그리스도교의 소행으로 꾸며 그들을 대학살합니다. 유명한 소설 <퀴어바디스>에서 베드로가 순교했다는 이야기도 이 화재와 관련이 있습니다. 네로는 자신을 도운 재상 세네카도 반역죄를 조작하여 죽여버립니다. 또, 자신의 어머니 아그리피나가 자신을 유혹하여 결혼하려고 하자 어머니를 미워하기 시작합니다. 아그리피나는 아들이 자신의 뜻대로 안되자, 클라우디우스의 다른 어린 왕자를 왕으로 삼으려는 음모를 꾸미다 <네로>에게 비참하게 죽습니다. 일설에는 네로가 어머니까지 죽이려고 자작극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어느 쪽이든 이 두 모자가 독한 것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네로의 이러한 폭정은 로마인의 반란을 초래하여 네로는 자결하고 맙니다. 4. Pax Romana : 로마의 평화 시대가 시작되다. 이러한 로마의 혼란 속에서 원로원 의원 네르바가 원로원의 추대로 황제에 올랐습니다. 네로 이후 궁중의 암투와 처절한 권력싸움에 이골이 난 원로원은 이제 황제라는 자리를 무능한 자식이나 친족에게 물려주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이 네르바 황제 이후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안토니누스 피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5황제 시대에는 모두 현명한 자를 양자로 삼아 황제를 잇게하는 정통이 생겼는데, 이것을 <양자상속제>라고 하며, 이 시대를 <5현제 시대>라고 부릅니다. 이 현명한 5황제의 시대가 바로 팍스 로마나라고 불리는 로마 제국의 전성기 시대입니다. 5현제 시대의 마지막 황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스토아 학파의 철인황제로서 <명상록>과 같은 명저를 남기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당시부터 게르만족의 침입 및 파르티아의 침입이 늘어나는 시기였습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이민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일부 이민족이 로마 영내에 정착하는 것을 허용하고 로마군대에 입대하는 것도 허용하였습니다. 이러한 정책으로 로마는 사회체제가 변하기 시작합니다. 강력한 로마인의 군대는 이 시대를 기점으로 사라져가고, 로마 변경을 수비하기 위해 <야만인>이라 불리는 게르만과 이민족이 로마를 지키기 시작했으니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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